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레인베이글 Mar 30. 2019

이직 1년, 그 낯 뜨거운 실수의 기록

종이 잡지와 디지털,  달라도 너무 달라

온라인 회사는 컴퓨터부터 달랐다. 노트북이 지급됐고, 책상에는 가로로 넓은 흰색의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가로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엑셀 파일이 많고, 엑셀과 파워포인트 창을 동시에 띄워 넣고 작업하는 멀티 태스킹이 많다 보니 그런 것이었는데 '테크' 특유의 미래적 분위기 때문에 뭔가 앞서가는 느낌이 들어 잠시 '우쭐'했다.   


하지만 나는 기계치였다. 10년 넘게 컴퓨터로 한 일이라곤 검색하고 기사 쓰고, 웹하드에서 자료 받는 일이 전부였다. 원고도 아래 한글로 썼다. 노트북을 켰는데 어찌어찌하다 보니 화살표 모양의 커서가 모니터로 갔는데 그걸 노트북 화면으로 가져오기가 쉽지 않았다. 끌어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마우스 없이 노트북에서만 하려니 잘 안 됐다. 후배들에게 물어보자니 얼굴이 화끈거려 차마 입이 안 떨어졌다. 네이버 녹색창에 이렇게 적었다. '모니터 커서 노트북으로.' 이렇게 쳐도 결과가 나올까 싶었는데 관련한 질문과 답변이 있어 놀랐다.   


디지털 회사로 옮긴 것은 커리어의 방향을 바꾼 중대한 결정이었다. 잡지 기자 시절 편집장은 회의만 했다 하면 디지털, 디지털 노래를 불렀다. 이제 디지털이다, 속 편히 기사만 쓰던 시절은 끝났다, 영상도 찍어야 한다, 디지털을 모르면 잡지 기자도 할 수 없다. '디지털 새마을 운동'이라도 벌이는 것 같았다. 그래! 디지털이 시대의 흐름이라면 언저리에서 방황하지 말고 제대로 배워보자. 그것이 이직 아닌 이직의 배경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회사로 출근을 했다. 좌충우돌의 시작이었다. 회의를 진행하는데 어떤 기자가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한두 번은 넘겼는데 회의 때마다 그러길래 "회의할 때 핸드폰은 좀 집어넣자"라고 힘주어 말했다. "말씀하신 키워드 검색 빈도와 데이터 흐름을 살펴보고 있었는데요..."란 답이 돌아왔다. 디지털 팀에서의 모든 의사 결정은 수치 기반이다. 인터뷰이가 정해졌다고 치자. 그분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검색을 하는지부터 살펴본다. 이왕이면 화제의 인물, 사람들도 궁금해하는 인물을 소개하는 것이 클릭 수치를 끌어올리는 데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핸드폰이든 노트북이든 늘 들고 다니며 검색을 하는데 그런 시스템을 몰랐던 거다. 지금 그 기자는 없다. 이직을 했는데 내 탓도 클 것이다.  

한 번은 회식을 하다 일이 터졌다. 1년 성과를 잘 내고 회식을 하는 즐거운 자리였는데 후배랑 말다툼이 일었다. 후배는 이런저런 업무 프로세스를 예로 들며 공유가 잘 안 이뤄진다고 했다. 논의가 아닌 '통보'가 많은데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얘기였다.


맞는 말이었다. 외부 필자가 인터뷰를 진행할 때도 있었는데 화장실도 참아가며 일할 때가 많아 누가, 누구를, 왜 소개하는지 상세하게 전달하지 못했다. 이것도 잡지와 온라인의 차이다. 잡지에서는 팀장이나 편집장이 '선장'이다. 대부분의 의사 결정을 직접 내리고 그 말엔 권위와 힘이 실린다. 한 권의 잡지는 편집장의 시각이자 편집이요, 깊이인 것이다. 온라인 미디어의 팀장도 물론 의사 결정을 내리지만 그 관계가 잡지처럼 수직적이지는 않다(잡지의 시스템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기사를 올린 후 구독자의 반응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무엇이 '정답'인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도 틀릴 수 있는데...', '이 구성과 콘셉이 안 먹힐 수도 있는데' 하는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팀장 말대로 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무반응인 경우도 많은 것이다. 잡지판에 오래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일방형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져 처음에는 '지시'를 내렸던 것 같다.   


다시 그 날의 사건으로 돌아가자면 내가 못나게 굴었다. 미안하다! 쿨하게 인정하면 될 것을 공유 안 된 게 뭐냐, 카톡으로 공지해 준 내용을 한 번 볼까? 유치하게 나왔다(아아아, 정말 왜 그랬을까?). 둘 다 언성이 높아졌고, 회식 분위기는 초토화됐다. 갑분싸! 그 와중에 와인잔까지 쏟다. 그렇게 회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정말 못해 먹겠네!'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날 밤의 '열폭'은 심각한 내상을 입혔다. 며칠간 말 한마디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우울했다.  


이런 이야기를 모두 풀어놓자면 단편소설 분량이 될지도 모르겠다. 의사결정구조부터 업무 스타일, 커뮤니케이션 방법까지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너무도 달랐고 그 간극에서 지난 1년간 적잖이 방황했다. 배운 것도 많다. 몇 가지 나열해 보자면 이렇다. (아, 이 글은 갑자기 왜 자기 개발서처럼 흐르는가).

1. 부서가 바뀌면 첫 두 달 정도는 업무 돌아가는 방식과 흐름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 좋다. 기존 부서나 회사에서 했던 방식으로 사고하지 말자. 그것은 다른 세상이고 다른 세상에는 다른 룰이 있다. 침착하고 차분하자.


2. 상사와 함께하는 시간도 중요하지만 후배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중요하다. 나의 2년 차 목표는 '함께 일하는 맛'을 안겨 주는 팀장이 되는 것이다.  


3. 어떤 일은 그저 놔두고 묵히는 게 상책일 때도 있다. 후배와 언쟁을 하고 며칠간 고민이 많았다. 불러다 놓고 혼쭐을 내야 하나, 너랑 일 못 하겠다고 해야 하나. 무엇이 맞는지 모르겠어서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그래도 뒷말은 하지 않는 아이라는 것, 일에 애정도 있고, 귀찮은 일, 번거로운 일 먼저 나서서 하는 의리 있는 친구라는 것도 다시금 확인하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풀렸다. (지금은 밥도 자주 먹어요).    


4. 팀장의 역할은 후배들을 위해 '시간'을 내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모두가 더 행복하게 일 할 수 있을지 시간을 들여 고민하는 건 당연하다. 바쁜 일정이지만 후배의 생일 선물을 고르는 데 시간을 쓸 수 있는 것, 기획안을 두고 좀 더 시간을 들여 함께 고민하는 것, 슬럼프에 빠진 것 같으면 커피라도 마시며 고민을 들어주는 것. 후배를 위해 화끈하게 시간을 쪼갤 수 있는 사람이 멋있다.... 고 생각하는데 나부터도 잘 안 되긴 한다.


5. 후배 시킬 생각 하지 말고 웬만한 일은 스스로 하자. 대표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매일 고민하는 다 같은 '꿀벌' 신세다. 우리는 다 평등하다라는 '평등 감수성'을 장착하지 못하면 앞으로의 사회생활은 점점 힘들어질 것 같다.  


며칠 전, 생일이었다.  후배가 "잠깐 시간 되세요?" 물어올 땐 딱 퇴사 통보인 줄만 알았다. 그렇게 따라나섰는데 어두운 회의실을 밝히고 있는 케이크... 아, 저 선배는 뭐란 말인가, 이해 못할 순간들도 많았을 텐데 그 시행착오의 시간을 견뎌주고 기다려준 후배들에게 많이 고마웠다. 1년을 뒤돌아보며 다한다. 누군가의 시행착오를 결코 비웃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좋은 팀장이 돼서 내년 생일 케이크도 꼭 받아 보자고.



매거진의 이전글 그 많던 단골집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