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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Apr 04. 2022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3)

6일 전쟁과 인티파다

<6일 전 쟁 그리고 팔레스타인 저항운동>

1967년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군대는 아랍 각국의 군대를 합친 것보다 우월했고,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앞섰다.
 전쟁은 미국 중앙정보국과 국방부가 예측한 대로 전개되었다. 

이스라엘 공군은 벼락같은 선제공격으로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의 전투기가 이륙하기도 전에 대부분 파괴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 

아랍 지역인 동예루살렘을 비롯한 

요르단 강 서안, 골란고원을 6일 만에 정복했다.


이와 나란히 이스라엘의 대외 동맹도 서서히 바뀌어서 

1950-60년대 초의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벗어나 

미국과 완전히 제휴하게 되었다. 


 1967년 6월에 이르면 이 모든 요인이 결합되어 

이스라엘 정부는 전쟁을 개시하기에 앞서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 공군에 선제공격을 가하기 위해 

워싱턴의 승인을 받았다. 
 이러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비공식적인 동맹관계는 냉전이 끝나는 시기까지 지속되었고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소련에 맞서는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 같은 전면적인 동맹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그들의 권리와 이해를 침해하는 강대국의 또 다른 강제적 개입을 가져왔고, 

그들을 추방하는 또 다른 국제적 승인을 내주었다. 


 6일 전쟁 2년이 지난 1969년,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는 <팔레스타인 같은 건 없었고, ….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전에도 존재한 적이 없다고 유명한 선언을 했다.  


물론 팔레스타인은 1948년 이후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억울한 탄압과 불공정을 겪으면서도 그들이 가진 정체성은 더욱 강화되었고, 

1950년대에 실지회복 주의를 주창하며 생겨난 소규모 전투적인 집단들이 

중동에 커다란 파급력을 미치면서 

1956년과 1967년 전쟁을 촉발하는 대 일정한 역할을 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이런 시도는 두 가지 주요한 추세 속에서 정점에 다다랐다. 
 하나는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전선을 창설한 

아랍민족주의자 운동이 이끌었다. 
 나머지 하나는 1959년 쿠웨이트에서 공식 설립되어 

1965년에 공개적으로 파타라는 이름을 밝힌 집단이 주도했다.


1967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패배하자 

이제 아랍민족주의자 운동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아랍 정권들에 의존하던 태도를 완전히 벗어던졌다.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전선은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가장 역동적인 집단이 되었고, 

이후 몇 년간 이런 지위를 유지했다. 


인민전선은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차례 항공기 납치를 실행했다. 
 국제사회에서는 이러한 행동이 테러 공격으로 간주되었다. 

1964년 아랍연맹은 열렬히 고조되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물결을 흡수하고 통제하기 위해 

이집트의 지휘 아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창설했다. 


 원래 이 기구는 이집트 대외 정책의 보조 기관으로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팔레스타인의 열정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관리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지만, 

이러한 시도는 급격히 흩트려졌다. 


 1967년 전쟁 직후에 전투적인 팔레스타인 저항 단체들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장악하면서 

이집트에 치우친 지도부의 손발을 묶어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단체들 가운데 가장 큰 파타의 수장인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아라파트는 2004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른 여러 지위와 함께 의장 자리를 유지했다. 


1968년 3월 아랍 세계의 저항 운동은 요르단의 카라메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최대 규모로 벌인 군사 작전으로 

기갑부대와 포대, 공군의 지원 아래 1만 5천 명의 병력이 

카라메와 그 주변을 근거지로 삼아 집결한 팔레스타인 투사들을 제거하기 위해 요르단 강을 건넜다. 
 공격에 나선 이들은 예상치 못하게 요르단 군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무적을 자랑하던 이스라엘군은 100-2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파손된 탱크와 병력 수송 장갑차를 비롯한 수많은 장비를 포기하고 후퇴해야 했다. 
 카라메 전투는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을 선전하는 뜻밖의 선물임이 입증되었다. 

그들은 이 충돌을 아랍 정권들의 잇따른 실패 때문에 짓밟힌 

아랍의 긍지를 알리기 위한 연단으로써 효과적으로 홍보했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아랍 세계 전역에서 갈채를 받았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1974년 아랍연맹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의 유일한, 정당한 대표자로 인정받은 동시에 

100여 개 나라에서 제외 공관을 개설하게 되었다. 
 바로 그 해에 야세르 아라파트가 유엔 총회에서 연설자로 초청받은 것은 

수십 년 세월 동안 국제연맹과 유엔 강대국들의 인정을 받지 못한 끝에 이룬 

팔레스타인 역사상 최대의 외교적 성과였다. 


하지만 이들의 미래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1973년부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지도자 세 명이 차후 이스라엘 총리가 된 에후드 바라크가 이끄는 

이스라엘 특공대에 의해 서베이루트의 자택에서 암살당한 것이다.


 시인이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대변인인 카말 나세르와

 파타 지도자인 카말 아드완과 

아부 유수프 나자르의 장례식에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인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 세 사람은 모사드의 암살대에 희생된 팔레스타인 지도자와 간부 수십 명 중 일부였다. 


1979년 미국은 캠프 데이비드 방식으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을 이끌어냈다. 
 이집트와 체결한 조약을 통해 이스라엘 총리 베긴은 리쿠드당의 구상을 실행하는 데 

방해할 만한 장애물을 모조리 치워 버렸다.  
 그가 빈틈없이 깔아 놓고 미국이 받아들인 토대가 이후 모든 것을 위한 밑바탕이 되었다. 


 향후에 이뤄지는 교섭은 무한히 연장할 수 있는 과도기를 위한 자치 조건에 제한되었고, 

주권, 국가 수립, 예루살렘, 난민의 운명, 팔레스타인의 토지와 물과 대지에 대한 관할권 등에 관한 

논의는 죄다 배제되었다. 


1979년 평화조약 직후에 팔레스타인인들의 상황은 한층 더 나빠졌다. 

레바논 전쟁은 지루하게 이어지면서 나라의 대부분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약화시켰다.
 각기 다른 단계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이스라엘과 시리아, 레바논 군대와 마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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