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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Apr 11. 2022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5)

인티파타 & 오슬로 협정

<인티파다 그리고 오슬로 회담>

1982년 레바논 침공은 실제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약화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역설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체 내에서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이 강화되면서 

행동의 초점이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했다.


이른바 1차 인티파다는 점령지 전역에서 자생적으로 폭발했다. 

이스라엘 군용 차량이 가자 지구의 자발랴 난민촌에서 트럭과 충돌해서 

팔레스타인인 4명이 사망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봉기는 순식간에 확대되었다.


 가자 지구가 용광로였고 

이후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통제하는 데 가장 애를 먹은 지역으로 남았다. 
 한 달간 소요가 고조된 뒤인 1988년 1월, 

국방 장관 이츠하크 라빈은 군경에 무력과 완력, 구타를 써서라도 진압할 것을 지시했다. 


 이런 철권 정책은 시위대의 팔과 다리를 부러뜨리고 두개골을 깨부술 뿐만 아니라 

군인들의 화를 돋우는 이들을 모조리 구타하는 공공연한 행동으로 실행되었다. 


1차 인티파다가 시작된 순간부터 1996년 말까지 이스라엘 군대와 무장 정착민들이 

팔레스타인인 1,442명을 죽였다. 

그중에 20% 이상인 294명이 16세 이하의 미성년자였다. 
 같은 기간에 이스라엘인 175명이 팔레스타인인들 손에 죽었는데, 

그중 86명이 군인이나 경찰이었다.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을 결집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세계의 인식을 바꾸는 것도 공공연한 목표로 삼았다. 
 인티파다가 여러 전술을 구사하고, 

또한 인티파다가 어떤 의미인지를 국제사회에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들이 

정교하고 효과적인 소통 전략을 활용한 것을 보면 

이것이 핵심 목표라는 사실이 분명했다. 


1차 인티파다가 여러 성과를 낳긴 했지만. 

새로운 현지 지도부의 등장은 기성 정치인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이들은 1982년 레바논에서 패배한 뒤, 

튀니스를 비롯한 아랍 각국 수도에서 별 성과 없는 망명 활동에 갇혀 힘을 잃었다. 


 이들은 지도자들의 근시안적 시각과 제한된 전망에 갇혀 있었고, 

점령지와 이스라엘 내부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미국과 미국의 정책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이런 결함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1980년대 말까지 평화교섭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인티파다의 국제적 영향력에 고무되어 

1988년 11월 15일 팔레스타인 독립 선언서를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 문서를 통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팔레스타인 땅 전체에 대한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하면서 

분할 원칙과 두 국가 해법, 평화로운 분쟁 해결을 받아들였다. 
 독립선언서에 부속된 안보리 결의안 제242호와 제338호를 평화 회담의 기본원리로 수용했다. 


 이렇게 미국이 내세운 조건에 굴복한 덕분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오랫동안 바라던 대로 워싱턴과 대화를 개시할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대화 상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평화교섭도 이끌지 못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지위가 또다시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야세프 아라파트와 그의 동료 대다수가 1990-1991년 걸프전과 관련해 

심각한 오판을 했기 때문이다. 


 이라크에 의존하는 현실은 논외로 하더라도 

아라파트와 지도부는 이라크의 군사 역량을 크게 과대평가했다. 

아라파트가 신중하지 못한 결정을 내린 결과가 나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쿠웨이트가 해방된 뒤 팔레스타인 수십만 명이 쫓겨나는 것이 비극의 시발점이었다. 

페르시아만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 대한 모든 재정 지원을 중단했고, 

1982년 베이루트에서 철수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지도부를 받아들이는데 동의했던 나라들까지 포함해서 

많은 아랍 나라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추방했다. 
 걸프전 이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외교관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교섭 지위가 심각하게 약해진 사실을 알았다. 
 아라파트와 그의 동료들이 협상 테이블에 대리인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대화의 조건이 그들에게 크게 불리하다는 것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튀니스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극심한 압박에 시달리면서 

불안한 지위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마드리드와 워싱턴, 오슬로, 

그 후까지 이어진 교섭이 차질을 빚은 것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애초에 쿠웨이트에 대해 심각하게 오산한 탓이었다. 


1992년 1월 워싱턴에서 샤미르가 아직 이스라엘 총리인 가운데 팔레스타인 대표단은 

팔레스타인 과도 자치당국 제안서 개요를 내놓았다. 
 핵심 개념은 요르단강 서안과 예루살렘, 

가자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주민, 

1967년에 이 지역에서 쫓겨난 사람들, 

그리고 그 후 이스라엘에 의해 추방된 사람들이 선거를 통해 권한을 부여하는 

팔레스타인 정부조직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선거 이후에 이스라엘 군정과 점령을 관리하는 관료기구인 민정청을 

이 새로운 기구에 모든 권한을 이양하고 

그 후 이스라엘 기구들은 모두 철수한다는 내용이었다. 
 과도 자치당국 제안은 점령에서 독립을 이행하려는 진정한 시도였지만 

이스라엘 정치 지도자들이 절대 수용할 수 없는 헛된 시도였다. 


 튀니스는 또 다른 장애물이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지도부는 이 제안을 승인한 바 있었지만, 

이 제안에 구현된 구상들에 대한 열의가 전혀 없었다. 


 결국 이 문제는 튀니스에 있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점령지에 사는 팔레스타인인들 사이 불신감만 조장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측과 비밀리에 회담을 진행했고 

이스라엘 총리 라빈은 양쪽의 상호인정을 조건으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지도자와 간부진 대다수가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상호인정은 1993년 9월 백악관 잔디밭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조인한 <원칙 선언>의 토대가 되었다. 
 이 합의에 따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팔레스타인 대표로 인정했고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도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했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1994년 7월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했다. 

그는 거의 30년 만에 튀니스의 자기 구역이었던 도금한 철장에서 벗어나 

고국에 돌아왔다는 사실에 잔뜩 흥분해 있었다. 
 그는 한 철장에서 다른 철장으로 옮겨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1995년 양쪽이 요르단 서안과 가자 지구에 관한 잠정협정, 

일명 오슬로 협정 2에 합의하면서 오슬로 협정 1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이 협정으로 두 곳의 악명 높은 지역이 A, B, C로 쪼개졌고, 

전체의 60%가 넘는 C지역이 완전하고 직접적이고 제한받지 않는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다.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은 18%에 해당하는 A지역의 행정, 치안권, 

22%인 B지역의 행정권을 부여받는 한편, B지역의 치안권은 여전히 이스라엘 손에 있었다.

 A, B지역을 합치면 면적으로는 40%였지만 

팔레스타인 인구로 따지면 87% 정도였다. 

C지역은 한 곳을 제외하면 모두 유대인 정착촌이었다.


 오슬로 협정은 사실 100년 묵은 시온주의 운동의 기획을 진척시키기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국제적인 승인 아래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발표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847년이나 1967년과 달리, 

이번에는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적들과 공모하는 쪽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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