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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Aug 09. 2024

목로주점

에밀졸라

에밀졸라

1840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아버지가 폐렴으로 사망하면서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두 번 낙방한 후 학업을 포기하고 출판사에 취직했다.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며 비평가,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865년 자전적 소설 <클로드의 고백>을 출간한 후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1898년 반유대주의 사상으로 부당하게 구속 수감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해 행동하는 지성인의 상징이 되었다.

1902년 파리에서 가스중독으로 사망했고 1908년 유해가 팡테옹 국립묘지에 이장되었다.
 


 

졸라의 <대지>를 읽으면서 삶의 무게에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을 경험했다.
많은 것을 생각하는 소설이었고 그만큼 에너지를 소모가 컸다.

이번에는 <대지>보다는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목로주점>을 선택했다.

 


 

랑티에는 스물여섯 살의 청년으로 자그마한 체격에 짙은 갈색머리로,
삶에 찌들어 나이가 열 살은 더 들어 보이는 스물두 살의 제르베즈와 아이 둘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랑티에는 유산으로 700프랑을 받았지만 돈을 물 쓰듯 써, 2달 만에 빈털터리가 되어
여관에서 생활하다 같은 여관에 머무는 여자와 눈이 맞아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

 

두 아들과 함께 길바닥에 내팽개쳐진 제르베즈에게 함석공으로 일하는 쿠포가 접근했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제즈베리는 세탁소에 일자리를 얻어 열심히 일하여 ‘나나’라는 딸아이도 출산했다.

성실히 함석공 일을 하는 쿠포와 억척스럽게 세탁소 일을 하는 제르베즈는 시간이 지나면서 생활도 안정되고 수중에 돈도 모을 수 있었다.
제르베즈가 자신이 직접 세탁소를 운영하기 위해 가게를 물색할 즈음,
쿠포는 자신을 만나려 공사 현장에 온 딸 나나를 보려다 발이 미끄러져 다리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제르베즈는 남편 쿠포를  집에서  정성으로 간호하여 회복시키지만 모아 두었던 돈을 모두 날려 세탁소 운영의 꿈은 접어야 했다.  

 

쿠포 부부의 이웃에는 대장간에서 성실히 일하며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구제라는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구제는 제르베즈에게 세탁소 운영 비용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했고, 제르베즈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세탁소 운영을 시작했다.

순진하기 그지없는 총각 구제는 제르베즈에게 홀딱 빠져 있었지만 절대로 그녀에게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고 한 번도 엉큼한 몸짓이나 음란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제르베즈는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구제에게서 마치 성녀처럼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단 둘이 있을 때에도 서로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았다.
그것은 추잡함과는 거리가 먼 현명한 사랑이었다.

 제르베즈는 누구보다 세탁소 일을 열심히 했고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일이 밀릴 때에는 밤을 새우기까지 했다.

그녀는 건물 세입자들의 세탁을 도맡아 조수 두 사람을 더 고용했다.


세탁소 운영은 순조롭게 흘러갔지만 성실했던 쿠포는 예전 같지 않았다.
술을 자주 접했고 일을 빠지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둘째 아들 에티엔에게 폭력을 행사하자
구제는 에테엔을 자신의 철공소에 취직시켜 자신이 보호자 역할을 맡았다.

 

열심히 세탁소를 운영했지만 인색하게 굴지 않은 제르베즈는 자신의 생일에 깜짝 놀랄 정도의 음식을 준비해 주위 사람들과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거움을 나누던 중, 쿠포가 길 건너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랑티에를 발견하여 생일 파티에 합석시켰고 이를 계기로 가까워져 랑티에는 쿠포 부부의 작은 방으로 이사해서 한 지붕 밑에서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그렇게 1년이 흘러갔다.
제르베즈는 여전히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지만 두 남자를 먹여 살려야 했고,
 세탁소 운영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리고 랑티에는 약속했던 방세와 식비를 지불하지 않았다.

제르베즈는 그에게 돈을 요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빵, 포도주, 고기를 모두 외상으로 가져왔다.

그런 와중에도 쿠포와 랑티에는 볼에 살이 올라 있었다.
식탁에 죽치고 앉아 배를 가득 채우는 게 유일한 일상이 된 두 남자는 제르베즈의 세탁소를 거덜 내면서 그녀의 파멸로 살을 찌웠다.
그들은 더 많이 먹으라고 서로를 부추기면서 디저트를 먹을 때는 배를 두드리면 음식이 더 빨리 내려간다면서 낄낄거렸다.

 

무엇보다 최악은 주위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은 랑티에가 제르베즈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그는 제르베즈와 악수할 때면 한동안 그녀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또한 무엇을 원하는지 빤히 드러나는 대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계속 응시하면서 진을 빼놓았다.

그녀 뒤로 지나갈 때면 무릎을 그녀의 치마 속으로 찔러 넣고, 그녀의 목덜미에 더운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는 결코 과격하게 굴거나 속셈을 드러내지 않은 채 기회를 엿보면서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쿠포는 일은 멀리 하면서 술을 더욱 가까이했고 쓰레기 더미나 벤치, 공터, 심지어 도랑에 엎어져 잠들기도 했다.

랑티에와 제르베즈가 한가롭게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만취한 쿠포가 토해 놓은 오물 속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제르베즈는 깨끗한 구석을 찾아 침대로 이동하려 했지만, 비열한 인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랑티에는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녀의 귀에 키스했다.
제르베즈는 몸을 떨면서 점차 통제력을 잃어갔다.


처음 한동안은 그녀 자신도 죄의식을 느끼며 스스로를 더럽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랑티에의 방에서 나올 때마다 손을 씻었고 몸에 있는 더러움을 닦아내려고 수건에 물을 적셔 어깨가 벗겨질 정도로 박박 문질러댔다.

하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제르베즈는 그 모든 것에 서서히 적응해 갔다.


남편과 연인이 다 같이 만족하고 집안이 평소처럼 돌아간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닌가.
그렇게 그녀의 방종한 생활은 습관이 되어갔다.
이제 이런 생활은 먹고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규칙적인 생활의 일부가 된 것이다.

쿠포가 술에 취해 돌아올 때마다 그녀는 랑티에의 방으로 건너갔다.
일주일 중 월요일, 화요일 그리고 수요일에는 대부분 그와 밤을 보냈다.
 

제르베즈의 세탁소는 무너져 내렸다.
한꺼번에는 아니었지만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단골 고객들은 하나둘씩 불평을 널어놓으며 세탁물을 다른 곳으로 가져갔다.

이제 제르베즈는 모든 게 엉망이 될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점차 늘어나는 빚도 더 이상 그녀를 부대끼게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점차 온 동네에서 신용을 잃어갔고,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갚지 못한 빚이 쌓여갔다.

 그리고 쿠포와 랑티에는 말 그대로 제르베즈의 진을 빼놓았다.

마치 초를 태우듯 그녀를 남김없이 불태우고 있었다.
밀린 집세를 내지 못한 제르베즈는 자신의 세탁소를 넘기고 일당을 받고 다림질을 하는 세탁부로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그 후 2년이 지나는 동안 그들은 점점 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겨울에는 특별히 더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날씨가 좋을 때는 빵을 먹을 수 있었지만 궂은비와 추위가 찾아오면 배고픔도 함께 찾아왔다.
작은 시베리아 벌판 같은 집에서 텅 빈 찬장 앞을 서성이면서 저녁을 거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제르베즈는 쿠포가 주는 돈 냄새를 맡아본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비자르 영감이 부인의 배를 걷어차서 죽인 후부터 어린 랄리는 어린 엄마 역할을 해 나갔다.
그녀는 세 살밖에 안 된 남동생 쥘과 다섯 살짜리 여동생 앙리에트를 돌보아야 했다.
하루 종일 두 아이를 보살피며 청소와 부엌일까지 도맡았다.
아이는 스스로 죽은 어미의 빈자리를 채워갔다.

짐승 같은 아비는 닮은 꼴을 완성시키려는 듯, 과거의 어미를 때려죽였던 것처럼 이젠 딸을 때려죽이려 했다.

그는 술에 잔뜩 취해 돌아올 때마다 두들겨 팰 여자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랄리가 아직 어리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비자르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대며 어린 딸 랄리에게 부당한 구타를 가했다.
그러면 아이는 체념의 빛이 역력한 사랑스러운 눈으로 불평 한마디 없이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랄리는 반항하는 법이 없었다.
단지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고개를 약간 숙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면서 이웃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울음소리마저 안으로 꾹꾹 삭여냈다.


어느 날 랄리에게 나나가 입던 카라코를 입히려던 제르베즈는 아연실색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린 랄리의 등은 온통 시퍼런 멍으로 뒤덮여 있었고, 팔꿈치는 살갗이 벗겨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작고 깡마른 몸은 학대를 받아 곳곳이 찢겨 나가 뼈가 허옇게 드러날 정도였다.
이런 식이라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
랄리는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아비를 추궁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다면서 아비를 두둔하기까지 했다

 

제르베즈는 랄리를 생각하면 더 이상 자신의 처지를 불평할 수 없었다.
그녀 자신도 그 여덟 살짜리 어린 소녀의 용기를 배우고 싶었다.
아이는 공동 아파트 여인네들의 고통을 다 합쳐도 견주지 못할 엄청난 고통을 홀로 겪고 있었던 것이었다.


제르베즈는 랄리가 삭 달 동안 오로지 맨 빵으로만 연명해 왔음을 알게 되었다.
빵 부스러기조차 마음껏 먹지 못해 깡마르고 쇠약해진 소녀는 벽에 의지해서야 겨우 발을 떼어놓을 수 있었다.

제르베즈는 랄리에게 남은 고기를 몰래 가져다줄 때마다 말없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고 잘게 자른 음식을 힘겹게 삼키는 아이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정하고 헌신적인 랄리는 나이를 훌쩍 넘어서는 의연함으로 어린 동생에게는 어린 엄마로서의 의무를 묵묵히 수행해 나갔다.

 


3월의 어느 날 쿠포는 뼛속까지 비에 흠뻑 젖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술친구인 메보트와 함께 뱀장어 수프를 배가 터지도록 먹고 먼 길을 걸어오는 동안 소나기가 집중적으로 퍼부었던 것이다.
쿠포는 밤새 기침을 해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엄청난 고열에 시달려 제르베즈는 남편을 병원으로 데려갔고 쿠포의 병명은 폐렴이었다.


이틀 후 제르베즈가 남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그의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한 수녀가 그녀에게 남편을 생탄 정신병원으로 이송했음을 알려 주었다.

남편이 드디어 미쳐버리고 만 것이다.

제르베즈는 일요일에야 생탄에 있는 정신병원에 가볼 수 있었다.


쿠포는 허공을 향해 주먹을 마구 내두르다 가는 가슴 위로 시트를 끌어당겨 둘둘 말았다.
환영 속에 등장한 털북숭이 남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자 경비원이 달려왔고 그 광경에 경악한 제르베즈는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며칠 후 그녀가 다시 왔을 때 쿠포는 또다시 정신이 온전히 돌아와 있었다.
그러자 의사는 그를 데리고 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겨울이 되자 쿠포 가족의 삶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나나는 매일 저녁 아버지의 구타를 견뎌야 했다.
그러다가 아비가 지친 듯 보이면 이번에는 어미가 똑바로 처신하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명목으로 뺨따귀를 올려붙였다.

그녀의 아비처럼 허구한 날 술에 절어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젠 그녀의 어미도 점차 그녀에게 멀어져 갔다.
어미 역시 주정뱅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제르베즈는 누가 술을 한잔 사기로 했다는 핑계를 대면 신이 나서 콜롱브 영감의 주점으로 남편을 찾으러 갔다.
그리고 더 이상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역겨운 표정을 짓지 않고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는 단숨에 술잔을 비워냈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그곳에서 죽치다 가는 눈이 게슴츠레해져서야 술집을 나섰다.

 

어느 토요일 집으로 돌아온 나나는 끔찍한 몰골을 한 아비와 어미를 발견했다.
쿠포는 침대를 가로질러 엎어져 코를 골며 지고 있었고 제르베즈는 의자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옆으로 떨어뜨린 채 공허하고 불안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모자도 벗지 않고 방을 한 번 둘러본 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제르베즈는 남의 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구차스러운 나날을 이어갔다.
한 달 전부터는 포코나에 부인의 세탁소로 일을 나가지도 않았다.
말썽이 나는 것을 꺼린 주인이 그녀를 내보낸 것이 분명했다.
제르베즈는 몇 주 동안 여덟 군데의 세탁소를 전전했다.
각 작업장에서 2-3일 머무른 다음 해고당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 정도로 세탁물을 망쳐 놓기 일쑤였다.
꼼꼼하지 못하고 지저분한 데다 제정신이 아니어서 예전의 기술을 잊어버린 것이다.
결국 그 사실을 깨달은 제르베즈는 다림질을 포기하고 뇌브 가의 세탁장에서 하루 일당을 받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세탁 일은 그녀를 더욱더 초라하게 했다.
또한 나날이 비대해져서 다리도 더 뒤틀리면서 심하게 절어 옆에서 걷던 사람이 몸을 부딪혀 넘어질 정도였다.

 

쿠포는 6개월 동안 쉼 없이 술을 마셔대다가 쓰러져 다시 생탄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렇게 3년 동안 일곱 차례 생탄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이 끈질긴 술꾼의 상태가 매번 더 나빠진다는 사실이었다.

기억력은 이미 오래전에 그를 떠났고 머릿속은 텅 비어 버렸다.
이제 그는 일상생활마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제르베즈는 이 지긋지긋한 세상과 삶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 들은 텅 비어 버린 방에서 서로를 짓밟으면서 허기를 잊을 정도로 싸움에 몰두했다.
하지만 제르베즈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두들겨 맞는 것에도 무감각해졌다.

유감스럽게도 다른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어도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에는 익숙해질 수 없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제르베즈를 괴롭혔다.


배고픔을 참을 수 없었던 제르베즈는 로리외 부인에게 빵 살 돈을 빌리려 갔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하고 비자르의 집 앞을 지나는데 신음이 들려왔다.

제르베즈는 백지장처럼 새하얀 얼굴을 한 랄리가 침대에서 시트를 턱 밑까지 끌어올린 채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랄리는 제르베즈의 모습을 보자 더 이상 신음을 내지 않았다.

새하얀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더니 입술을 가늘게 떨면서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때 계단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오자 아이는 몸을 떨었다.
곧이어 비자르 영감이 거칠게 문을 밀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평소처럼 잔뜩 술에 절어 있었고 눈빛은 노기 띤 광기로 번득였다.

누워 있는 랄리를 발견한 그는 거친 신음을 내며 채찍을 빼 들었다.


제르베즈는 비자르에게 달려들어 채찍을 빼앗았다.
그는 얼빠진 표정으로 아이의 침대 앞에서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아이의 얼굴이 평소와는 달리 죽은 사람의 얼굴빛을 띤 채 어른처럼 진지해 보였다.
방 안에 맴도는 죽음의 숨결이 그를 술에서 깨어나게 했다.


랄리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그에게 아이들을 씻기는 방법을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온갖 상념이 뒤섞였다.
하지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알코올로 타버린 몸에서는 눈물마저 나오지 않았다.


“제 얘길 잘 들으세요.” 잠시 숨을 가다듬던 랄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빵집에 4프랑 7수를 빚졌어요. 그걸 갚아야 해요. …
고드롱 아주머니가 우리 다라미를 빌려갔으니 돌려달라고 하시고요. …
오늘 저녁엔 제가 수프를 만들어 놓지 못했어요.
하지만 빵이 남아 있으니 감자를 데워서 같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순간까지도 가엾은 소녀는 모두의 꼬마 엄마였다.

그러는 동안 제르베즈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으려고 애써 참으며 흘러내린 시트자락을 잘 덮어주었다.

비자르 영감 집을 빠져나온 제르베즈는 자신도 랄리와 똑같은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월요일 아침 제르베즈는 서랍장 위에 올려놓은 정신병원에서 온 편지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 사이 눈도 녹았고 흐릿한 하늘에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는 쌀쌀함이 느껴지는 온화한 날씨였다.
제르베즈는 정오에 출발하여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기분이 좋아진 채로 병원에 도착했다.


제르베즈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그만 독방 안에서 쿠포는 소리를 지르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작업복을 걸치고 허공에 손발을 휘젓는 모습이 마치 카니발에서 탈을 뒤집어쓴 채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쿠포는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제르베즈는 처음에는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가 미친 듯이 날뛰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자 기겁을 하며 두 손을 축 늘어뜨렸다.

어떻게 사람이 저런 얼굴을 할 수 있지?
눈에는 핏발이 잔뜩 사고 입술은 온통 딱지로 뒤덮인 몰골이 영락없는 짐승의 면상이었다.


제르베즈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제르베즈는 도망치다시피 그곳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뛰어내리다시피 해서 아래층까지 내려왔음에도 그녀의 남자가 벌리는 소름 끼치는 광대놀음 소리가 여전히 그녀를 따라왔다.

 


그녀는 다음날 잠에서 깨어나면서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정오가 되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가는 길이 멀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머릿속을 지배했던 것이었다.


층계 아래쪽에서부터 그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쿠포는 전날보다 더 격렬하게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후 다시 여러 시간이 흘렀다.
어느 순간 발이 동작을 멈추면서 뻣뻣해졌다.
그러자 수련의는 제르베즈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됐습니다.”
오직 죽음만이 쿠포의 발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제르베즈는 그렇게 몇 달을 더 버텼다.
점점 더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고 매일 조금씩 굶어 죽어갔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죽음은 제르베즈가 자초한 비참한 삶 속에서 마지막까지 그녀를 침범해 왔다.
심지어 제르베즈가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추위 때문에 얼어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빈곤함과 불결함 그리고 삶의 고단함으로 인한 것이었다.

 


 

19세기 최초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목로주점>은 보수주의 비평가들의 빈축과 야유를 샀고 동료 문인들의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졸라는 <목로주점>의 대성공으로 받은 인세로 파리 인근 센 강가에 있는 한 저택을 구입했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찾는 졸라 박물관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졸라를 중심으로 모파상, 세 아르, 위스망스, 에니크, 알렉시아 등의 젊은 작가들이 모여 <메당의 저녁>이라는 소설집을 함께 펴냄으로써 자연주의 문학의 산실이자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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