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투어
크리스마스 연휴에 유럽 도시에 머무는 여행자들은 시내에서 이동하기가 여의치 않다.
기차역 역시 한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유럽 각지로 끊임없이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이 기차역이 연중 가장 한산한 시기일 것이다.
폴란드 남부 도시 크라쿠프로 향하는 국제야간열차 출발 전까지 달리 시간을 보낼 곳도 없었기에, 싸늘한 냉기가 도는 대합실에서 하릴없이 몇 시간을 기다렸다.
그런 뒤에 열차에 올라 밤의 경계를 넘어 국경을 넘었다.
나는 그렇게 2005년 크리스마스이브에서 크리스마스로 넘어가는 순간을 역시나 나 말곤 아무도 없는 4인용 침대칸에서 맞이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61년 전인 1944년 12월 24일 소련군은 나치의 수중에 있던 부다페스트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해방의 새벽이었다.
그러나 너무 늦은 해방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출발해 슬로바키아 동부를 거쳐 폴란드 크라쿠프로 향하는 이 구간은 헝가리의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실어 나르던 기찻길이었다.
헝가리는 나치 독일의 영향권 내에 있으면서도 복잡한 정치역학으로 인해 가장 늦게 장악당한 지역이었으며, 그 때문에 헝가리 유대인들은 나치의 패망을 불과 1년여 앞두고 파멸을 맞닥뜨렸다.
그즈음에는 연합국 정부도, 평범한 헝가리 사람들도, 무엇보다 유대인 자신들도 그 이송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거의 속수무책으로, 1944년 4월 29일 헝가리 유대인들을 비르케나우(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로 이송하는 대대적인 작전이 시작됐다.
나치는 그때까지 쌓아 온 '노하우'를 총동원해 유례없이 신속하게, 유례없이 많은 인원을 이송했다.
그해 5~7월 약 44만 명의 헝가리 유대인이 화물열차에 실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끌려갔다.
하루에 6,000명이 넘는 꼴이었다.
그중 32만여 명이 거의 도착하자마자 살해당했다.
아우슈비츠 해방을 불과 6~8개월 남겨 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애초에 나치가 아우슈비츠를 대규모 절멸수용소로 선택한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철도망이 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근대의 위대한 유산이자 오늘날 수많은 여행자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수단, 유럽을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하는 철도망은 나치의 집단학살을 가능케 한 커다란 축이었다.
그 비유대로 이 거미줄에 걸린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죽음이었다.
기차 이동 자체도 가혹했다.
나무 궤짝처럼 생긴 화물열차 한량에 최대 120명까지 밀어 넣었다.
다닥다닥 붙어서라도 바닥에 누울 수 있는 최대 정원은 50명가량이었다.
100명이 넘어가면 모두가 서 있거나 교대로 쪼그려 앉아야 했다.
음식도, 물도, 급한 용변을 해결할 요강도 제공되지 않았다.
빛과 공기를 들이는 창문이라고는 천장 가까이 뚫린 손바닥만 한 구멍이 전부였다.
2005년에는 부다페스트에서 크라쿠프까지 열 시간, 다시 아우슈비츠까지 두 시간 정도가 걸렸지만, 당시에는 선로 상태나 기차의 성능이 떨어졌을뿐더러 중간중간 군용 열차를 먼저 보내려 몇 시간씩 기다리느라 하루 이상이 걸렸다.
그리스 테살로니키에서 오는 열차는 2주 이상이 걸리기도 했다.
그사이 이미 많은 사람이 질식해 죽거나 미쳐 버렸고, 그것은 정확히 나치가 원하는 결과였다.
1940년 원래 폴란드군 막사였던 스무 채의 벽돌 건물을 나치가 접수한 뒤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한 것이 아우슈비츠의 시작이었다.
그러다 수용자들이 늘어나자 1941년 봄에 여덟 채의 건물을 새로 짓고, 원래 단층이었던 기존 건물 열네 채에 2층을 지어 올렸다.
그 일을 맡은 건 수용자들 자신이었다.
변변한 건설 장비도 없이 직접 땅을 파 기반을 다진 뒤 벽돌과 시멘트와 모래를 나르고 쌓아 올렸다.
그 과정에서도 혹사와 툭하면 가해지는 체벌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후로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곳에서 실려 왔다.
북쪽으로는 노르웨이 오슬로와 에스토니아 나르바부터 남쪽으로는 그리스의 아테네와 로도스섬에서까지.
평화로운 외관과 달리 건물 안팎의 전시물과 안내판의 내용은 방문객들을 심리적 그로기 상태로 몰고 간다.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에는 강제 노동이나 생체 실험, 가스실 학살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나치의 만행을 실감 나게 재현한 디오라마도,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극적인 영상도 없었다.
발소리와 이따금 사람들이 주고받는 나지막한 대화만 들릴 뿐 고요하기 그지없는 전시실에는, 그 대신 낮은 조도의 조명 아래 가스실 학살에 사용된 치클론 B의 빈 깡통, 수용자들의 여행가방, 안경, 의족, 머리카락, 옷가지, 신발 등이 각각 수북이 쌓여 있었다. 1945년 1월 러시아군이 수용소를 해방할 당시 발견한 머리카락 2만 톤, 신발 11만 짝, 여행가방 3,800개(그중 2,100개에 주인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냄비와 프라이팬 12,000개, 의족과 치아교정기 470개, 줄무늬 의복 387벌 등의 일부다.
한때 이름과 생명을 가졌던 개개인의 일부이거나 소유물이었던 것들이 주검 대신 남은 것이다.
내가 본 여행가방 중에는 '프라하에서 온 마리 카프카', '빈에서 온 클라라와 사라 포히트만'의 것도 있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기 전에 가능한 모든 것을 지참하라는 권고 또는 명령이 되풀이됐다.
호송대원들은 특히 금, 보석, 모피, 그 밖의 귀중품을 챙기라고 강조했고,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의 유대인 농부들에게는 작은 가축들까지 가져가라고 주문했다.
그들은 "공모의 분위기를 풍기며 '모든 물건이 너희들에게 다 쓸모가 있을 거야'라고 우물거리곤 했다"
물품들은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자마자 모두 압수되어 '카나다(캐나다)'라는 은어로 불리는 창고로 보내졌다.
제3 제국이 손쉽게 자원을 강탈하는 수법이었다. 전시실에서 본 수많은 여행가방과 생필품은 그런 연유로 이곳에 남게 된 것이다.
이른바 '죽음의 블록'이라 불리는 11블록 지하에는 봉기를 모의하거나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힌 수용자들을 가둬둔 감방이 있다.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사람 한 명이 겨우 서 있을 만한 '직립 감방'들이다.
벽돌 굴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양새다.
낮에는 다른 수용자들과 똑같이 고된 노동을 하고 밤이면 이곳으로 돌아오는 식으로 며칠에서 최대 열흘 넘게 지낸 많은 이가 질식 또는 탈진으로 죽었다.
10블록과 11블록 사이 마당에는 교수대가 있다.
수용소 내 기강을 잡기 위한 본보기로 수많은 수용자의 목숨을 앗아갔던 교수대에서 마지막으로 처형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우슈비츠 초대 소장이자 마지막 소장, 또한 최장기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였다. 그는 폴란드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47년 4월 16일 이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제1수용소가 말끔한 외관과 그와 대비되는 세부로 충격을 던진다면, 그곳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비르케나우 또는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는 규모로 압도한다.
그곳으로 걸어가면서도 나는 다시 한번 무엇을 보게 될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나치의 최대 절멸수용소였던 비르케나우에는 약 1.8 제곱 킬로미터 부지에 300동 이상의 건물이 있었다.
박물관 안내서에 따르면, 폴란드 유대인들을 대대적으로 이송해 온 뒤인 1944년 8월 어느 날 점호 때에는 수용자가 10만 명에 달했다.
조직적인 가스실 학살은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지금도 남아 있는, 수용자들을 끊임없이 실어 나르던 '죽음의 기찻길'을 축으로 수용소 건물과 잔해가 까마득한 지평선까지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건물들은 나치가 퇴각하면서 대부분 폭파해 버렸지만 굴뚝들이 남아 수용소의 규모를 증언한다.
정문의 나치 친위대 위병 초소에 올라 그 아득한 모습을 멍하니 내려다보면서 "너무 넓다"라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그것은 150만 명이라는 그저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살상의 규모를 역시나 강렬한 시각적 체험으로 가늠케 하는 풍경이었다.
사람이 많은 만큼 이곳의 생활환경은 제1수용소보다 훨씬 열악했다.
제1수용소에서처럼 기만적이나마 최소한 인간의 주거 형태를 갖춘 시설은 찾아볼 수 없다.
일부 남아 있는 건물들은 규모만 클 뿐 영락없이 가축우리 같았다.
안으로 들어서니 차갑고 축축한 공기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수용자들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한겨울에도 이불이나 베개조차 없이, 벽돌을 쌓고 널빤지를 이어 붙인 3층 침대에서 잤다.
3층 침대 하나에 최대 열다섯 명까지 배정됐다.
그러다 침대가 무너져 내려 사람들이 층층이 깔리기도 했다.
아우슈비츠는 일종의 '공장'이었다.
나치 친위대는 아우슈비츠에서 이루어진 가스실 학살의 거의 전 과정을 '존더코만도(특수작업반)'라고 이름 붙인 수용자들에게 맡겼다.
그들의 임무는 벌거벗은 수용자들을 질서 정연하게 가스실로 이끌고 가서 죽음을 맞게 하는 것이었다.
친위대원이 하는 일은 수용자들이 가스실로 모두 들어서면 내부의 조명을 끄고 뚜껑이 달린 수직 굴뚝으로 치클론 B 깡통 두 개를 털어 넣는 것뿐이었다.
치클론 알갱이가 바닥에서 기화하면서 시안화수소가 발생하고, 수용자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비명 소리는 2분쯤 이어지다가 15분이면 완전히 멎었다.
그 뒤부터는 다시 존더코만도의 몫이었다.
그들은 바닥의 가스를 피하느라 탑처럼 쌓인, 피부가 분홍색과 녹색으로 물든 시체들에 호스로 물을 뿌려 남은 독을 씻어 낸 뒤, 귀중품이 숨겨져 있지 않은지 사체의 구멍을 모조리 확인했다.
입안에서 금니를 뽑아내고 여성의 머리카락을 잘라 내 염화암모니아로 씻었다.
그러고는 시체를 수레에 실어 화장터로 가져가 소각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재를 아궁이에서 비워 내야 했다.
존더코만도의 수는 시기에 따라 700~1,000명에 달했다.
아우슈비츠 박물관 안내서에 따르면,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에 있던 210제곱미터 크기의 지하 가스실 한 군데서만 한 번에 약 2,000명을 살해했다.
제2수용소의 가스실과 화장터는 나치가 퇴각하며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폭파해 버렸지만, 제1수용소에는 일부 가스실과 화장터가 보존되어 있다.
그곳에 들어섰을 때 이상하게 일렁이던 공기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타르처럼 끈적한 어둠,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 연기처럼 영혼처럼 뿌옇게 부유하던 빛과 먼지. 실제였는지 착각이었는지, 탄내가 남아 있는 듯했다.
격앙된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어려웠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숨을 꾹 참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 아직 치클론 가스가 남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얼마 못 견디고 도망치다시피 밖으로 뛰어나와 숨을 몰아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