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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인베이글 Jan 13. 2019

워라밸엔 뺄셈도, 덧셈도 필요해

어느 평범한 직장인의 워라밸 사수기

“워라밸, 개나 줘버려”

올해 3월, 온라인 플랫폼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전에는 종이 잡지에서 일했는데 그곳에서 나는 워라밸의 화신이었다. 연차는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올 클리어’ 했고 마감을 칼같이 지켰으며 계절마다 가족 여행을 다녔다. 이런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하는 선배들은 온라인은 녹록치 않을 거라며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했다. 일 잘한다고 소문난 능력자 선배들은 이구동성으로 조언했다. “워라밸, 개나 줘버려”.


개한테 주지도 않았는데 출근과 함께 워라밸은 남의 일이 되었다. 마음만으로 지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월간지 마감이 월 1회라면 온라인미디어의 마감은 ‘그냥 수시’였다. 일은 파도와 같다고 했던가. 크고 작은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와 어느 때는 화장실도 못 가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앉아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허리에도 탈이 생겨 1주일 넘게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다. 부부사이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일이 많고 신경 쓸 것이 많다 보니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건성으로 듣다가 무성의하게 대꾸하거나 일을 생각하다가 엉뚱한 답변을 하는 날이 많아지니 분위기가 좋을 수 없었다. 아내는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며, 이게 뭐냐며, 본인이 감기 걸린 것도 모르지 않았냐며 서운해 했다.   


그렇게 7개월이 지났다. 이제 나는 워라밸을 사수하기 위해 몇몇 새로운 방법을 동원한다. 소소하지만 이런 작은 시간들이 큰 도움이 된다.


출근길에 회사 주차장에 도착해 바로 내리지 않는다. 시동을 끄고 좋아하는 음악을 한 곡 듣고 내린다. 어떨 때는 눈도 지긋이 감는다. 전장戰場에 들어가기 전 마음을 추스리는 것이다. 요즘에 듣는 곡은 제니의 '솔로'. "요즘 가수와 최신가요를  모르십니까? 하루 빨리 산소가 필요한 위험한 상태입니다~"  음악평론가 임진모 선생의 강연 후 들은 후 찾아 들었는데 리드미컬한 전자음이 기분을 끌어올린다. 차를 가져오지 않는 날에는 조금 서둘러 옷을 챙겨입은 후 집에서 음악을 한 곡이라도 온전히 듣고 나온다.


주말은 최대한,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보낸다. 토요일엔 1~2시간 일찍 일어나 인왕산을 산책하고 돌아온다. 베스트셀러 <매일 아침 써봤니>로 유명한 김민식 MBC PD가 일러준 방법인데 이렇게 아침 일찍 움직이면 하루를 허트루 보내지 않았다는 충만감이 차오르면서 일과 휴식의 밸런스가 조금은 맞춰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오전 11시쯤 몸이 슬슬 노곤해지면서 잠의 요정이 찾아올 때면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주말에도 업무를 봐야할 때가 종종 있지만 이왕 하는 것, 기분 좋게 하자 생각한다.


퇴근 후 와이프와 산책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무릇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피곤해 지키지 못하는 날이 많지만 조금의 에너지라도 남아 있으면 함께 나가려 노력한다. 그와는 별개로 하루에 한 번 카톡으로 밥은 먹었는지, 저녁 메뉴는 뭔지 묻는다. 바쁠 때는 그마저 못할 때가 많지만 그것도 중요한 하루 업무 중 하나라고 생각해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내와의 관계가 무너지면 워라밸은 물론 시간시간, 순간순간의 퀄리티가 속절없이 떨어진다.


직장을 옮기면서 워라밸을 사수하지 못하는 현실이 처음에는 괴로웠다. 엑셀과 파워포인트만 하다 한두 주가 훌쩍 가는 날에는 이게 사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렇게 한 달 한 달 시간이 흐르고 지금은 종이 잡지와는 또 다른 일의 재미와 의미를 느끼고 있다. 숫자의 미학이랄까. 설정자가 늘고, 클릭 수치가 뛰고, 트렌드를 분석하고, 오프라인 행사를 기획하다보면 새로운 시각과 능력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럴 때면 '그래 옮기길 잘했어. 계속 머물렀으면 정체됐을 거야' 되뇌인다. 즐겁게 일하기 위한  자기최면적 측면도 있지만 일이 라이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현실에서 일의 긍정적인 부분을 찾을 수 있다는 건 분명 다행이고 감사한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쓴다. 브런치를 살펴보다가 우연히 지금 당장 글을 쓰는 방법에 관한 글을 읽었는데 예전 함께 직장생활을 하는 후배였다.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아이였다니. 바쁜 와중에도 열심히 글을 쓰는 그녀의 활동이 '아, 글을 써야하는데' 생각만 하다가 바쁘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던 오래된 게으름을 단박에 날리는 계기가 됐다. 막혀있던 물꼬가 터진 듯한 후련함. 그날부터 매일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7시 30분까지 핸드폰을 켜고 안방 바닥에 누워 글을 쓴다. 순간순간 떠오른 단상들을 메모해 놨던터라 글은 경보를 하듯 제법 빠르게 화면을 채워나간다. 그렇게 단어가 문장이 되고 문장이 단락이 되면 작은 모래성이라도 쌓은 것 같아 행복하고 뿌듯한 기분이 된다. 두뇌도 잘 했어! 기분좋은 사인을 보낸다.


워라밸을 생각하며 자연스레 '뺄셈'을 떠올리던  시기가 있었다. 내키지 않는 부탁은 과감하게 거절하고, 평일 모임은 가급적 만들지 않고,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도 줄이고...그러다 열심히 글을 쓰며 나름대로 건설적인 일상을 꾸려나가는 후배를 보며 우리 인생엔 '덧셈'도 필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무언가를 새로 배우고 시작한 때가 언제인지. 오랫동안 스스로를 어제같은 오늘에 방치한 것 같다. 더하고 시작함으로써 새로 재편된 일상. 덧셈과 뺄셈을 정확한 타이밍에 끝없이 적용하고 때로 고도함수를 풀어야  하는 것이 인생의 묘미이자 어려움일텐데 지금은 일단 덧셈 카드를 잘 활용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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