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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인베이글 Mar 16. 2019

차범근이 좋아했다는 그 계란을 먹으며

독일로 출장을 왔다. 가기 전에는 짐 쌀 일도 피곤하고 암스테르담 경유 시간까지 포함해 16시간을 날아가야 한다니 적잖이 부담스러웠지만 막상 이렇게 호텔방에 자리를 잡고 글도 쓰고 있으니 좋다.


글쓰기는 내게 끝내지 못한 숙제 같다. 어떻게든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내고 싶지만 이루지 못했다. 어떨 때는 목에 걸린 가시처럼 계속 신경이 쓰이고 밤잠까지 설쳤지만 다음 날이면 그 가시가 또 어떻게 목구멍 안으로 넘어갔는지 그 전만큼의 갈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습관을 들인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지. 몇 번 새벽에 일어나 핸드폰을 켜고 이런저런 글을 썼지만 며칠 못 갔다. 글이 써질 때는 짜릿하고 상쾌해 매일 별 어려움 없이 이어나갈 수 있을 듯 했지만 아니었다. 노트북 켜는 것 조차 번거로워 브런치 앱이 깔려 있는 핸드폰을 글쓰기 도구로 삼았지만 나중에는 그마저 귀찮았다.


이번에 출장을 오면서 처음으로 노트북을 가져왔다. 회사 일을 하자니 아무래도 있어야 할 듯 했다. 보안검색대를 통과할 때마다 가방을 뒤적여 노트북을 꺼내고, 출장지에서조차 일을 해야 하고, 책 읽는 시간마저 뺏기는 듯 해 영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호텔방에 도착해 노트북을 세팅해 놓고 나니 이렇게 글을 쓰게 된다. 보이는 것의 힘인가. 타닥타닥 업무 이메일을 보내고 있자니 잠깐, 내 글도 쓰고 싶은 생각이 든다. 마음에 여유가 깃든 덕도 있다. 일어나자마자 출근 준비를 하고, 출근해 노트북을 켜자마자 군대 행렬마냥 착착착 다가오는 일거리를 하나씩 처리하고, 점심을 먹고오자마자 다시 일에 매달리고, 퇴근하자마자 애들과 놀아줘야 하는 일상에서는 뭐랄까 숨구멍을 찾기 힘들었다.


이렇게 먼 타국으로 나와 있으니 짬짬히 자유 시간이 생긴다. 아침을 먹고 나도 1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고, 오전 일정을 마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까지 또 1시간~2시간 정도의 짬이 생긴다. 그 시간이 숨구멍을 열고, 마음을 적셔, 이렇게 글을 쓰게 한다. 글쓰기 버튼은 저 밑에 가라앉아 있는데 촉촉해진 숨구멍을 통해 들어온 물방울이 역시 말랑해진 기관을 따라 밑으로 밑으로 내려가 마침내 글쓰기 버튼을 톡 하고 건드리는데 성공하는 것 같다.


오늘 아침에는 조식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음식 코너를 둘러보다보니 세수대야만한 큰 그릇에 가득 쌓아놓은 계란이 보인다. 아래쪽은 반숙이고 위쪽은 완숙. 이렇게 구분해 놓은 것을 모르고 어제 생각 없이 반숙 계란을 먹다가 껍질과 계란이 들러붙어 뭉텅이로 떨어지고 노른자가 흘러 내려 접시를 아주 지저분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그런 실수 하지 말아야지 하며 완숙 계란을 골랐는데 뭐 크게 다르지 않다.


계란을 보고 있자니 김정운 교수가 책 <남자의 물건>에서 언급한 차범근의 계란받침대가 떠올랐다. 독일인들은 조식으로 반숙 계란을 먹는다. 차범근 역시 그 문화를 따라갔는데 갓 구운 빵을 사다 가족과 함께 먹었던 그 계란, 그 계란을 놓았던 받침대를  '나의 물건'으로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그래, 독일에서는 계란받침대를 사야 겠구나 싶은데 살 곳과 시간이 있을 지 모르겠다. 이곳이 북유럽이라면 매끈하고 따뜻한 도기가 좋을 듯 하지만 이곳은 극히 남성적이고 산업적인 느낌의 독일이니 도기 말고 세세한 장식이 더해진 금속 물건이면 더 좋겠다.


별 것 아니지만, 이런저런 상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그 생각을 여유롭게 따라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출장지에서 갖는 조식의 선물 같다.


창밖으로 비가 내린다. 추적추적. 봄비와 겨울비 사이 같은 느낌이다. 어제도, 오늘도, 어쩌면 내일도. 어제 이곳에 도착해 피나코텍현대미술관이란 곳을 들렀는데 건축적으로나 소장품 규모와 퀄리티 면으로나 어찌나 훌륭하던지 깜짝 놀랐다. 작품 옆에 붙어있는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보고 있자니 독일 출신 작가가 많았다. 칸디다 회퍼, 안드레아 거스키, 요셉 보이스, 게르하르트 리히터...기분에 따라 한없이 우울해지고 가라앉을 수도 있는 이 날씨가 그들에게 자양분이 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정신없는 일상이 반복될 것이다. 일주일에 반나절쯤, 몇 년 전부터 월요일 오전을 건너뛰고 주 4.5일 근무를 한다는 배달의민족 직원들처럼, 잠시 내 글 한 편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이 없어 글을 못 쓴다는 건 핑계거나 아직 덜 배고픈 것이겠지만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롭게 따라가고, 번쩍 일어나 노트북을 켜고, 타닥타닥 제법 빠른 속도로 글을 써나가며 희열을 느끼는 시간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정기적으로 찾아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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