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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Dec 23. 2024

킬링필드

캄보디아  청아익

내가 예약한 숙소는 단돈 2만 원 남짓에 조식을 포함해, 24시간 따뜻한 물이 나오는 욕실이 딸리고 에어컨이 있는 깔끔한 더블룸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흰 타일이 깔린 바닥은 맨발로 다녀도 될 정도로 깨끗했고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언제나 침대와 방 안이 말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10박을 했는데, 오가며 본 소리아스는 언제나 호텔 안팎을 정리하고 직원들에게 무언가를 주문하고 누군가와 통화를 주고받느라 분주했다. 
내 커다란 카메라를 보고 내가 미술 쪽에 조예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빈 벽에 그림액자를 걸려고 한다면서 액자 틀을 무슨 색으로 하면 좋겠느냐고 상의해 오기도 하고, 숙소에 개선할 점이 없는지 진지하게 물어보기도 했다. 
 

심지어 내가 여행 전에 예약해 둔 다른 숙소로 옮길 때 직원을 시켜 그 숙소 앞까지 뚝뚝으로 데려다주었고, 숙소를 옮긴 뒤에도 내가 마땅한 투어 프로그램을 찾지 못해 포기했던 프렉톨 조류보호구역에 갈 수 있게 가이드 겸 기사와 다른 일행까지 섭외한 뒤 연락을 주었다.  


나는 소리아스보다 열심히 일하는 숙소 주인을 본 적이 없다.
소리아스뿐만이 아니다. 새벽부터 깨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 늘 땀에 젖어 있는 사람들... 이들이 처한 가난은 이들에게 너무 부당한 것처럼 보였다.  


캄보디아인이 천성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에 대대로 가난하게 살아왔다는 분석이야말로 게으른 것이다.
캄보디아는 근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과정을 겪어 내지 못했다. 
그러니 캄보디아가 처한 빈곤의 연유를 추적하자면 적어도 프랑스 식민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겠지만, 그보다 직접적으로는 크메르루주 집권기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급진적 혁명조직인 크메르루주는 그들이 상징적으로 내세운 '0년'이란 구호처럼 기존의 모든 사회 시스템을 파괴하고 캄보디아의 시계를 전근대로 되돌려 놓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크메르루주가 캄보디아의 물적 토대는 물론 국가 전체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 놓았으며, 나아가 정신적인 면에서도 사람들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고 지적한다.  

“캄보디아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와 관련 트라우마 질병이 세대를 넘어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다.” 
 

어떤 미치광이 과학자가 한 나라를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설계했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한 나라의 지식인층을 전부 죽이면 그 나라는 어떻게 될까?'  

그 실험은 1970년대 중후반 캄보디아에서 실제로 벌어졌고, 그 설계자는 과학자가 아니라 교사였다가 총을 든 군인이었다.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가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을 장악하고 공포정치를 단행한 3년 8개월간, 캄보디아의 교사 80퍼센트와 의사 95퍼센트가 처형당하거나 아사 또는 병사해 사라졌다.
기존의 론 놀 정부에서 일했던, 고등교육을 받은 관료와 다른 전문가도 마찬가지였다.


폴 포트와 크메르루주는 농민만을 순수한 캄보디아인으로, 혁명을 이룰 기본적 집단으로 여겼다. 

빈농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농민이 전체 캄보디아인의 본보기가 됐다.  

이에 따라 당시 250만 명에 달했던 프놈펜 인구를 포함해 전국의 도시민들은 직업이나 계층에 상관없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 전부 지방의 집단농장으로 재배치되어 사상교육을 받고 할당된 생산량을 채우기 위해 논밭에서 혹독하게 일해야 했다.  


살아남은 의사, 교사, 법률가, 기술자, 항공기 조종사, 공장 노동자들까지 모두 집단농장의 일꾼이 됐다. 
기존의 지식은 쓸모없는 것을 넘어 부르주아적인 것, 따라서 말살해야 할 것 취급을 받았다.  

현대화된 농기계는 물론이거니와 낫과 곡괭이 같은 재래식 농기구마저 턱없이 부족했다. 자동차의 철은 녹여 쟁기날을 만들고 엔진은 양수기용으로 개조하고 바퀴는 우마차에 달았다. 
한 번도 농사일을 해 본 적이 없는 도시민들은 가혹한 노동과 부실한 영양 공급, 열악한 위생 환경 등으로 날로 쇠약해져 갔다.
 
사유재산은 엄격하게 금지됐다. 

검은 상하의 한 벌, '크라마'라 불리는 붉은색과 흰색 체크무늬 스카프 하나, 자동차 폐타이어로 만든 샌들이 허용된 전부였다. 
나아가 크메르루주는 앞선 어떤 공산국가에서도 시도하지 못했던 일을 밀어붙였다.
화폐를 전면 폐지한 것이다.  

모든 식량과 생필품은 배급제로만 (터무니없이 부족하게) 지급됐고 물물교환조차 당의 허가 아래서만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킬링필드'라는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크메르루주 시기의 사망자들이 모두 처형당했으리라 짐작하기 쉽지만, 사실 상당수가 굶어 죽거나 쇠약해진 몸에 병을 얻고도 치료를 받지 못해 죽었다. 
일하지 못하는 아이와 노인, 병자와 장애인 등 사회의 약자들부터 죽어 갔다. 
그 수는 추정치에 따라 다르지만 최대 100만 명에 이르렀다.


캄보디아 미래의 전망마저 어둡게 하는 것은 빈곤계층의 45퍼센트가 19세 이하의 청소년과 어린이라는 사실이다. 

유네스코 통계국 UTS 홈페이지에 공개된 가장 최근 자료인 2014년 통계에 따르면 캄보디아 내 초등학교 진학률은 94.7퍼센트로 얼핏 양호해 보인다. 
그러나 중퇴율이 53퍼센트에 달해 입학생 중 절반은 졸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학교 진학률은 가장 최근 데이터인 2008년 기준 38퍼센트, 고등학교 이상 고등교육기관 진학률은 2017년 기준 13퍼센트에 불과하다.  

아동 노동이 공공연한 캄보디아에서 어린이들은 일찌감치 집안의 생계라는 짐을 나눠져야 하는 노동자원으로 내몰리고 있다.
 
현재의 모든 곤궁을 편리하게 크메르루주에 뒤집어 씌운 채 부정 축재를 일삼아 온 훈 센을 위시한 부패한 관료들이 지금의 캄보디아를 만들었다. 

그러나 훈 센 또한 한때 크메르루주의 일원이었으며, 그가 펼치고 있는 철권통치 역시 그가 배반했던 폴 포트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내전에서 살아남은 크메르루주 지도부의 상당수가 현 정권에서도 한 자리씩 차지해 잘살고 있다.
 
제노사이드의 피해자는 죽은 사람들만이 아니다. 

제노사이드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영원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하며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악랄한 범죄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당 간부의 심기를 거스르는 아주 작은 일조차 곧 죽음으로 이어졌던 공포의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이 국가 최고위 권력층에 반기를 들기란 어려운 일이다.
크메르루주의 망령은 아직도 캄보디아 전체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그 시대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틀 뒤 프놈펜에서 뚝뚝을 잡아타고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50분가량 달려 도착한 청아익, 속칭 킬링필드는 주변으로 논밭이 펼쳐진 한적한 전원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자체가 원래 과수원이었던 곳이다. 
 

철조망 바로 너머에 위치한 민가에서 아이들이 풀어 기르는 닭을 쫓으며 뛰어놀고 있었다.
아우슈비츠와 마찬가지로, 1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해되고 묻힌 장소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경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거대한 탑이다. 
크메르 전통 양식의 지붕을 인 17층 규모의 위령탑에는 현재까지 발굴된 9,000여 구의 유골이 10층까지 안치되어 있는데, 해골들은 투명한 유리 너머로 방문객들이 볼 수 있도록 바깥을 향해 있다.  


유골 발굴 작업이 마무리되고 이 학살에 관여한 모든 사람이 마땅한 처벌을 받는 미래의 어느 날, 이 유골들 또한 크메르 예법에 따라 화장되어 안식을 취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산 자들을 향해 말보다 강력한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우리의 죽음을 기억하라.
 
이곳은 아우슈비츠와 달리 프놈펜에 위치한 S-21 교도소에서 실어 온 수감자들을 처형만 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몇 안 됐을 건물이나 시설 등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수감자들은 대부분 한밤중에 트럭에 실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살해당했다.  


그 수가 하루 300명까지 늘어나자 크메르루주는 판자에 양철 지붕을 얹은 간이 오두막을 만들어 하루 이틀 수감자들을 가둬 두기도 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안내판만 남아 있다.
방문로를 따라가며 볼 수 있는 건 사연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저 평범해 보일 움푹 패거나 봉긋 솟아오른 집단 매장지, 이미 유골을 발굴한 곳에 쳐 놓은 울타리와 차양, 특정한 용도로 사용한 나무, 시체들을 수장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저수지 등뿐이다. 
그래서 이곳에 오는 이들은 대부분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해 (한국어도 있다) 설명을 듣는다.
 
 
크메르루주에게 인민은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데 방해가 되는 '적'은 죽어 마땅했다. 
아우슈비츠에서와 마찬가지로, 처형된 사람들은 죽어서도 도구로 이용당했다. 
 

옷은 벗겨져 다른 사람에게 주어졌고, 시체는 토양을 기름지게 한다며 논가에 묻혔다.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유골은 비료로 쓰였다.  

크메르루주가 통제한 것은 인간의 죽음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꿈꾸는 강대국에는 더 많은 인구, 곧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당 간부들은 마을 여성들의 월경 주기를 파악해 배란기에 남편을 보내 동침하게 했다.
그들은 종종 인민을 '황소'에 비유했다.  

국외로 피신했다가 돌아온 시아누크 전 국왕은 완전히 달라진 국민들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나의 백성들이 …………) 소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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