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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Apr 14. 2022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6)

여전히 남은 불씨

<여전히 남은 불씨>

1993년 백악관 잔디밭에서 조인식이 열린 지 오래지 않아 

대다수 팔레스타인인의 마음속에 오슬로 협정에 대한 깊은 실망감이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이 협정으로 국가 수립으로 가는 출발점에 서 있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협정 때문에 식민화가 빠른 속도로 계속되었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설을 전혀 허용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슬로 협정 조인은 팔레스타인인들의 기대를 높이고 

하마스를 일시적으로 잠식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입지가 이스라엘과 합의를 이루는 결과에 연결된 상황에서 

대중적인 불만이 널리 퍼지자 하마스는 그 이득을 거둬들이려는 자세를 취했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협정에 명시된 협상이 예정대로 마무리되기는커녕 아예 시작조차 하지 못하자 

이런 지연은 아라파트의 교섭전략에 또다시 차질로 작용했다. 

여기에 더해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총리 에후드 바라크가 담판을 벌인 

2000년 캠프 데이비드 정상 회담이 실패로 돌아갔고 

클린턴 대통령은 정상회담 실패의 책임을 아라파트에게 돌렸다. 


 이 모든 상황 때문에 하마스가 힘을 얻었고 

결국 팔레스타인 정치 체제가 유례없이 양극화되어 팔레스타인인들 내부에 심연이 생겼다. 
 이 시점에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내 지배권과 팔레스타인 정치를 독점하는 지배체제에 

가장 심각한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오슬로 협정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의 상황이 악화되고, 

국가 수립의 가능성이 점점 멀어지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하마스의 경쟁이 격화되어 

2000년 9월 제2차 인티파다가 발발했다.


 8년 넘게 이어진 1차 인티파다에서 1600명 정도가 살해되어 연평균 177명이 살해되었지만 

2차 인티파다 8년간 66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해서 연평균 825명이 살해되었다. 

이 가운데 이스라엘인 사망자 수는 1,100명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내에서 벌인 자살 폭탄 공격에 의한 민간인 피해자가 많았고 

322명이 이스라엘 군경이었다.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경쟁 관계가 이렇게 폭력이 고조되는데 기여하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군경이 시위대에 대대적으로 실탄을 사용한 것이 결정적 요인으로 

하마스와 하위 파트너인 이슬람 지하드는 자살폭탄 공격을 대대적으로 확대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2차 인티파다의 끔찍한 자살 폭탄 공격은 

1982년 이래 팔레스타인인들이 1차 인티파다와 평화 협상을 통해 쌓아 올린 

긍정적인 이미지가 지워졌다. 


 연이어 벌어지는 자살 폭탄 공격의 소름 끼치는 광경이 세계 각지로 전송되자, 

이스라엘은 이제 압제자로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으로 괴롭히는 세력의 희생자라는 익숙한 역할로 돌아갔다. 


 대다수의 팔레스타인인은 자살 폭발 공격에 반대했다.

 따라서 이러한 과격한 결정은 팔레스타인 내에서도 인정받지 못했고 

전략적인 차원에서도 역효과를 낳았다. 
 이런 대 실패에 대해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가 어떤 비난을 받든 간에, 

결국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지도부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2004년 11월 파리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무드 아바스(아부 마진)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파타의 수장 자리를 물려받았고, 

2005년 4년 임기의 자치당국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 후로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바스는 그 후로도 통치를 계속하고 했다. 

그가 통치한 15년 동안 약해진 민족운동의 상태가 더욱 나빠졌고, 

내부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시온주의 식민화는 대폭 확대되고, 

가자지구를 상대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무능함을 나타냈다.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는 앞선 팔레스타인 자치당국 선거와 마찬가지로 

2005년 대통령 선거도 보이콧했다. 

하지만 그 후 하마스는 180도 방향을 선회하여 

2006년 의회 선거에서 후보단을 출마시키기로 결정했고,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큰 폭의 차이로 선거에서 승리했다. 
 전체 132석 가운데 하마스가 74석을 차지했다. 


 하마스는 가자에서 독자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을 세웠지만, 

라말라를 기반으로 한 자치당국의 관할권은 초라하게 줄어들어 

요르단강 서안의 2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스라엘군이 관할권을 허용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다. 

이제 팔레스타인인들은 무기력한 자치당국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갖게 되었다. 


2014년 7월과 8월의 15일에 걸쳐 이스라엘 공군은 6,000회가 넘는 공습을 벌였고, 

육군과 해군은 5만 발 정도의 대포와 전차포를 쏟아부었다.

 이스라엘군은 총 2만 1000톤으로 추정되는 고폭탄을 사용했다.
 이런 규모의 공습과 포격은 인명 피해뿐 아니라, 재산 피해도 막대하다.


 2014년 공격 당시 1만 6,000채가 넘는 건물이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동네 전체가 파괴된 곳도 많았다.
 가자지구 전체 인구의 1/4 정도인 45만 명이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 대부분 그 후로 다시 돌아갈 집이 없었다. 


 2017
년 12월 트럼프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고 

미국 대사관을 그곳으로 이전했다. 
 트럼프 집단은 수십 년에 걸친 미국의 정책을 뒤집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국제법과 국제적 합의, 유엔 안보리의 결정, 세계의 여론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까지 송두리 채 걷어 차 버렸다. 


 이 결론은 또한 미국이 원래 내세우는 자유와 정의와 평등의 원리 와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스라엘이 정한 가혹한 조건에 따라 강요되는 해법은 

필연적으로 더 많은 분쟁과 불안을 초래할 것이다. 


바야흐로 세계적인 힘의 균형이 바뀌고 있다. 

중국과 인도는 점점 늘어나는 에너지 수요에 근거해서 

21세기에는 이전 세기보다 중동에서 더 많은 발언권을 가질 것이다. 
 중동에 지리적으로 더 가까운 유럽과 러시아는 더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한때 영국이 그랬던 것과 같이 계속해서 행동의 자유를 누리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이런 변화를 등에 업고 팔레스타인인들이, 

전혀 다른 역사의 궤적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평등과 정의에 바탕을 둔 경로만이 

100년에 걸친 팔레스타인 전쟁을 끝내고 

지속적인 평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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