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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Aug 07. 2024

바빌론의 역사

바빌론 부자들의 돈 버는 지혜

역사상 바빌론보다 더 부유하고 화려한 도시는 없었다.
바빌론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머릿속에 부와 화려함이 떠오를 정도다. 
바빌론이 보유한 황금과 보석은 엄청난 규모였다. 
 

이토록 부유한 바빌론의 지리적 위치는 어디였을까?
흔히 바빌론은 숲과 광산 같은 천연자원이 풍부한 곳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바빌론은 유프라테스강 근처 메마른 땅에 있었다.
주변에 숲도 없고 광산도 없었다. 
건물을 지을 돌조차 없었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교역로 근처도 아니었다.  


이 지역은 비가 적게 내려서 곡물을 키우기도 어려웠다.
바빌론은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보여준 도시였다. 
바빌론을 지탱하는 모든 것은 인간이 직접 만들어냈다.
바빌론의 부와 풍요로움도 인간이 이뤄낸 것이다.
  


바빌론의 천연자원은 두 가지였다.
비옥한 토양과 유프라테스강이었다. 
바빌론의 기술자들은 댐을 만들고 관개수로를 건설하여 강물을 끌어왔다.
이렇게 끌어온 물을 비옥한 땅에 흐르게 하여 농작물을 재배하였다. 
역사상 최초의 공학적 위업이었다. 
덕분에 바빌론은 풍부한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었다.
 
바빌론은 오랫동안 존속되었다. 

주변 국가를 정복하거나 약탈하는 일은 드물었다. 
많은 전쟁에 치르기는 했지만 대부분 국지전이었다. 
바빌론의 풍요를 노리는 침략자를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바빌론의 위대한 왕들이 보여준 지혜, 진취적인 기상과 정의로움은 역사로 남아 지금까지 전해진다.
 
풍요로웠던 고대 도시 바빌론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수천 년 동안 도시를 건설하고 유지했던 활기찬 힘이 사라지자 바빌론은 곧 황폐한 땅이 되었다. 
바빌론은 페르시아만 북쪽, 수에즈 운하 동쪽으로 965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비옥한 농경지가 많았던 땅은 황야로 변했다. 
드문드문한 풀과 사막의 관목이 모래바람을 맞으며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비옥한 들판, 거대한 도시, 교역 물품을 가득 실은 상단의 행렬은 사라졌다. 
기독교의 시대가 시작되던 무렵부터 아랍계 유목민이 소규모로 가축을 키우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이 땅에는 흙언덕이 여기저기 쌓여 있다. 

수 세기 동안 여행자들은 이 흙언덕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저 자연적으로 발생한 흙언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폭풍우가 몰아친 후 흙언덕에서 깨진 도자기 조각이나 벽돌 조각이 발견되면서 고고학자들은 흙언덕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유럽과 미국의 박물관에서 자금을 지원받은 탐사대가 이곳에 와서 대대적인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탐사대는 결국 고대 도시의 흔적을 찾아냈다. 
고고학자들은 이 흙언덕을 고대 도시의 무덤이라고 부른다.
  


바빌론도 이렇게 발굴된 도시 중 하나였다.
2,000년 동안 바빌론은 사막의 모래에 뒤덮였다. 
진흙을 빚어 만든 벽돌로 건설한 풍요의 도시 바빌론은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여기에 고대 도시 바빌론이 있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잊혀진 채 방치되었던 거리, 무너진 사원, 폐허가 된 궁전의 잔해를 조심스럽게 걷어내자 찬란했던 바빌론의 흔적이 드러났다.
  

학자들은 이곳에 자리했던 바빌론과 인근 도시를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시라고 말한다. 
바빌론의 역사는 8,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학자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바빌론 폐허에서 발견된 일식에 관한 기록 때문이다.
현대 천문학자들은 일식 기록을 토대로 바빌론에서 일식이 일어난 때를 계산하였고, 바빌론 역법과 현대 역법의 관계를 밝혀낼 수 있었다.
  

이런 방법으로 학자들은 8,000년 전 수메르인이 성벽을 쌓은 도시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러나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막연히 짐작만 할 뿐이다.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미개하지 않았다. 
 

고등교육을 받고 개화된 사람들이었다.
역사의 기록에서 보듯이 그들은 최초의 공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금융가였다.
또한 인류 최초의 기록 문자도 가지고 있었다.
 
황무지를 풍요로운 농업지대로 바꾸어 놓은 관개시설에 대해서는 앞서 얘기했다. 

대부분 모래에 뒤덮이긴 했지만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몇몇 수로는 열 마리의 말이 나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바빌론의 기술자들은 관개
수로 외에도 대규모 공사를 진행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입구의 늪지대를 개간하여 농지로 만들었다.
 
  

그리스 여행가이자 역사학자인 헤로도토스는 바빌론이 찬란한 영광을 누리던 때 바빌론을 방문하여 기록을 남겼다.
그의 글은 바빌론의 모습과 풍습을 자세히 알려준다.
바빌론의 비옥한 땅을 묘사했다. 
그 땅에서 밀과 보리가 얼마나 풍성하게 수확되는지도 적혀 있다.
 

바빌론의 영광은 사라졌지만 바빌론의 지혜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 
바빌론 사람들이 사용한 기록 방식 때문이다. 
당시 종이는 발명되지 않았었다.
대신 바빌론 사람들은 촉촉한 점토판에 글을 새겼고, 완성된 점토판을 불에 구워 단단하게 만들었다. 
  

점토판은 현대의 종이처럼 흔하게 사용되었다. 
점토판에는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전설, 시, 역사, 왕실 칙령, 토지문서, 재산소유권, 약속어음 등이었다. 
 

바빌론의 불가사의 중 하나는 거대한 성벽이다. 
고대인들은 이것을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불렀다. 
바빌론 초기에 세미라미스(Semiramis) 여왕이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성벽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정확한 성벽의 높이는 알 수 없다.
오래된 기록에 따르면 성벽의 높이는 약 15~18m 정도였다고 한다. 
성벽은 진흙을 구워서 만든 벽돌로 쌓았고 성벽 주위에는 해자(垓)를 만들어 성을 보호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600년 전쯤에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 왕이 새로운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성벽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성경에도 등장하는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이 공사를 이어받았다.
 

새로운 성벽의 크기와 길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저명한 학자에 따르면 높이가 50m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현대의 15층 건물 높이에 해당한다.
길이는 16km 정도로 추정된다. 
 

성벽 꼭대기에는 길을 냈는데, 이 길은 말 여섯 마리가 이끄는 전차가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고 한다.
지금은 성벽 터와 해자의 흔적만 일부 남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며 성벽이 무너지기도 했고, 아랍인들이 다른 건축물에 쓰려고 벽돌을 캐서 가져간 것도 원인이다.
 

바빌론은 현대 도시처럼 잘 정비되어 있었다. 
거리는 잘 구획되어 있었고 상점도 많았다.
상인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고 성직자들은 웅장한 사원에서 일했다. 
도시 안에는 왕궁이 있었는데 왕궁의 성벽은 도시를 둘러싼 성벽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바빌론 사람들은 예술에도 뛰어났다. 

조각, 회화, 직조, 세공, 금속 무기 제작, 농기구 제작 등에 능했다. 바빌론의 장인이 만든 보석은 예술적 가치가 높았다. 
바빌론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보석들은 세계 유수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나 부족이 돌도끼를 사용하고, 돌창, 돌화살을 사용할 때 바빌론 사람은 쇠로 만든 도끼, 창, 화살을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바빌론 사람은 똑똑한 금융가였고 상인이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바빌론 사람은 거래 수단으로 돈을 발명하였고, 약속어음과 재산 소유증서를 최초로 고안하고 사용했다.
 
철옹성을 자랑하던 바빌론도 기원전 540년경 침략군에게 정복되고 말았다. 

물론 바빌론 성벽이 함락된 것은 아니었다. 
바빌론의 몰락은 바빌론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다.
왕이 잘못된 판단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시대 위대한 정복자였던 페르시아 제국의 키로스 2세는 바빌론을 공격하여 점령하고자 했다
그때 바빌론의 왕은 나보니두스(Nabonidus)였다.
신하들은 왕을 설득하여 성벽이  포위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성벽 밖으로 나가 싸우자고 했다.

성 밖으로 출정한 바빌론 군대는 키로스 2세의 군대에 연패하였다. 
그러자 나보니두스 왕은 바빌론을 버리고 달아나고 말았다.
  

키로스 2세는 활짝 열린 성문으로 아무런 저항 없이 입성하였다. 

그 이후로 바빌론은 서서히 몰락하였다. 
그렇게 몇 백 년이 지나자 바빌론은 황폐한 땅이 되었다.
바람과 폭풍이 바빌론을 모래로 덮어버렸다.
바빌론은 그렇게 몰락하였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바빌론 문명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영겁의 시간은 바빌론의 높은 성벽과 찬란한 건물을 먼지로 만들어버렸지만, 바빌론의 지혜는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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