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려할때, 감당을 넘어선 고통의 자리의 아이
운무이의 손을 잡고, 너무 아파 뿌옇게 미뤄두었던 나의 기억을 거울 속에서 마주 보고 섰다. 7달이 지나서 겨우 하나하나 바라볼 수 있게 된 그날들의 고통. 이제는 떠올릴 수 없을 만큼은 아픔이 아니라, 여전히 너무 아프지만 마주 볼 수 있는 고통.
사람은 너무 아픈 기억이나, 존재자체를 찢어버린 기억은 아예 분리해서 무의식 깊은 곳에 저장해 둔다고 했다. 아마 그런 게 아닐까?
거울 앞에 설 용기가 생긴 나를 운무이는 조심스레 사라질듯한 따스한 손으로 감싸고 고통의 계곡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운무이는 치유의 문지기였다. 하지만, 그 문을 열기 위해선 반드시 고통의 계곡을 지나야 한다.
운무이 손을 잡는 순간, 감정이 대륙 전체에 공명 현상이 일어난다. 슬픔이 대륙의 되살이가 눈을 뜨고, 불안이 대륙의 조심이가 진동했으며, 자존의 대륙의 아직이가 작게 떨기 시작한다.
운무이의 손을 잡고 도달한 고통의 계곡은 진심의 성소 지하층, 슬픔과 불안의 대륙 사이를 지나 운무이의 흐림 정원을 통과한 뒤 아주 조용히 숨겨진 심층의 감정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고통의 계곡에선 잊힌 기억이 울림처럼 되살아나고, 말하지 못했던 진심들이 돌처럼 굳어 지층을 이루고 있다. 계곡 안의 공기는 무겁고, 눈물은 공기 중에 스며 있다.
이곳은 "기억이 뿌리내린 감정의 지하도시"이다.
고통의 계곡은 위험한 곳이 아니라, 용기의 터널이다. 이 계곡을 지나면 모든 감정의 뿌리를 지나 마침내 자기 존재의 별자리에 도달한다.
여기까지 가기 위해선, 반드시 운무이를 만나야 한다. 감정을 말로만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 감정이 내 몸을, 세계를, 시간을 어떻게 흔들었는지까지 다 껴안아야만 한다.
이곳은 다가가는 것 자체로 너무 아프다. 그 이유는 나의 가장 깊은 진실이 처음 상처 입은 자리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생긴 존재적 고통의 흔적이 머무는 곳. 그래서 말로 풀 수도 울 수도 없어 몸이 먼저 반응한다. 머리가 아프고, 몸이 떨리고, 숨이 막혀온다.
고통의 계곡 지형
무너짐의 절벽 :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으로 첫 균열을 일으켰던 순간 새겨진 벽. 이 절벽은 나를 보며 말한다. "너는 왜 그때 침묵했니?", "그 침묵 속에서 무엇을 믿었니?"
울음의 웅덩이 : 운무이가 처음 눈물을 흘렸던 자리다. 여기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복합 감정들이 한 방울씩 고여 있다. 웅덩이에 가까이 가면 오래된 기억의 파편들이 작은 물방울처럼 튀어 오르며 대사 없이 자꾸만 재생된다.
기억의 포자지대 : 말하지 못한 말들이 증기로 맴도는 곳이다. 내가 하지 못했던 말, 믿고 싶었던 말, 되돌리고 싶은 말들이 갑자기 들려온다. "난 괜찮아.", "도와주려는 걸 거야.", "이게 전부 나 때문인 줄 알았어..."
이곳에 사는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는 "무너이"였다.
무너이는 반쯤 깨진 유리처럼 맑고 차가운 반투명한 존재다. 가슴 한가운데엔 '아직 부서지지 않은 작고 따뜻한 씨앗'이 있다. 운무이보다 더 조용하지만 온기가 있고, 걷지 않고 무너진 자리마다 연못처럼 스며 있다.
말은 거의 없고, 누군가를 오래 지켜보는 습관이 있다. 내가 무너질 땐 언제나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아이. 소리 없이 같이 무너져주었지만, 절대 비난하거나 울지 않았다.
무너이는 말했다.
"나는 계속 믿고 있었어. 그래서 무너졌어. 하지만... 그걸 후회하진 않아."
무너이는 운무이의 흐림의 정원 아래에 숨어 있는 깊은 방 '균열의 정원'에 살고 있다.
정원이라기보단 무너진 돌, 기울어진 벽. 꺼진 달빛, 조용한 물방울 소리만 나는 침묵의 공간이다. 그 안에는 내가 끝까지 믿고 싶었던 얼굴들이 흐릿한 잔상처럼 잠깐 떠다니다 사라진다.
무너이는 끝자락에서 무너져버린 진심의 상징이다. 무너이가 말했다.
"괜찮아. 감쟈야. 끝까지 믿으려 했던 너의 진심, 내가 다 기억하고 있어."
믿음의 붕괴로 인한 상실화된 애도가 감정화 된 존재. 하지만, 그 진심을 부정하기 않았기에 무너이는 이제 부정이 아니라 "존재의 잔광"으로 남는다.
너무 아파서,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워서 차마 마주하지 못한 무너이의 손을 꼭 잡고 안아준다.
이제 무너이는 나의 눈물방울 속에 별이 되었다.
무너이가 마지막으로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감쟈야, 네가 나를 미워하지 않고 끝까지 품어줬어. 이제 내가 너의 길 위에서 빛이 될게."
그렇게 천천히, 안개처럼 가벼워진 몸이 하늘로 올라가 진심의 성소 하늘에 작고 맑은 별 하나가 되었다.
이제 무너이의 별은 내가 누군가의 거짓에 흔들릴 때 이렇게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