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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Mar 31. 2022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2)

팔레스타인 난민 

<팔레스타인 난민>

1949년 여름에 이르면 팔레스타인 국가는 황폐해지고, 대부분 파괴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신생 이스라엘 지역에 사는 

아랍 주민 80% 정도가 자기 집에서 쫓겨나고 토지와 재산을 잃었다. 

130만 팔레스타인 가운데 최소한 72만 명이 난민 신세가 되었다. 


백서와 전쟁 상황으로 유대인 이민 유입은 줄어들었지만, 

시온주의 지지를 포기하는 듯 보이는 영국 정부에 분노한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후원자에게 접근하는 외교적 조정을 기민하게 추진했다. 
 그리고 이 시기 동안 시온주의자들은 군사 역량을 계속 강화했다. 


 시온주의 운동의 압력과 영국 총리 처칠의 지지 아래 

1944년 영국군은 유대인 군대에 훈련과 전투 경험을 제공했다. 

이로써 시온주의 운동은 다가오는 무력 충돌에서 결정적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팔레스타인은 전시의 호황 덕분에 경제적 피해를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정치적으로 사분오열된 상태였고, 

많은 지도자들이 아직 망명 상태이거나 영국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들은 단일한 부대를 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전쟁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준국가가 전혀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팔레스타인에 대한 식민주의 공격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미국은 진주만 공습 이후 갑자기 세계적 강국이 아니라 절대 강대국이 되었다. 


 1942년을 시작으로 미국의 함대와 병력, 기지가 

북아프리카와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에 도착했다. 

그 후 그들은 중동을 떠나지 않았다. 


이런 정세의 변화를 다비드 벤구리온이 이끄는 시온주의 정치인들은 선경지명 있게 내다보았다.
 1942년 뉴욕 빌트모어 호텔에서 열린 중요한 시온주의 회의에서 

시온주의 운동은 팔레스타인 전체를 유대 국가로 전환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이런 야심 찬 프로그램을 미국, 

그것도 뉴욕에서 선언한 것은 우연한 일치가 아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뉴욕은 세계에서 유대인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다. 

오래지 않아 시온주의 운동은 미국의 많은 정치인과 여론을 이런 목표로 결집시켰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아랍인 다수의 땅에 유대 국가를 세운다는 목표를 지지한 뒤, 

한때 영국의 지지를 받던 시온주의는 이제 중동에서 새롭게 등장한 미국 패권의 요체가 되었다.

시온주의자들은 힘이 있고 강력한 외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은 허약하고 파편화되었으며 

아랍의 신생 독립국 역시 취약하고 증오에 찬 분열에 시달렸다. 


 1942년 당시 이집트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던 마일스 램프슨 영국 대사는 

탱크로 카이로 압딘 궁전을 에워싸고 롤스로이스를 타고 궁전으로 들어가 

파루크 국왕에게 영국이 지명한 수상을 임명하라고 요구했다. 


새로운 강대국 미국과의 관계에서 아랍 지도자들 대부분은 

그들에게 고분고분하다는 이유로 선택받은 인물로 전문성이 부족하고, 

세계정세에 무지한 데다가 나약한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아랍 통치자의 무지 때문에 미국의 영향력에 저항하거나 

미국의 정책을 바꿀 가능상이 전혀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온주의 운동은 세계 정치에 대한 깊은 이해를 활용했다. 
 다비드 벤구리온과 훗날 이스라엘 2대 대통령인 아츠하크 벤츠비는 

미국에서 몇 년간 생활하면서 시온주의 대의를 위해 활동했다. 

 반면, 팔레스타인 지도부 가운데 어느 누구도 미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1947년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새로 만들어진 유엔에 맡겼고, 

유엔은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한 권고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를 만들었다. 
 유엔을 지배하는 강대국은 미국과 소련이었는데 

시온주의자들은 양국을 향해 외교적 노략을 기울인 반면, 

아랍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의 결과로 

팔레스타인의 56%가 유대인 몫이 되었는데, 

1937년 17%였던 것과 대비되었다.

유엔이 분할을 결정하면서 시온주의 운동의 군사, 민간 구조는 전후 시대에 등장한 

두 초강대국의 지지를 받았고, 최대한 넓은 지역을 차지할 만반의 대비를 갖추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닥친 재앙은 

그들 자신과 아랍이 약하고 시온주의가 강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런던, 워싱턴, 모스크바, 뉴욕, 암만 등 여러 머나만 곳에서 벌어진 사건의 결과이기도 하다. 


1947년 11월 30일부터 영국군이 최종적으로 철수하고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수립될 때까지 

시온주의 군사집단은 팔레스타인인들과 그들을 도우려 온 아랍 지원병들을 잇따라 물리쳤다. 


팔레스타인 전쟁을 거치면서 중동에서 영국이 힘을 잃고 

소련과 미국에 자리를 내주는 변화가 확인되었다.
 양국 모두 분할 결의안에서 예견된 아랍 국가 창설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고 

또한 이스라엘과 요르단, 영국이 암묵적으로 협력하는 가운데 

아랍 국가를 제거하는 것을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관계 형성은 러시아와 다른 경로로 진행되었다. 

러시아 차르의 세력권이 시온주의를 탄생시킨 

유럽의 악독한 반유대주의의 거대한 용광로 중 하나였던 반면, 

미국은 줄곧 동유럽에서 박해를 피해 도망친 유대인을 너그럽게 받아 주는 피난처로 여겨졌다.


 실제로 동유럽에서 탈출한 유대인의 90%가 미국으로 이주했고

1880년에서 1920년 사이에 미국 유대인 인구는 25만 명에서 400만 명으로 늘어났고, 

1930년대 초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시온주의는 미국의 영향력 있는 여론 집단들을 장악했다. 


유엔 난민 구호기구에 등록된 220만 팔레스타인 난민의 본거지 요르단에서는 

37만 명이 여전히 난민촌에 남아 있고, 

요르단 강 서안에서 등록된 난민 83만 명 중에서도 1/4이 지금도 남아 있다. 


 시리아에서도 55만 명중 1/4이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고 

레바논에서도 47만 명 중 절반이 난민촌에서 생활하고 있다.
 1967년까지 이집트가 지배한 가자지구에 등록된 난민 14만 명의 경우도 그 비율이 비슷하다. 


 그리하여 팔레스타인 난민 400만 명 정도와 유엔에 등록되지 않은 이들이 

오늘날 난민 촌이 아닌 아랍 여러 국가와 세계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가자지구는 1948년 이후 자기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인들이 벌이는 저항의 중심이었다. 

파타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창립한 지도자 대부분이 이 비좁은 동네에서 등장했다. 


 또한 전투적인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은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을 이곳에서 끌어 모았고, 

이스라엘에 맞서 가장 끈질기게 무장투쟁을 주창한 

이슬람 지하드와 하마스의 탄생지이자 요새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아랍 각국 정부들로부터 대개 무시를 당하거나 재갈이 물리고 

열강의 세계적 야심이라는 제단에서 희생되었지만 

중동지역 판세를 흔들 수 있는 세력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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