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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Aug 29. 2024

케네디 형제와 마릴린 먼로의 죽음

먼로의 죽음

1962년 8월 5일, 마릴린 먼로가 자신의 자택에서 사체로 발견됐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전화 수화기를 붙잡은 채 발견된 먼로의 죽음은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시작으로 자살 원인이 무엇이냐, 
타살 원인이 무엇이냐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녀의 죽음을 자살로 규정하는 이들은 그녀가 영화사로부터 배역을 받지 못한 데다 손해배상까지 당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존 F. 케네디 · 로버트 케네디에게 실연당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타살을 주장하는 이들은 사법부가 케네디 형제를 보호하기 위해 마피아를 시켜 살해했다고도 하고 그 반대로 마피아가 케네디 형제를 곤경에 빠뜨리고자 불륜관계에 있던 먼로를 살해했다고도 한다. 


1961년 12월부터 먼로와 관계를 맺은 케네디는 1962년 5월 마지막 정사를 가진 후 자꾸 만나자고 보채는 먼로를 피하려고 백악관 집무실 직통 전화번호를 바꾸고 먼로에 대한 뒤처리를 동생에게 떠넘겼다.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는 경고 및 위로 차 먼로를 직접 방문했다가 그녀의 매력에 무릎을 꿇고 형 대신 관계를 맺지만, 그 역시 곧 먼로를 떼어내는 문제로 고민했다.
 
먼로는 케네디 형제와의 관계에 대해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는데, 이는 과시라기보다는 그들로부터 버림은 좌절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로버트 케네디의 부인으로 퍼스트레이디가 되리란 꿈도 있었던 먼로는 그들의 배신에 분노와 큰 상처를 받아 난폭해졌고 자신이 학대받고 있다는 생각에 더욱 약물에 의존했다.
그녀의 죽음과 관련해 케네디 형제 연루설이 나오는 배경이다.
 

케네디의 섹스 중독

먼로의 죽음으로 불거진 케네디의 엽색행각은 세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섹스 중독도 유전인가?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도 희대의 난봉꾼이었다. 
 

조지프 케네디는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영화 제작에도 관여하면서 글로리아 스완슨(Gloria Swanson, 1899-1983)을 비롯한 할리우드 여배우들을 적잖이 섭렵했으며, 심지어는 딸의 친구들까지 넘보는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아들 중 아버지의 그런 점을 가장 빼닮은 자식이 존 F. 케네디였다.
싱글 시절부터 바람둥이로 유명했던 케네디는 재키와의 결혼 생활 중에도 끊임없이 여자를 찾았다. 
그 수가 너무 많아 그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는데, 수백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케네디는 백악관에 밀회 장소를 만들어놓고 섹스 파티를 벌여 경호원들에게 굴욕감을 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신분임에도 유명한 마피아 갱의 여자친구와 관계를 가져 협박을 받을 정도로 무모했다.
 
케네디도 자신이 섹스중독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영국 총리 해럴드 맥밀런에게 사흘 이상 섹스를 하지 않으면 두통이 생긴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케네디의 고문이었던 시어도어 소렌센은 "이 정부는 아이젠하워 정부가 골프에 미쳐 있던 것보다 더 심하게 섹스에 미쳐 있다"라고 말했다.
   


케네디-마피아-후버

케네디의 섹스 중독은 FBI 국장 후버에게는 큰 무기가 되었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이전의 엽색행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통령 당선자 시절 케네디가 몇 차례 관계를 맺은 창녀 마리엘라 노보트니가 소련의 미인계 공작과 연루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케네디는 후버에게 또 한 번 완전히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법무장관을 맡은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는 후버에게 더는 끌려다닐 수 없다는 생각으로 후버를 잡으려고 발버둥 쳤다. 

언제든지 후버를 호출할 수 있도록 핫라인을 설치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그를 압박했지만, 이미 여러 대통령들을 상대해 온 후버를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먼로의 사인은 진정제 과용으로 밝혀졌는데, 일부에서는 진정제가 누군가에 의해 입이 아닌 직장(直腸)으로 투입되었으며, 시카고 마피아의 짓이라는 음모설이 떠돌았다. 

그녀를 살해함으로써 로버트 케네디의 스캔들이 폭로되고 더 나아가 대통령까지도 곤경에 몰아넣을 수 있는 효과를 기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먼로의 사망 직후 모든 진상은 은폐되었다. 

백악관 전화번호가 적힌 종잇조각과 문제의 소지가 있는 물품들은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  

법무장관의 오랜 친구인 로스앤젤레스 시경 정보과장인 제임스 해밀턴의 지시로 일어난 일이었다. 
FBI도 뛰어들어 먼로의 전화 기록은 FBI 손에 넘어갔다.
후버는 은폐에 협조했다. 
8월 7일, 로버트 케네디는 이전의 자세를 180도 바꿔 후버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다. 
 

 
"케네디 형제가 범인이다"

먼로는 죽기 10여 일 전인 7월 22일, 아버지가 존 F. 케네디인지 로버트 케네디인지 알 수 없는 케네디가의 태아를 남몰래 낙태하고는 악에 받쳐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과 케네디 형제의 관계를 모조리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어댔다.  


저택 관리인이 먼로의 시체를 발견한 건 8월 4일 밤 10시경이었지만 주치의에게 연락을 취하다 늦어져 로스앤젤레스 서부경찰서 당직이었던 잭 클레멘스 경사에게 신고된 것은 다음 날 새벽 4시 25분이었다. 
이웃들의 증언에 따르면 4일 밤 10시 이후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먼로의 집에는 주행 등을 끈 차들이 잇달아 도착했다.  

먼로의 시체를 확인한 후 그녀가 타살됐다는 심증을 굳힌 클레멘스 경사는 5일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견해를 밝혔다가 아무런 이유 없이 파면됐다.

로버트 케네디의 충복으로 FBI 국장 자리를 노리던 윌리엄 파커(William Parker, 1905~1966)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장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먼로가 죽자 그녀 곁을 끝까지 지킨 의리파는 전 남편 조 디마지오(Joe DiMaggio, 1914~1999)였다. 

디마지오는 장례를 직접 주관하면서 할리우드 스타들과 정치인들의 조문을 한사코 막아 장례식엔 24명 만이 참석했다. 
디마지오는 장례 진행 담당자에게 "빌어먹을 케네디가의 놈들은 발조차 들여놓지 못하게 하시오"라고 당부했다.
죽는 날까지 먼로의 묘지에 매주 싱싱한 꽃을 바친 디마지오는 먼로를 타락시킨 연예계와 바람둥이 케네디 가문 그리고 민주당을 중요했다.  

 

 

케네디의 만성질환

케네디의 섹스 중독은 그가 앓고 있던 다른 만성질환들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공개된 기록들에 따르면 "케네디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었던 시기를 비롯한 대통령 재임 내내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질병으로 고생했고 더욱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으며 언론이나 대중, 가족이나 측근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케네디를 영웅으로 여기지만 부정적인 면도 존재한다. 

아버지 조지프 캐네디는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의 후손으로 금주령 시대 마피아와 손잡고 밀주로 떼돈을 벌었으며, 대공황 시기에 일확천금에 이른 금력을 기반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시간이 흐르면서 케네디가 부정적으로 재평가되는 데 비해, 메릴린 먼로는 긍정적으로 재평가된다.  

그녀는 '섹스심벌'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가수 엘튼 존(Elton John)이 그런 취지의 찬가인 바람 앞의 촛불(Candle in the Wind)' (1973)을 바쳤고,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이 「메릴린(Marilyn)』(1986)이라는 전기를 통해 페미니즘 관점에서 먼로를 재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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