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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May 07. 2024

이탈리아 명품 이야기(3)

영화보다 드라마틱한 구치 가문

구치 집안은 승마용 가죽용품을 다루던 마구 장인 출신이다. 
구초 구치는 1898년 열일곱 살의 나이에 집을 떠나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다.

먹고살 방편을 찾던 그는 사보이 호텔의 주방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얼마 후 주방에서 조금 승진해서 손님들의 짐을 나르는 벨보이를 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때는 서구가 산업화되면서 철도가 발달하고 사람들의 이동이 잦아지면서 일련의 대형 호텔들이 성황을 누리던 시기였다.
런던의 사보이 호텔은 최고의 사교장으로 당대 유명한 귀족, 부호, 귀부인, 예술가들이 드나들었다.

서양 요리사에 한 획을 그은 프랑스의 오귀스트 에스코피에(1848~1935)가 이곳의 총주방장이었고 동시에 리츠 호텔의 신화를 이룬 세자르리츠(1850~1818)도 이곳의 총지배인을 거쳐 갔다. 

이 초호화 호텔에서 손님들의 가방을 옮겼다는 말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가방만 만져보았다는 의미와 같다. 


피렌체 마구 장인의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가죽 제품에 익숙했던 구조 구치는 이 고급가방들을 관찰하며 마치 마른나무가 물을 빨아올리듯 상류층의 가죽에 대한 감각과 취향을 익혔다. 
그뿐 아니라 이때 경험한 그들의 생활양식과 기호는 훗날 구치가 상류층 고객을 상대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04년, 런던을 떠나 피렌체로 돌아온 구초는 1906년 소규모 승마제품을 파는 마구상을 개업했다.
그러다가 자동차나 자전거가 일반화되면서 승마가 상류층의 레저에서 조금 벗어나자
루이뷔통처럼 여행용 가방이나 핸드백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공방에 들어가 가죽 공부도 더 한 구초는 1921년, 드디어 피렌체에 가죽 제품 전문점을 열었고,
이때부터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처음에 마구 전문점을 했었기에 승마에서 영감을 받은 장식들을 단 다양한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이는 곧 패션 아이콘이 되어 입소문을 타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원자재 부족으로 가죽 확보가 어려워지자 구치는 창의력을 발휘해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다. 


직선의 대나무를 둥글려 손잡이로 사용하고, 피렌체의 발달한 직물 기술을 이용해 굵은 캔버스 천가방을 만든 것이 크게 히트를 했다.

하지만 1953년 구초가 사망하자 구치의 신화에는 서서히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탐욕과 질투라는 폭풍우가 몰려온 것이다. 

창업자 구초 구치는 아들만 넷 두었다. 

경영권은 일찍부터 아버지를 도운 맏아들 알도(1905~1990), 막내인 로돌포 (1912~1983)에게 반 씩 넘어갔다.


알도는 창업자인 구조 구치의 GG 이니셜을 서로 엇갈려 배치한 로고를 만들어 구치의 이미지를 명품의 반열에 올렸지만 네 형제는 끊임없이 서로 속고 속였다. 

몰락의 싹이 트고 있었던 것이다.


알도의 아들인 파올로 구치(1931~1995)는 삼촌들보다 한술 더 떠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와 자신의 이름을 붙인 저렴한 새 브랜드를 만들려고 했다. 

이는 당연히 집안의 반대에 부닥쳤고, 가족 간에 주먹다짐까지 오가는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앙심을 품은 파올로 구치는 미국 사업장의 탈세를 고발해서, 결국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는 불효까지 저질렀다. 

게다가 이후 구치의 경영권이 자신이 아니라 막내 삼촌의 아들인 마우리치오(1948~1995)에게 넘어간 것도 참지 못하고 무려 2만 개에 달하는 라이선스를 남발했다. 

스카프, 향수, 커피잔, 심지어 열쇠고리에까지 파올로 구치 마크가 박히니 자연히 브랜드 가치는 추락했다.


1995년 3월 어느 날 아침, 이탈리아 장인 정신의 상징이던 구치의 회장 마우리치오 구치가 

출근길에 집 앞에서 네 발이나 되는 총탄을 맞고 즉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마흔여섯의 젊은 나이였다. 

엽기적인 것은 범인이 전처인 파트리치아 레지아니(1948~)가 고용한 청부업자였다는 사실이었다. 

이미지가 점점 추락하던 구치에 유명 디자이너 톰 포드(1961~)가 막 영입되어 조금씩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혼을 당한 전처는 앙심을 품고 남편을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서양에서 금기의 숫자로 되어 있는 13개의 바늘을 마우리치오의 베개 밑에 깔아놓기도 했다. 

마우리치오는 이후로 혹시나 와인에 독을 탈까 염려해 코르크는 반드시 눈앞에서 따게 하는 등 극도로 조심했다. 

그러다가 그가 재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처가 살인 청부를 실행에 옮기고 만 것인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설마 아침에 총으로 저격할 줄은 몰랐던 거다.


처음에 경찰은 워낙 불화가 끊이지 않던 구치 가족 내부나 마우리치오가 새로 연관되던 카지노 사업과 사건이 연결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사건은 엉뚱하게 종결되고 범인은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사건이 미궁으로 빠지는 데 우쭐한 범인들이 참지 못하고 말을 흘렸다가 경찰에게 꼬투리를 잡힌 것이다. 


파트리치아는 자신의 개인 점술가를 통해 시칠리아의 마피아 졸병 몇을 고용했다. 

총을 쏜 사람은 이탈리아 최고형인 종신형을 파트리치아는 29년 형을 점술가는 25년 형을 받고, 

그 외 공범 두 명도 중형을 받아 복역 중이다. 



구치 가문에서 태어난 왕자님인 데다 용모까지 출중했던 마우리치오는 사랑에 눈이 멀어 세탁소집 딸인 파트리치아 레지아니와 결혼했다. 

엄마가 부자와 재혼해 물질의 맛을 본 글래머에 검은 머리, 정열적인 성향의 이 여자는 팜므파탈의 매력과 물질적 욕망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구치 가문에 입성한 그녀의 사치와 욕심은 끝이 없어, 제트족으로 상류사회를 휘젓고 다녔다. 

그러다 남편이 구치 회장이 되자 욕심이 더 나아가 경영에까지 지나치게 간섭하다 1985년 결혼 13년 만에 이혼당하고 말았다.


"자전거를 타고 행복해하기보다 롤스로이스를 타고 우는 것이 더 낫다"
이런 유명한 말을 한 그녀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범죄란 없다"는 어록도 자신의 일기장에 추가했다고 한다. 

또 전 남편이 죽은 날의 일기에는 그리스어로 'Paradeisos’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천국’이라는 뜻이다.


그녀의 사치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경찰이 그녀를 잡으러 왔을 때 잠깐 옷을 갈아입겠다고 하더니 모피코트를 입고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하고, 재판 내내 명품으로 몸을 감고 나와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게다가 수감된 후에는 가석방까지 거부했다. 

가석방의 전제조건이 사회 봉사 활동이었는데, 본인은 일생 일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탈리아 언론은 그녀를 '검은 과부'라고 부르며 비아냥 거렸다.


결국 구치는 프랑스의 다국적 대기업인 피노 프랭탕 르두트에 인수 합병되었고 구치 일가는 모두 경영일선에서 쫓겨났다. 

장인 정신에서 출발한 이탈리아 명품 가문 중, 구치만큼 불화와 반목으로 콩가루가 된 집안도 없다. 

가족 사이의 욕망과 배신, 원한에 살인사건까지... 

실제의 사건이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니 말이다.


현재 구치는 창업자 구치의 이름과 장인 정신만 상징적으로 빌렸을 뿐 구치 가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프랑스의 명품 마케팅 전략이 얼마나 치밀한가 하면, 장인정신으로 창업한 브랜드를 돈으로 사들여서는 가문의 전설과 장인의 후광만을 얹어 간다. 


구치 역시 상징이던 GG 로고, 말의 안장 끈에서 영감을 얻은 그린-레드-그린의 줄, 

구조가 직접 디자인한 '대나무 백'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제 한 땀 한 땀 박아 명품을 만들어내는 장인은 없다.

창업주의 가족도 없다. 


더듬어보면 구치 가족들의 불화는 과도한 욕심과 경쟁 때문이었다.

돈만 있지 사랑이 부재한 집안이었다. 

자식농사도 잘못 지었다. 

구치의 스토리는 르네상스 이래로 상인과 장인들이 이끌어온 피렌체라는 도시에 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위기에 처한 프라다를 포코노라는 신소재를 개발해 재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미우치아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출처: <장인을 생각한다.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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