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쓰다 펜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나타난 감정
책을 읽는 걸 좋아했다. 취미랄까나, 요즘 생각해 보면 있어 보이고 싶었을까나 아님, 워낙 궁금한 게 많아서였을까.
한 때,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란 책을 열심히 읽고 줄 긋고 따로 필사까지 했었다. 근데 그냥 지금 생각해 보면 전부 머리로 지나가는 지식일 뿐이었다.
책은 나이에 따라 경험에 따라 달리 읽힌다는 게 이제 조금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책의 글귀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건 정말이지 글을 쓰다 툭ㅡ하고 펜을 꺾어버리는 일 같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예쁜 포장지에 담긴 선물을 뜯는 일인 줄 알았는데, 사포지로 포장된 선물을 맨손으로 뜯으며 '이게 나라고?' 이런 느낌이 든다. 속이 불편해서 약간 토할 것 같은 느낌. 그때 태어난 아이가 들춰짐이다.
들춰짐이는 얇은 회색 외투를 입고 있는데, 그 외투가 자꾸 미끄러져 내려간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 표정으로 손에는 작은 메모지 하나 들고 있다. 거기에 적힌 글은 항상 같다.
"이거, 네 선택 아니었어."
들취짐이는 단순 감정이 아니라, 나의 서사가 바뀌는 순간에 나타나는 감정이다.
"내가 착해서 참은 게 아니라, 무서워서 참은 거였네."
들춰짐이가 나타나면 속이 더부룩하고, 이유 없이 짜증이 나고 머리가 아프다. 머리는 '이해'하는데 몸이 거부한다.
들춰짐이는 내가 오랫동안 쓰던 갑옷의 정체를 폭로한다. '착함'이라는 갑옷. '다정함'이란 갑옷. '이해'란 갑옷.
그리고 그게 미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생존기술이었다 것도 알게 해 준다.
더 아이러니한 건, 들춰짐이를 발견한 게 타인의 불안에 의한 방어기제를 분석하다 찾아낸 것이란 거다. 제법 뼈아프다.
들춰짐는 "그래도 좋은 경험이지", "너무 의미 부여하지 마." 이런 말을 들으면 더 난폭해진다. 왜냐면 방금 포장지를 뜯고 나왔는데 또다시 포장지를 덮어버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들춰짐 이에는 배신감, 자존심 상함, 억울함, 그리고 약간의 불안이 함께 있다.
들춰짐이는 따뜻한 말을 안 한다. 대신, "응. 그거.", "이제 알아버렸지?", "이제 그 방식 못써.", "내가 나를 봤잖아." 이렇게 말한다.
아마, 들춰짐이는 오래 머물고 가진 않을 거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대신 기준을 남기고 간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사라진다"를 알아차리는 감각. 친절을 자동이 아니라 선택으로 바꾸는 스위치. 그래서 "싫다"라고 말하기 전에 몸으로 신호를 주는 경계감각이다.
알수록 즐겁다 해야 할까, 알수록 불편하다해야 할까 더 이상 어떤 역할 뒤에 숨을 수 없는 나를 자꾸만 찾아가는 건 제법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그렇게 나를 찾아가고 안아주는 일은 분명 나답게 살 수 있게 해주는 작은 발자국이 될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