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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Mar 28. 2022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1)

벨푸어 선언과 이스라엘 건국 

미국의 요명한 토크 쇼 진행자이자, 성공한 여성 사업가인

오프라 윈프리는 

어린 시절 사촌 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어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어머니를 찾아갔지만,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보지도 않고 

"여자가 어떻게 처신했기에 그런 꼴을 당했냐."라고 나무랐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은 사촌 오빠였지만, 그보다 더 큰 상처를 준 사람은 

믿었던 어머니였다." 


나도 이런 비슷한 잘못을 저지른 경험이 있다.

팔레스타인, 아랍, 이슬람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테러의 대명사였고,

평화를 파괴하는 이상한 사람들로 인식하게 되었다. 

9.11 테러는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왜 그러는지 궁금해졌다.


역사를 잘못 알거나 왜곡하면 

나의 세대가 아닌 내 다음 세대나 그다음 세대에 피해를 줄 수 있다. 

이런 누를 끼치지 않으려면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바로 알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한다.


<시온주의와 이스라엘 건국 그리고 벨푸어 선언>

 1917년 11월 2일, 

영국 내각을 대표해서 외무 장관 아서 제임스 벨푸어가 작성한 

벨푸어 선언은 딱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본거지를 수립하는 것을 찬성하고, 이러한 목적을 신속하게 실현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으며, 그로 인해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나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이 누리는 권리나 정치적 지위가 침해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는 바입니다.”

이 선언은 부드럽고 기만적인 외교의 언어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본거지를 수립하는>데 찬성한다는 

모호한 구절을 담았다. 
 이 선언으로 영국은 사실상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세워는 

시온주의를 지지한다고 약속한 것이다. 


 당시 벨푸어는 이 땅에 거주하는 6%에 불과한 극소수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지칭하면서 민족적 권리를 부여했다. 


벨푸어 선언은 전면적인 식민지 충돌의 신호탄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을 희생시켜 배타적인 <민족적 본거지>의 건설을 목표로 한 

100년 동안 이어지는 공격의 시작이었다. 


당시만 해도 유대인은 인구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 선언이 발표되었을 때 많은 팔레스타인인은 아마 이런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이들이 이 선언이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대해 갖는 

재앙적 함의를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정체성은 시온주의와 마찬가지로 여러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등장했으며, 

근대의 시온주의와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반유대주의가 시온주의에 기름을 부은 여러 요인에 불과했던 것처럼, 

시온주의의 위협 역시 이런 자극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기회가 생겨나자 팔레스타인인들은 영국의 통치에, 

그리고 영국인들의 특권적인 대화 상대로서 

시온주의 운동을 내세우는 것에 조직적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1920, 1921, 1929년에 잇따라 대규모 폭력 사태가 벌어졌는데, 

매번 강도가 심해졌다. 

모든 폭력 사태는 자생적으로 분출한 것이었는데, 

대개 시온주의 조직들이 힘으로 위협하면서 촉발되었다. 


 영국인들은 평화적 시위와 폭력 사태를 똑같이 가혹하게 진압했지만, 

아랍 대중의 불만을 계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불과 10년 만에 터키, 이란,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가 모두 독립을 달성했다. 
 1922년 구성된 국제연맹은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령을 반포하여 

영국의 통치를 공식화하였다. 

위임 통치령은 시온주의 운동에 이례적인 선물이라도 주듯이 

벨푸어 선언을 원문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선언의 약속을 크게 확대했다. 


위임통치를 계기로 유대인 이민이 유입되고 <유대인이 이 땅에 빽빽하게 정착>하는 과정이 

발 빠르게 진행되었다.
 유대인 인구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시점에 6% 정도였으나 

1926년에 이르러 약 18%로 늘어났다. 


 하지만 1933년에 독일에서 나치가 권력을 잡으면서 

유대인 공동체를 박해하고 유럽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 
 독일은 많은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고, 

1935년 한 해에만 6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왔는데, 

이 숫자는 1917년 이 땅에 살던 유대인 인구 전체보다 많았다. 


 15
년이 넘도록 이어진 각종 회의와 시위, 영국 관료들 과의 만남 등에 있었지만, 

지도부가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자 실망한 팔레스타인인들은 결국 풀뿌리 봉기에 나섰다. 
 식민지 역사상 최장 기간인 6개월간의 총파업이 있었고 

파업은 마침내 1936-1939년 대반란으로 발전했다. 


 1937년 10월 무장 반란이 전국을 휩쓸었다. 

반란은 2년이 지나서야 대대적인 무력 사용으로 제압되었는데, 

영국 정예 부대 10만 명이 재배치되었다.

 반란은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국의 야만적인 탄압과 수많은 지도자의 죽음과 유형, 내부에서 벌어진 갈등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은 방향을 잃고 분열되었고, 

1939년 여름에 반란이 진압될 무렵에는 경제도 허약 해졌다. 


 하지만, 1939년 유럽에서 전운이 확대되면서 런던 당국의 정책에 대대적인 변화가 생겼다. 

시온주의를 전면적으로 지지하던 입장이 바뀐 것이다.
 유럽이 또 다른 세계대전으로 미끄러져 들어감에 따라 

영국인은 아랍 각국과 이슬람 세계의 분노를 다독인 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1931년 1월 영국 내각 보고서에는 

<이집트와 이웃 아랍 국가들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1939년 봄 런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팔레스타인인, 시온주의자, 아랍 각국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회담이 실패로 돌아간 뒤, 

네빌 체임벌린 정부는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과 아랍, 무슬림의 분노한 여론을 달래려는 백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에서 시온주의 운동에 대한 양국의 지지를 대폭 삭감할 것을 요구했다.

 이 백서에 대한 의견이 분분할 즈음 체임벌린의 임기가 만료되었고 

후임으로 총리가 된 윈스턴 처칠은 영국 정계에서 가장 열렬한 시온주의자였다.  


 더욱 중요하게도 나치가 소련을 침공하고 진주만 습격 이후 미국이 참전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는 가운데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했다. 

이제 영국은 기껏해야 이류 강대국일 뿐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이제 영국의 손 안에서 벗어났다. 


애당초 팔레스타인인들은 불리한 조건에서 게임이 시작되었다. 
 시온주의 단체가 대규모 자본을 투자하고, 

근면하고, 정교하게 책략을 구사하고, 

강도 높은 로비를 벌이고, 

효과적으로 선전 활동을 하고, 

은밀하고 공공연하게 군사적 수단을 행사하자 더욱 불리해졌다. 


 영국과 시온주의 운동, 국제연맹 위임통치라는 

강력한 삼각동맹 앞에서 해볼 만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팔레스타인에게는 뚜렷한 실체가 없고 조직화되지 않은 

아랍의 여론 말고는 진지한 동맹자도 없었다. 
 실제로 아랍 나라들은 여전히 영국과 프랑스의 손아귀에 있었고 

민주적인 기관이 전무했기 때문에 친 팔레스타인 목소리를 충분히 낼 수 없었다. 


따라서 1948년 5월 아랍의 반대와 팔레스타인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건국이 이루어졌고 대다수의 아랍인들이 무력으로 쫓겨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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