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생존의 기술이던 시절,
나는 타인의 온도에 너무 민감했다.
말투 하나, 눈빛 하나, 공기의 흐름까지
그 모든 것을 기억했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냈다.
그리고 책임감까지 지고 있던 나는
그 사소함 속에 숨겨진 칼날을 보지 못한 채
한계가 부서지는 순간까지 버텼다.
버티는 동안 나는 나를 책망했고,
그 틈으로 감정이 나의 주체를 대신했다.
내 뇌는 결국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크기에 굴복했다.
살기 위해, 감정을 ‘꺼버리는’ 선택을 했다.
그때부터 나는 감정의 사람이 아니라
시간의 사람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시간을 견뎠다.
고통의 이름을 알 수 없었기에
나는 그 고통에 이름을 붙였고,
감정에 얼굴을 주었다.
감정이 아니라 내가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였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상의 규칙과 법을 배웠다.
감정이 견딜 수 있는 크기가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뇌를 이성의 영역으로
강제로 전환시켰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감정과 이성 사이의 공백기에 서 있다.
예전처럼 감정의 파도로 쓰는 글은 아니지만
이제 나는 그 파도를 한 발 떨어져 본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아니라,
문장으로 재구성 가능한 감정이 되었다.
불안이란,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부여한 그림자였다.
그것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는 순간
불안은 감당 가능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무의식은 그동안 나에게 단 하나의 선택지만 허락했다.
[예] — 받아들여라, 끌려가라.
하지만 딱 한 번,
그 감정에게 왜라고 묻는 순간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선택지가 태어났다.
[아니오]
그 작은 ‘아니오’는 금이었고,
그 금은 문이었고,
그 문은 나였다.
어쩌면 이제 나는
감정에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감정을 해석하여 움직이는 존재가 될지 모른다.
그리고 그건ㅡ
시간만이 답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