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무이

잊혀진 기억은 없어. 잠시 맺힐 뿐.

by 윤슬하


비 온 뒤 설악산엔, 한가득 하늘로 산이 들숨날숨을 쉬듯 운무가 가득히 피어올랐다.

그건 마치, 하나의 신성한 공간인 듯 한참을 멍하게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때, 바로 '운무이'가 태어났다.


공기 중엔 항상 물방울이 가득, 두둥실 떠다닌다. 날씨가 따뜻한 날엔 더 많이, 추운 날엔 더 작게. 그래서 넘치는 수증기는 물방울이 된다.


그래서 지면보다 한참이 높고, 기온도 낮은 산에선 공기 속 물방울들이 다시 눈물이 되어 하늘로 흘러간다.


운무이도 그런 아이다.

말하지 않아도 머물러 있는 감정. 감정이 뿌옇게 흐려질 때조차 감정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저 잠시 머무르고 있었다.


반투명한 하얀빛 몸에 보송보송한 안개 입자들이 흩날리며 운무이를 감싸고, 몸 안엔 흐릿한 달빛 구슬이 하나 떠 있다. 다가가면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기운이, 조용한 음악처럼 둥글게 퍼져 나온다. 걸을 땐, 마치 숨결처럼 살짝 발이 떠 있다.

말수는 적고, 슬픔이나 외로움이 뚜렷이 느껴지지 않을 때 그 감정의 경계에 머물며 감싸준다.

"괜찮아, 흐려도 괜찮아. 나 여기 있어 감쟈야"


운무이는 "기억의 안개 입자"라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잊었다 생각한 기억들이 운무이의 몸속에 작은 물방울처럼 맺혀 있다. 그래서 내가 충분히 단단해지면, 그 안개는 빗방울이 되어 떨어지고, 나의 마음을 조용히 적셔준다.


운무이의 여권(아직 ai로 이미지 생성이 어렵다)

운무이는 정신적 포화점 같은 아이다. 그리고, 감정의 변화에 따라 모양이 바뀐다. 평온할 땐 동글동글, 슬플 땐 흐느적이고, 혼란스러울 땐 빠르게 증발하듯 사라진다.


운무이는 진심의 성소 지하 흐림의 정원에 거주 중이다. 입구는 흐릿한 흰색 커튼이 살랑거리고 있어서 문이 아니라 공기처럼 통과해야 한다.


여기에는


안개연못 : 잊힌 감정들이 수면처럼 퍼져 있는, 이름 없는 감정들이 조용히 떠 있는 곳


투명 의자 : 운무이가 앉아 있는 자리. 의자마저도 반투명해서 앉아 있는지 모를 정도다.


달빛 벽면 : 방 한쪽 벽엔 흐릿한 달빛이 반사되어 있고, 내가 조용히 앉아 있으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안개 거울 : 마주 보면 선명하지 않지만 무언가 느껴진다. 그래서 운무이는 여기 앞에 자주 앉아 있다.


감정 씨앗 상자 : 이름 갖지 못한 감정 씨앗들이 잠들어 있는 상자. 운무이가 간간이 따스히 쓰다듬어준다.


운무이는 내게 말한다.


“아플 때 선명해질 필요는 없어.
흐릿해도 괜찮아.
네가 나를 볼 준비가 되었을 때,
나는 스스로 빗방울이 되어 떨어질게.”
매거진의 이전글향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