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거실에 앉아 역 근처 사거리에서 본 파란 하늘 위의 구름들을 떠올렸다. 손가락처럼 생긴 흰 구름 몇 개. 작은 동생 구름 몇 개. 뭉친 누나 구름 몇 개. 구름들이 참으로 맑았다. 저 흰 구름들을 내 눈에 끌어오고 싶었다.
요 몇 일. 가수면 상태에 있는 것처럼, 혹은 마취약을 먹은 것처럼 뿌연 시야 속에서 지내고 있다. 너무 많이 마셔버린 카페인이 내 몸 속 어딘가 샅샅히 숨어 있다가 피곤함으로 바뀌어 버렸다. 오른 손목에, 왼쪽 종아리 어딘가에 눌러 담겨 있다. 가장 많이 쌓여 있는 곳은 눈꺼풀.
그 아래, 눈두덩이 밑이다. 그곳이 무겁고 그늘졌다. 해결될 수 없는 막막함.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해결하려면 너무 오랜시간이 걸리고 또 해결하고 나면 다른 해결해야 할 게 쌓여 버리니까.
근데 그 해결책이 주어진 문제들이 내게 살아갈 힘을 준다. 문제를 해결해야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조급함이 되살아 났다가도 “조급해서는 해결할 수 없잖아.”라고 내가 보는 많은 것들이 말해준다. 나도 알아. 근데
“그냥 로또 맞은 것처럼 그런 천운이 내게 올 수는 없는 거지?”
이 질문에 답해줄 사람은 없다.
적어도 이 적막한 거실에는 말이다.
밖으로 나가 보았다. 바뀐 공기가 차가웠고, 시원하다. 적막한 거실 안에서의 천장은 칙칙했는데 하늘이 눈이 부셨고 구름이 맑고 희었다. 저 구름 위에 떠 있을 수 있다면 침침한 나의 세상도 밝아질 수 있나?
이 질문에도 답해줄 사람도 결코 없다.
하늘을 오래 보니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각막에서 생성된 눈물이 무거운 눈두덩이 아래를 타고 둥근 볼 아래로 흘렀내린다.
찬 공기를 한번 크게 들이 마셔보았다. 집 앞 놀이터에서 몇몇 아이들이 소리를 꽥꽥 소리지르며 놀고 있고, 나이 드신 할아버지는 어린 손주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하고 있었다.
무거운 내 눈두덩이 아래에 흐르는 눈물을 제외하고 세상은 이처럼 잘 흘러가고 있다. 아파트 가로수에 살고 있는 새 한마리가 청초하게 울고 있었다. 그래. 내 질문에 답해줄 사람은 너구나.
새에게 물었다.
난 잘 살고 있는 걸까. 내가 잘 하고 있는 걸까. 난 어떻게 될까. 새는 답해 주지 않았다.
질문이 잘못된 것일까.
다시 새에게 물었다.
커피를 마실까. 라떼를 마실까. 안에 크림이 들어 있는 카스테라도 먹을까? 그럴까?
새가 소리를 내어 답했다.
“휴휴 히”
커피를 마셔야겠다. 아까 본 흰 구름이 담긴 카스테라도 먹어야 겠다. 라떼는 뜨겁게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