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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Dec 01. 2021

로마제국 흥망사(1)

에드워드 기번

에드워드 기번

영국 역사가인 에드워드 기번은

1737년 출생하여 1794년에 생을 마감했다.


서기 2세기부터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동로마제국이 몰락했던 15세기까지  

1400년의 장구한 세월을 6권의 책으로 출간하기까지 20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1776년 2월 17일  1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기번은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1737년 4월 27일 영국 서레이 주 런던 근처의 퍼트니에서 태어난 기번은

부모의 무관심과 잦은 병치레로 남다른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기번이 9살 때 어머니가 사망했다.
 이모 캐서린 포튼의 도움으로

다양한 분야의 많은 책들을 접하게 되었고,

 독서에 취미를 갖게 되었다.


 옥스퍼드에 진학한 기번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게으르고 무익한 시간을 보내던 중,

카톨릭으로 개종을 했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아버지는 그를 스위스 로잔으로 보냈는데

로잔에서 보낸 5년의 세월이 학자로서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1758년 기번은 영국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귀국했다.


그리고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뛰어든 7년 전쟁(1756-1763)에 영국이 참전하자

아버지는 기번을 보병대 대위로 지원하게 했다.

 전쟁이 끝나고 부대가 해산되자 기번은 오랫동안 계획하고 있던 유럽 여행을 떠났다.


 “1764년 10월 15일, 로마에서였다.

 카피톨 리누스 언덕 위의 폐허에 앉아서 탁발 수도사들의 저녁기도 소리를 듣고 있던 중

 이 도시의 흥망사를 집필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영혼 한 고전 <로마제국 흥망사>의 시발점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기번은 진지하게 역사를 서술하기 시작했고

1776년 3월 17일 제1권이 출판되었다.

5년 후인 1781년 2권과 3권이 출판되었다.

 

1787년 나머지 3권이 완성되었지만,

출판은 51세 생일에 맞추어 1788년 5월 8일로 늦추었다.


기번은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지만,

1794년 1월 런던에서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로마제국은 기원전 754년 건국하였으나,

이 책은 건국 초기부터가 아닌 로마 제국이 전성기를 지나 소퇴의 길로 들어선

서기 200년부터 시작한다.


그 당시 로마의 영토는 안토니누스의 성벽과 다키아의 북쪽 경계에서

아틀라스 산과 북회귀선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2000마일을 넘었고,

길이는 대서양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3000마일을 넘었다.


또한 온대 지방 중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북위 24도에서 56도 사이에 위치해 있었고,

160만 제곱마일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는 총면적이

대부분 비옥하고 잘 개간된 농경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3세기 로마제국

<명상록>의 저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황제의 아내이자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인 파우스티나는 그녀의 미모뿐 아니라

화려한 연애 편력으로도 유명하다.


로마제국 안에서 파우스티나의 부정을 모르는 사람은

마르쿠스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으나,

 마르쿠스는 파우스타니의 연인에게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공직을 맡기기도 했고

30년간의 결혼생활 내내 변함없이 그녀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존중했으며

그녀에 대한 존중은 그녀가 죽은 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명상록>에서 그토록 정숙하고 온화하며 검소한 부인을 내려준 것에 대해

신께 감사드린다는 표현을 남겼다.

 

마르쿠스의 뛰어난 미덕은 아내와의 평가에서 가려지는 면을 있지만,

그의 뒤를 이은 아들은 극악무도한 악덕으로 수백만 국민들의 행복을 희생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아버지 마르쿠스가 사망하자 권력을 승계받은 콤모두스의 체세 3년 동안은

마르쿠스 황제 시대의 형식과 정신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 후 잔인성을 드러내며 폭군으로 변하기 시작했으며,

콤모두스가 사치의 늪에 빠져 있는 동안 세부적인 국정을 맡은

근위대장 페렌니스는 국민을 착취하고 귀족들의 영지를 가로채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는 비굴하고도 야심이 큰 인물로 전임자를 죽이고

공직에 오른 사람이었다.


페렌니스의 뒤를 이은 근위대장 클리안 데르

역시 탐욕이 그의 정신을 지배하는 유일한 동기였으며,

클리안 데르의 폭정이 시작되자

국민들은 오히려 페렌니스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대중들의 분노로 폭동이 일어나자

콤모두스는 군중들에게 클리안 데르의 머리를 던져 줄 것을 명했다.

폭도들이 바라던 것을 손에 넣자 폭동은 가라앉았다.

 

콤모두스의 극단적인 잔인성은 자신을 병적인 불안감에 사로 잡히게 했고

 결국에는 자신의 죽음까지 초래했다.


친구들이나 동료들의 죽음에 놀란 애첩 마르키아와 시종장 엘렉투스,

근위대장 라에투스는 황제의 미친 듯한 변덕이나

국민의 분노의 폭발로 언제 자기들 머리가 떨어질지 모르는

죽음을 미연에 미리 방지하기로 결심하고

맹수 사냥 후 지친 콤모두스에게 독이 든 포도주를 먹이고,

젊은 레슬링 선수에게 목을 졸라 죽이게 했다.


음모자들은 콤모두스가 죽은 후,

 군사적으로나 행정적인 임무를 모두 훌륭하게 수행한 페르티낙스를 비어 있는 왕좌에 앉혔다.

페르티낙스는 마르쿠스 황제의 신하나 친구였던 사람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페르티낙스는 폭군의 학정으로 인해 생긴 상처들을 가능한 한도까지 치유했으며,

근면과 절약으로 탕진된 국고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일관된 선정으로 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지만,

그의 연륜과 경험에 어울리지 않게 다소 성급한 측면이 있었다.

그런 성급함이 그에게 반대하는 비열한 무리들을 규합시키는 작용을 했다.


이런 비열한 무리들은 공공의 혼란 속에서

오히려 개인의 이득을 챙기고 공평무사한 법보다는

폭군의 총애를 더 좋아하기 마련이었다.

 

온 국민이 기뻐하고 있지만,

콤모두스 황제 시절 특권을 누렸던 근위대는

새 황제의 엄격한 규율을 두려워했으며,

근위대장 라에투스는 음모를 꾸며 페르티낙스 황제가 로마를 비운 사이

명문 집안 출신의 젊은이를 황제로 앉히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 음모의 좌절은 근위대의 분노를 더욱 자극하여,

근위대 병사들이 황제를 급습하여

무수한 칼날을 맞고 페르티낙스 황제는 사망했다.

 


페르티낙스 황제를 극악무도하게 살해한 근위대는 로마 황제 자리를 공매에 부쳤다.

 

최고액을 제시한 입찰자에게 낙찰할 것을 선언하여

부유한 원로원 의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근위병 한 명당 200파운드를 제시하고 황제로 낙찰되었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권력이양은 원로원의 승인은 득하였지만,

페르티낙스 황제의 살해 소식을 듣고 군대를 소집한

판노니아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되었다.


세베루스는 판노니아에서 이탈리아까지 완전 무장을 하고 침식도 잊은 채 행군을 했다.

근위대에게 율리아누스가 제시한 200파운드의 2배인

400파운드를 제시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불행한 율리아누스는 황제 자리에 앉은 지 66일째 되는 날,

궁전 안에 있던 욕탕의 한 방으로 끌려가 참수당했다.

 

위대한 위치로 올라갈 때는 그 과정이 아무리 험하고 위험하다 해도

권력에 대한 야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감수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황제의 지위에 오른 다음에는 만족감이 지속될 수 없다.

이 우울한 진리가 세베루스 황제에게 그대로 적용되었다.


행운과 능력으로 그는 미천한 지위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그는 “모든 것이었지만 그 모든 것은 아무 가치가 없었다."


” 권력에 싫증이 난 세베루스 황제는 가문의 영광을 영속화하려는 욕망으로

두 아들 중, 권력승계를 원했지만,

카라칼라와 게타라는 두 아들은 서로를 증오했으며,

증오는 해를 거듭할수록 더 심해졌고

 세베루스 황제는 65세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두 형제가 동등하고 독립적인 권력으로 제국을 함께 통치하였지만,

서로의 불신하고 점점 도를 넘어

마침내 카라칼라는  암살자를 보내 동생을 살해했다.


동 서양을 불문하고 권력의 다툼의 결말은 항상 비극을 동반하며

상대가 형제이던, 친구이던, 부자간이던 동일한 결말을 초래한다.

 

그 후 서기 222년-235년 동안은 한순간도 악행이나 우행에 빠진 적이 없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통치로 로마는 13년 동안 행복과 평온을 누릴 수 있었다.

 


막시미누스 황제의 출현은 32년 전,

세베루스 황제의 동방원정에서 귀국 길에 이루어졌는데,

황제가 트라키아 속주에 머무는 동안

둘째 아들 게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군사 경기를 개최하였다.

 

이때 기골이 장대한 젊은이가 나타나 군대에서 가장 힘이 센 병사들과 시합하여

열여섯 명의 병사를 차례로 이겼는데

이 젊은이가 막시미누스로 아버지는 고트족이었고 어머니는 알라니족에 속했다.

막시미누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힘에 버금가는 용기도 보여주어,

세베루스 황제와 그의 아들 카라칼라 황제 시대에 백인대장까지 승진했다.


그는 두 황제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지만,

카라칼라 황제를 암살한 마크라누스 황제 하에서는 공직을 맡지 않았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여성적 구애도 거절했다.


그러나 막시미누스는 알렉산데르 황제의 총애에 충성심으로 보답했으며,

황제가 군대에 애정을 잃자,

군대를 부추겨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병사들의 신임을 등에 업은 막시미누스는 병사들이 알렉산데스 황제를 살해하고

그를 황제로 추대함으로써 야심을 현실로 이루었다.

황제의 자리에 앉은 그는 오직 칼의 힘으로 정권을 유지했으며,

귀족 출신이거나, 우아한 교양을 갖추었거나,

민간 통치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았다.


막시미누스 황제의 잔인성과 변덕스러움은 만족할 수 없는 탐욕으로 이어져

신전의 금과 은을 빼앗고 신과 영웅의 동상도 녹여

화폐로 주조하는 신성 모독적인 약탈로 발전했다.


막시미누스의 폭장과 원로원에 대한 증오는

원로원 내부에서 대항 세력을 키우는 원인을 제공했다.

 

원로원 가문 중에서도 가장 저명한 가문 출신인 고르다아누스 부자를 황제로 선출하여

막시미누스를 대신할 황제로 추대하지만,

군사적으로 허약한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전 국민의 호응은 얻었지만,

마우리타니아의 총독 카펠리아누스의 습격으로

전장에서 명예롭게 죽음을 맞이하면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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