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글쓰기-첫사랑>
"우리 학교 말고 아는 남자 애들 한명씩 데려오자. 이제 청소년도 아니잖아?"
대학생이 되고 처음 맞이하는 여름방학,
과 단짝인 쫑, 쓸, 나 셋은 엄마들이 알면 허락하지 않을 남녀가 함께가는 2박 3일 여행을 계획하며 킥킥 거렸다.
막상 날짜가 다가오니 누구를 데려올지 고민이 됐다. 아는 남자 아이들도 없었고 있어도 여자 친구가 있었으니 보내줄리 만무했다.
얼마 전 소개팅한 남자 애에게 고민하다가 슬쩍 말을 했더니 흔쾌히 오겠다고 했다.
호감도 업!
쓸은 사는 지역이 달라 친구가 없어서 마당발인 쫑이 두명을 데려오기로 했다.
한명은 그 전에 얼굴을 본 아이였고 한 아이는 쫑이 좋아한다고 하도 말을 많이 해서 이미 본 것 같은 아이었다. 쫑이 고백했다 차였다고 했지만 핸드폰 커플 요금을 쓰는 요상한 관계였다.
드디어 그날, 1999년 6월 28일, 고속버스 터미널 시계탑 앞.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쫑의 그가 너무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녀석이 쫑을 찼단 말이더냐. 멀리서 쫑과 쫑의 친구로 보이는 남자 두명이 보였다.
처음 보는 피부가 하얗고 오다리인 남자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드라마에서만 보면 하얀 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오며 주변이 모두 슬로우 처리되는,
그 뻔한 장면..
그 장면을 실제로 영접했다. 비극의 시작이다.
내가 M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것이다.
우리의 2박 3일은 청춘 드라마를 방불케 했다.
팀을 나눠 같이 밥을 하고, 물호스로 뿌려가며 물장난을 하고(이건 진짜 드라마 단골 소재), 밤에 서로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참으로 건전하고도 순수했던 여행.
돌아와서 우리 모두 끈끈한 친구 사이가 되었지만 방향을 틀어버린 나 때문에 소개팅남만 자연스럽게 빠지게 됐다.
마침 인터넷이라는 게 생겼고 메일이라는 게 나왔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M과 메일을 주고 받으며 매일 만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내 마음을 들킬까 쫑의 눈치를 보면서도 마음이 멈춰지지 않았다.
M이 주말에 내려와 쫑과 약속을 잡으면 우연히 마주치지 않을까 광주 시내를 몇시간 동안 돌아다니기도 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겨울 방학이 왔다. M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크리스마스를 친구들과 함께 보냈다. 아직 내 마음을 쫑에게도 M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다행이다. 어렵겠지만 이렇게 친구로 지내다 서서히 마음을 접을 생각이었다.
1999년 12월 31일 밀레니엄 새해가 다가온다고 모두 들썩 들썩 정신 없던 그때..
M이 나에게 고백을 했다. 내 마음을 들키지 않고 고백받은 승리의 순간이었지만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음 날 쫑을 만나 사실을 이야기했다. 쫑은 내가 당연히 거절했을 거라고 생각했단다.
배신 당한 쫑은 숟가락을 탕 놓고 나가버렸다.
쫑은 후에 커플요금을 해지하러 M을 만날 때도 가슴이 뛰어 서글펐다고 회상했다.
쫑은 내가 세상 나쁜 년인 걸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M을 좋아했는지도..
다른 학교로 다시 시험을 본 쓸은 헤어지기 전에 우리를 화해시키고 싶어했다.
그리고 우리 둘을 불러 모아 웃으며 헤어지자고 했다.
난 미안함에, 쫑은 배신감에 어색했지만 억지로 웃으며 쓸을 보내줬다.
개강하고 미우나 고우나 쫑과 나는 매일 만나야했다.
그러나 쫑의 가장 큰 미덕은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를 보면 사랑에 바로 빠진다는 것.
신입생 남자 아이와 3월에 바로 커플이 되었다.
MT 때 우리 둘은 부둥켜안고 우정의 견고함을 확인했다.
그 녀석이 왜 좋을까 이해는 안됐지만 뭐 나에겐 은인이니 고마웠다.
이제서야..온전히..눈치를 보지 않고 사랑할 수 있었다.
첫사랑이 시작됐다.
19살에 만나, 군대 2년 2개월을 기다렸고, 취직을 했고,
M이 복학을 하고, M 역시 취직을 했다.
우리는 한번도 싸우지 않고 예쁘게 잘 만났다.
장거리 연애여서 서로에게 방해받지 않으며 각자의 삶을 살았다.
2008년 6월 28일, 시계탑에서 만난지 9년째 되는 날 우리는 결혼 했다.
나는 쫑에게 M을 만나게 해주어 고맙다고 옷사라고 돈을 주었다.
쫑은 그 사이 남자가 여럿 바뀌었는데 이렇게 오래 둘이 만날 줄 몰랐다고
자기가 큰 역할을 했다며 당당하게 받았다.
참으로 훈훈한 결말이다.
올해로 결혼한지 16년, 만난지는 25년이 되었다.
서로를 모르고 지냈던 시간보다 함께한 시간이 더 길어졌다.
여전히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이고, 서로에게 가장 웃긴 존재이며, 가장 잘 아는 사이다.
그렇지만 사랑은 어색하다.
연애 할 때도 사랑이라는 말이 와닿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건 알겠는데 사랑한다는 건 뭘까?
M도 그렇다고 했다. 너무 추상적인 개념이라 와닿지 않는다고..
그래서 군대에 편지 보낼 때 외에는 사랑한다는 표현을 해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글의 주제는 명색이 첫사랑인데..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사기가 아닌가..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스무살 충장서림에서 M이 오기를 기다리다 서있기 어려울 정도로 심장이 저려서 책에 기대고 숨을 고를 때..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아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조용히 들어가 숨소리를 확인할 때..
그리고 그 사람이 사라진 후 삶을 상상하다 먹먹해질 때..
이런 게 사랑이 아닐까..
좋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
맞네..나 사랑하고 있었네.
첫눈에 반한 사람이 첫사랑이고, 첫사랑이 베프고, 베프가 가장 웃긴 사람이고, 가장 웃긴 사람이 남편이다.
우리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고 싶다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런 굴곡 없는 이야기가 팔릴리 없다.
우리 이야기는 다큐에 가깝나?
아니다. 서로 웃기느라 정신없으니..
코미디가 맞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