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인생에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하루에 1~2시간은 무엇을 써야할지 고민한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하루라는 24시간 안에 실천할 수 있느냐는 것. 이 두 가지다. 이 쓰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친숙해 지기 위해 출퇴근 길에 소설가, 시인들이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라디오를 찾아 듣게 되었다. 그들은 매일 매일 어떤 루틴, 즉 일정함을 가지고 글쓰기에 임한다고 한다. 매일 마주하게 되는 그 성실함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어제도 쇼파에 누워 하루 종일 천장만 바라보았고, 엊그제는 눕기 전에 걷다가 하루를 보냈기 때문이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 데 불안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매일을 성실히 보내지 않았음에서 오는 어떤 자기 책망 같은 것과도 비슷했다. 어느 날은 써야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그 상상만하고도 하루가 지나 버린 적도 있다. 실제로 꺼내어 보지 않게 된 나의 생각은 마음 속 깊숙이 떨어지고 추락한다.
그렇다면 나는 왜 매일 자기 책망을 하면서도, 매일 추락하면서도 쓰고 싶을까. 쓰고 싶은 이유를 찾아보고 싶었다. 무엇을 행하는 데에는 그 이유가 분명 있을 것 같다.
도통 모르겠다는 말이지. 나는 왜 쓰고 싶을까. 이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자 한다면 조금 더 과거에서 찾아봐야 할 것 같다. 나는 왜 쓰고 싶은가. 언제부터 쓰고 싶었을까.
나는 언제나 사람으로부터 시작했지. 사람으로부터. 그러자 떠올랐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사람.
처음 무언가를 읽고 쓰는데 집중 했었던 때는 약 15년 전쯤이었다. 강원도 어느 산골자락에서 군복이라는 투박한 옷을 입고 겨울을 날 때였다. 영하 30도 쯤은 우습게도 찾아와버리는 강원도의 겨울 한 복판에서 나는 군인이었다.
군대라는 것은 다소 제한적이고 수직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곳에서는 입대를 한 시점으로부터 계급이라는게 정해지는데, 맨 아래 계급부터, 사회에 나가기 얼마 남지 않은 계급까지 모두 다 제어 당한 자유로움 사이로 부정적인 것들이 쏟아지기 마련이었다.
그것을 견디기 위해 처음 써보는 것을 시작했던 것 같다. 힘들 때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사람. 억압된 자유로움에서 생각났던 한 사람. 엄마.
엄마와의 편지를 주고 받기 시작하면서 나는 쓰기 시작했다. 엄마와의 편지는 내 생각을 정리하고 다듬는데 꽤 많은 영향을 미쳤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견딜 수 있었다.
강원도의 겨울 산골짜기에서 엄마를 드디어 마주 했던 것 같다. 엄마와 드디어 얘기할 수 있었다. 쓰는 것을 통해 드디어 말이다. 그 경험이 너무 좋았던 것일까. 왜 15년이 지난 뒤에 이렇게 나는 쓰고 싶을까. 어쩌면 소통하고 싶은게 아닐까.
정말로 잘 다듬어진 글로 나는 읽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다. 이것은 내가 건네는 하나의 의사소통의 시작이며, 잘 정리되고 다듬어 질수록 기쁘게 맞이 할 수 있는 하나의 인사(人事)일 수도 있겠다.
비록 부족하고 서툰 손짓이지만, 매일은 아니더라도 조금 더 잘 다가가 보고 싶다. 더하여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싶다.
반가워요. 그리고 또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