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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인베이글 Jun 21. 2019

겸손했어야 해, 이제 말을 아끼련다

지난 주 회사에서 주최한 행사에서 오래 전 함께 근무했던 후배 은영이를 만났다. 나를 알아본 순간 선배~~ 하고 달려들며 어찌나 격하게 반가워하던지 고맙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잘해줬나?' 멋쩍기도 했다. 번써 15년 전. 여행잡지에서 근무하던 나는 밝고 자신만만했다. 피부도 탱탱하고 '호남' 소리도 좀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자신감과 득의양양함이 몸과 마음에 배어있었던지 당시 나는 말이 많았다. 나중에 안 건데 사주명리학에서도 몸안에 기운이 탱천하면 그 기운이 입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 잘 나가던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간수를 잘 못해서 한순간에 추락하는 것도 다 우주의 섭리를 알아 미리 조심하지 못한 결과라고 했다.


공식 행사가 끝나고 뭘 먹지? 고민하던 찰나, 은영이를 만났고 우리는 손에 포크와 접시를 든 채 상봉의 기쁨을 나눴다. 한 번 대화의 물꼬가 터지고 나니 기억이 10여 년 전으로 타임슬립했다. 동료의 아반떼에 7~8명이 몸을 구겨 나눠 타고 서촌 토속촌으로 삼계탕을 먹으로 갔던 일, 봄날이면 회사 주차장 벚꽃 나무 아래에서 깔깔 대며 사진을 찍었던 일, 어느날 은영이 술이 떡이 돼 택시를 탔는데 갑자기 오바이트가 쏠려 아저씨, 아저씨...급박하게 창문을 내리고 토사물을 허공에 꽃가루처럼 날렸다는 이야기에 편집부 모두가 배를 잡고 웃었던 일...


당시 후배는 인턴이었는데 함께 촬영을 하고 간 삼겹살 집에서 내가 직장 선배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나보다. 나도 그 날이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난다. 원래 그런 잔소리를 하지 않는데 그 날은 왜 그랬는지..."그날 선배가 직장생활 충고도 많이 해 줬잖아요. 아아, 정말 너무 좋았어요. 선배 정말정말 반가워요. 웬일이에요. 이게"


정확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그 후배에게 잘난 척 이런저런 말을 했던 건 기억한다. 그중에 하나가 영어공부였지. "은영아 영어만 잘 도 많은 도움이 될 거야. 해외 기사도 읽고 외국 사람도 팍팍 섭외하면 얼마나 좋냐. 경쟁력이지!"하며 잘난 척을 했다. 정작 나는 그렇게 중요한 영어를 잘 하지도 못하면서. "과장까지는 인사만 잘해도 자동으로 단다는 얘기가 있어", "편집장님도 있고 주간님도 계시지만 제일 신경쓰고 만족시켜야 할 사람은 직속 팀장이야." 같은 말도 했던 듯 하다, 물론 좋은 의도에서 한 말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니 살짝 닭살이 돋는 건 스스로 직장생활의 고수인 양 행동했다는 거다. 아 창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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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날 이후 곧 인턴 딱지를 뗐고 유명 패션지로 자리를 옮겼다. 몇 년 커리어를 쌓더니 전 세계로 여행을 다녔다. 어디어디 왔어요, 와우 하며 제법 길게 단상을 풀어놓은 글은 놀랍게도 영어였다. 주어와 동사로만 짧게 이뤄진 글이 아니고, 접속사와 관계 대명사와 삽입구가 제법 현학적으로 어우러진 문장들. '헉, 영어는 또 언제 배운 거야'. 외국에서 사귄 듯한 이들의 댓글도 꽤 많이 보였고 은영이는 거기에 은반처럼 매끈한 영어로 답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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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전 세계 곳곳을 여행하던 그녀는 다시 돌아와 당시 투자금을 많이 받았네, 연봉이 쎄네 수많은 풍문이 나놀던 온라인 미디어에 뷰티 디렉터로 취직했다. 그 소식들을 접하며 생각했. '잘 났네. 멋있게 산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러시아로, 유럽으로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하는 피드를 보면서 "은영아, 너 뮤지컬 배우같다"고 페이스북에 댓글을 달았고, '00에서 새롭게 직장생활 시작!'하는 메시지가 떴을 때는 "은영아 멋있다, 최고!"라고 안부글을 남겼다. 그러면서 후회했다. '이렇게 잘 사는 애한테 잘난 것도 하나 없으면서 충고는 무슨...' 한 직장에서 변화랄 것도 없고, 승진이랄 것도 없고, 성취랄 것도 없이 묵은지처럼 한해 한해 늙어가는 내 모습과 비교가 되면서 잠시 우울하기도 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가 어깨에 채 힘이 빠지지 않은 채 '후까시'를 잡는 사람들인데 아, 내가 그랬다니 한 번씩 얼굴이 달아올랐다.


잡지 <에스콰이어>에 'What I've Learned'라는 인기 컬럼이 있다. 영화배우, 사업가, 운동선수 같은 나이 지긋한 셀럽이 '지난 인생을 통해 내가 배운 건 말이지...'하고 소회를 털어놓는 인터뷰다. 만약 내가 그 인터뷰에 참여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예전엔 몰랐지요. 왜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건지. 빳빳하게 선 벼가 매력적이라 느꼈습니다. 어렸던 거지요. 행동으로 말하는 것이 멋지고 성숙한 거란 걸 이제 압니다! 충고, 조언 줄이고 나부터 잘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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