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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Apr 07. 2022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4)

레바논 침공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1982년 레바논 침공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 침공은 그 목표와 지속기간, 영향 면에서 성격이 달랐다. 


 침공의 설계자인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은 침공의 진짜 목표와 작전 계획을 내각에 비밀로 부쳤다. 

샤론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시리아 무장세력을 레바논에서 추출하고 

베이루트에 말 잘 듣는 동맹 정부를 만들어 

그 나라의 상황을 바꾸기를 원했지만, 

주요한 목표는 팔레스타인 그 자체였다. 


규모 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는 8개 사단 12만 명이 참여했는데, 

1973년 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동원이었다.
 레바논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82년 6월 초부터 10월 중순까지 10주간 벌어진 전투에서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인 1만 9000여 명이 사망하고 3만 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이런 대규모 민간인 희생이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운영하는 사령부의 통제소, 통신센터는 하나도 공격당하지 않았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지도자는 한 명도 사망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그들을 죽이려고 여러 방면으로 시도한 사실을 감안하면 놀라운 결과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서 이중간첩을 체계적으로 활용한 것이 효과를 발휘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과 미국, 
그리고 레바논의 동맹 세력이 거세게 압박을 가하고 

아랍 정부는 어떤 유의미한 지지도 하지 않은 가운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어쩔 수 없이 베이루트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빙 기구가 

완전히, 그리고 사실상 아무 조건 없이 베이루트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미국도 이런 조건을 전면적으로 지지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뒤얽힌 역할 말고도 가장 비열하고 수치스러운 전쟁의 부차적인 측면 가운데 하나는 

주요 아랍 정권들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것이다. 


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지지한다고 떠들썩하게 선언했지만,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동맹자 레바논과 함께 이스라엘 군사 공격에 맞서 외로이 버틸 때, 

그들을 전혀 지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말 열리는 아랍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회동한 아랍 외무장관들은 

전쟁에 대응하는 아무 행동도 제안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랍권 여론에서 레바논 침공과 베이루트 포위 공격에 대해 눈길을 사로잡는 

방송 화면이 널리 퍼지면서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원래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벌이는 활동은 공식적인 틀 안에서 제한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레바논 남부의 많은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통제하고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중무장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레바논의 여러 지역에서 점차 지배권을 쥐고 권력을 휘두르는 세력이 되었다.


 레바논의 보통 사람들은 내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이렇게 억압적인 팔레스타인 세력이 더욱 강화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군사 행동에 자극받은 이스라엘이 

레바논 민간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분노를 보였다. 
 이 모든 요소들 때문에 필연적으로 레바논 국민들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 등을 돌렸다. 


 자신들 스스로 저지른 잘못된 행동과 그릇된 전략 때문에 얼마나 큰 반감이 생겼는지를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야 말로 이 시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가장 심각한 결점이었다. 


 8
월 21일부터 9월 1일 사이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전사들과 전투 부대 수천 명이 

베이루트를 떠나는 것과 동시에 서베이루트 곳곳에서 감정이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팔레스타인 전사들은 항구로 수송하는 트럭들이 지나가는 도로변에 운집한 사람들이 

흐느끼면서 노래를 부르고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레바논 수도에서 강제로 철수하면서 

지도자와 간부, 투사들이 미지의 운명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9월 14일, <레바논 부대> 사령관이자 팡랑헤당 지도자인 대통령 당선자인 바시르 제마옐이 

팔랑 헤다 본부를 무너뜨린 거대한 폭발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군은 곧바로 베이루트 서쪽에 진입하여 점령했다. 

점령하지 않겠다는 미국과의 약속을 어기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본부가 있던 곳이자 

동맹 세력 레바논 민족운동이 자리한 곳을 장악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9월 16일부터 9월 18일 아침까지 

민병대원들은 1,3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남녀노소를 살해했다. 


1982년 침공은 이스라엘과 미국이 공동으로 실행한 군사적 시도로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미국은 1930년대 영국이 맡았던 것과 비슷한 역할을 떠맡으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을 무력으로 억압하는 데 힘을 보탰다. 

 하지만 1930년대에는 영국이 주역이었던 반면, 

1982년에는 이스라엘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군사력을 배치하고 학살을 주도하고 

미국은 필수 불가결한 지원 역할을 수행했다. 


 1982
년 전쟁이 정치에 미친 파급력은 엄청났다.

 이 전쟁이 중동 지역에 야기한 대대적인 변화는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쟁이 낳은 가장 중요한 결과는 

레바논에서 헤즈볼라가 부상한 것과 레바논 내전이 격화되고 장기화된 것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많은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인, 아랍인 사이에 

다시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해 훨씬 격렬한 반감이 생기면서 아랍-이스라엘 분쟁이 한층 악화되었다. 
 그 결과 세계 속에서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지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이스라엘이 서구에서 주도 면밀하게 쌓아 놓은 무한히 긍정적인 이미지가 

일시적이지만 눈에 띄게 더럽혀졌다. 


 반대로, 팔레스타인인들은 포위 공격의 결과로 상당한 국제적 공감을 얻었다. 

그들은 테러리스트라는 꼬리표를 어느 정도 떼어 냈으며, 

많은 이들에게 골리앗 같은 이스라엘의 거대한 군대에 맞선 다윗으로 보였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내에서 지도자들은 미국에 배신당한 데 대해 분노했다. 

미국은 결국 약속했던 난민촌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레바논 혼란 상태에서 자라난 헤즈볼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치명적인 적이 되었다. 

헤즈볼라의 부상을 1982년 전쟁과 관련해 주목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하지만 헤즈볼라의 중심 세력을 구축한 젊은이 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투사들이 떠난 뒤에 남아서 

자신들과 같은 시아파 수백 명이 학살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국 대사관 폭발 사건에서 죽은 사람들, 

병영에서 목숨을 잃은 해병대원들, 

그리고 베이루트에서 납치되거나 암살당한 많은 미국인들은 

대개 나중에 헤즈볼라가 된 그룹들의 공격에 희생되었는데, 

미국과 이스라엘 점령자들이 공모한 대가를 죄 없는 그들이 치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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