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출격

오징어뭇국과 감자전

by 티캣

반찬이 없다. 착실히 비워가는 냉장고가 기특하면서도 위기감이 느껴진다.

장을 보면 되겠지만, 금요일은 못난이 채소들을 추려 보내주는 어글리어스의 택배가 도착하니 이틀만 꾹 참아내 보기로 했다. 식재료는 없고, 장은 볼 수 없는 진퇴양난의 시기이다. 공기처럼 있을 땐 모르다가 떨어지니 숨이 가빠오는 김치. 그마저도 바닥이다. 냉동식품도 없다. 지난달에 사서 얼려둔 통통한 오징어가 한 마리 있긴 하니… 오징어뭇국이 어떨까?

오징어뭇국,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공기가 감도는 요새 딱 좋을듯하다. 정말 좋아, 좋은 아이디어야. 오징어는 있고, 무만 하나 구해오면 된다. 거기다 이번 어글리어스 배송리스트에 무가 없질 않은가! 그럼 좋다. 무만 하나 사 오기로 하고, 사이드로 뭔가 하나만 만들면 된다.

오징어뭇국용으로 무를 하나 사냥하러 나갔다. 집 앞에서 무를 구할 수 있는 곳은 동네 터줏대감 마트, 새롭게 생겨난 틈새마트, 그리고 편의점이다. 터줏대감 마트는 규모가 제일 크지만 채소나 과일값이 조금 비싼 편이다. 종종 깨끗한 무를 싸게 샀던듯해 일단 이곳을 기웃거렸다. 마트를 휭 돌며 무를 찾아보니 아뿔싸, 김장철이라 그런가? 물가가 너무 오른 것인가? 무 하나에 4천 원이나 한다… 이 가격은 용납할 수 없었다. 거기다 상태도 썩 좋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고 돌아 나와 틈새 마트로 향했다. 이곳은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은 호두과자 가게터에 어느 날 갑자기,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문을 연 슈퍼인데 과채소를 소량씩 덜어서 판매하는 곳이라 잘하면 굉장히 저렴하게 구입을 할 수 있었다. 기대하며 계단을 올라 무를 찾았다. 무는 가게 구석의 안 보이는 곳에 있었는데, 어딘지 시들한 무가 하나씩 랩에 싸져있고, 4천 원이 넘는 가격표가 싸늘하게 붙어있었다. 안 되지, 안 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왔다. 나는 이때부터 약간 오기가 생기며 당이 떨어졌다. 충동적으로 바깥 매대에 껍질이 푸릇푸릇한 귤 중 껍질이 얇아 보이는 것들을 10알 집어서 2천 원을 주고 샀다. 귤이 왠지 상태가 좋아 보여 날숨을 힘차게 뿜고 좋아, 다시 출동하자, 며 묵언 다짐을 했다. 편의점까진 오르막이 좀 이어진다. 씩씩하게 길을 올라 편의점에 도착했다. 편의점은 편의점인지라, 조금 가격이 있지만 절단무를 팔기도 하니까 승산이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찾았다! 절단무를! 가격표에 쓰여있는 숫자는 2,400원. 아… 정말 애매하다. 평소 같으면 통 무를 사고도 남을 가격이지만…1/3 크기인데. 하지만 이번엔 양을 포기하기로 했다. 뭇국에 들어가는 무의 양이 많지 않으니 조금만 쓰고 남은 것은 무생채를 만들자. 그러면 반찬을 더 만들 수 있잖아. 머릿속으로 나와 내가 잘 합의하고 절단무를 구입했다.

집에 돌아와 무를 1/4 정도 썰고 또 나박나박 썰어 준비했다. 다시마 한두 장을 넣고 물을 끓인다. 팔팔 끓으면 무를 넣고 우르르 또 끓였다. 불이 넘치지 않을 정도로 줄이고 뚜껑을 닫아 무가 투명하게 익을 정도로 끓였다. 고춧가루 반스푼, 다진 마늘 반스푼, 소금을 좀 넣어 간하고 무가 잘 익었나 숟갈로 폭 도리니 부드럽게 잘렸다. 이제 오징어 출격이다. 해동한 오징어를 깨끗하게 씻어 가위로 대강대강 잘라 국에 넣었다. 팔팔 끓도록 불을 좀 올리고 한번 더 우르르 끓였다. 거품을 건져내면 좋다길래 생기는 거품을 숟갈로 떠냈더니 고춧가루가 다 올라와 버렸다. 황당해서 내 웃음도 조금 넣었다.


저녁상으로 뭔가 더 있으면 좋으련만… 일하면서 저녁 메뉴를 계속 고민했다. 어떻게 이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갈 것인지.

그리고 나는 떠올렸다. 집에 있는 감자들을. 감자로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리는 점이 단점이다. 뭘 해야 간편하고 맛있을까. 나는 또 떠올렸다. 우리 집에 들어와 맹활약 중인 쵸퍼를. 쵸퍼라면 뭐든 할 수 있다. 정말 빠른 시간 내에 할 수 있다. 나는 녀석을 써먹기로 했다.

집에 돌아와 낮에 끓여둔 오징어뭇국을 한 번 더 끓여 덥히고, 그 사이에 감자 4알을 빠르게 씻고 껍질을 벗겼다. 손을 다치지 않도록 급한 마음을 계속 누르며 명상하듯 한 겹 한 겹 도려내며 감자를 맞이했다. 다행히 뽀얀 감자들을 사고 없이 만날 수 있었다. 대강 칼로 뚝뚝 썰고, 쵸퍼 통에 넣었다. 전원을 연결하고 버튼을 눌렀더니, 와… 감탄이 절로 나왔다. 1분 만에 감자를 강판에 간 것처럼 걸쭉히 만들어준 쵸퍼가 너무 기특하고 고마웠다. 감자를 채에 받쳐 물기를 빼고, 그 사이 습관처럼 냉장고를 열었다. 파먹을 게 정말 없을까? 계란도 없고, 김치도 없고, 없고… 아, 있다. 엄마가 주신 안 매운 고추! 일단 이것들을 종강종강 잘라 된장과 들기름을 넣고 무쳤다. 그냥 먹어도 오이처럼 아삭하고 약간은 새콤한 맛이 나는 맛있는 고추다. 고추만큼은 넉넉하지만 무침 외 다른 메뉴가 딱히 안 떠올라 이렇게 만들었다. 좋아, 금방 하나 해치웠다. 그새 감자에서 나온 물이 채를 타고 쭉 빠져나왔다. 실리콘 주걱으로 감자들을 꾹꾹 누르며 수분을 어느 정도 더 빼 주고, 물을 조심히 따라낸 뒤 가라앉은 전분을 다시 감자에 넣어 섞었다. 소금 약간을 넣고 골고루 섞은 뒤, 달군 팬 위에 덜고 주걱으로 고르게 펴주었다. 감자 4알로 도톰한 두께의 감자전이 만들어졌다. 감자전은 타지 않을 정도의 중 약불로 조금 오래 지졌다. 한 면이 노릇하게 익으면 끈기가 생겨 잘 갈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내 감자전은 반으로 갈라졌다.) 팬을 휘둘러 멋지게 뒤집고, 반대편을 끈기 있게 익혀준다. 지글지글 맛있는 소리가 들리도록 가장자리에 올리브유를 조금씩 더 둘러서 양쪽을 다 노릇하게 익히면 깔끔하게 떨어진다. 접시에 감자전을 올리니 동거인이 샤워를 마치고 나와 눈치껏 상차림을 도와주었다. 간장에 식초 넣었어? 하니 이미 넣었다는 답이 돌아온다. 아이고 이쁘다.


부쩍 쌀쌀해지는 저녁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따끈하고 칼칼한 오징어뭇국과 잡곡밥과 고추된장무침, 겉은 그야말로 바삭하고 속은 쫀득한 감자전을 맛있게 나눠 먹었다. 오늘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얘기하고, 무를 찾으러 출격했던 것도 얘기하고, 맛있다는 리뷰를 들으며 뿌듯한 저녁을 보냈다.

후식으론 충동구매한 귤이 제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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