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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Dec 02. 2021

로마제국 흥망사(2)

에드워드 기번

황제와 원로원의 갈등과 원한은 더욱 깊어져 

마침내 막시미누스는 군대를 끌고 로마로 진군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위급함을 인식한 원로원은 막시무스와 발비누스라는 2명을 

군사와 행정을 총괄하는 황제로 임명하여 막시미누스의 로마 공격에 대응하게 했다.


 아퀄레이아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던 막시미누스를 

근위대장 아눌누스와 총신들이 근위대의 칙령을 받아 

막사에서 살해했다.


 막시미누스의 권력은 

막시무스와 발비누스에게 옮겨졌다.

 

‘두 명의 유능한 지도자보다는 어리석은 한 명의 지도자 낮다’는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막시무스 황제는 발비누스 황제를 사치에 젖은 귀족이라 생각하며 경멸했고, 

발비누스 황제는 막시무스 황제를 근본도 모르는 군인 출신이라 무시했다. 


그들의 불화는 암암리에 묵인되었지만 

서로를 경멸하고 견제하여 근위대라는 공동의 적에 대한 조치를 마련하지 못했으며, 

마침내 근위대에서 그들을 난도질한 다음 대중의 모욕이나 동정을 받도록 거리에 방치했다.

 

근위대에 의해 두 황제가 피살됨으로써  

고르디아누스 3세가 단일 황제로 남게 되었지만, 

그가 신임하던 근위대장이 교묘한 책략으로 식량을 부족하게 만들어 병사들을 동요했다.


단일 황제가 된 고르다아누스 3세 마저 병사들에게 살해되고, 

교묘한 근위대장 필리푸스가 황제로 등극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의 주변국 가운데 세력을 넓힌, 

페르시아와 게르만족의 게르마니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북쪽의 고트족은 3차례나 로마와의 전쟁을 벌였다.


이러한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로마제국은 강한 면모를 보였지만, 

비극의 황제인 발레리아누스는 페르시아의 샤푸르 왕의 포로가 되어 

황제의 자주색 의복을 입은 채, 

페르시아 왕이 말에 올라탈 때면 발레리아누스의 등을 발판으로 삼았다.


 아버지가 적들에게 이러한 수모를 당하고 절망적인 포로 신세로 살다 죽었지만, 

그의 아들인 갈릴레우스는 

“나의 아버지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알고 있었다. 

그분이 용감하게 행동하셨으니 만족할 따름이다.”라는 말로 

로마 전역이 군주의 죽음을 슬퍼할 때, 

그의 아들은 비굴한 신하들의 아첨에 현실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비참했던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의 치세 하에서 로마 재국은 군인과 참주, 

야만족에 시달려 거의 붕괴 직전에 이르렀지만, 

클라우디우스, 아누렐리아누스, 프로푸스, 디오클레티아누스 같은 군주들이

 제국의 안팎에서 적들에게 승리를 거두어, 로마 세계를 위기에서 구했다.

 


서기 285년 아버지는 로마 원로원 의원의 노예 출신인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에게는 경험과 인간을 연구하면서 개발한 강인한 정신력, 

일을 처리하는 재치와 응용력, 

인색하지 않으면서도 검약하고 온화하면서도 엄격할 줄 아는 현명함, 

군인다운 솔직함으로 위장하여 김정을 억제하는 심오한 능력, 

목표를 추구하는 일관성, 

방법을 바꿀 줄 아는 융통성,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야심을 달성하고 정의와 공공의 이익이라는 그럴듯한 구실로 윤색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까지도 억제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그는 서기 286년 막시미아누스와 제휴하여 공동 통치자인 황제로 인정했으며, 

서기 292년에는 두 명의 부 황제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와 제휴하여, 

네 명의 군주가 광대한 로마제국 영토를 분할 통치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이러한 분할통치는 쉬운 조합이 아니었으나, 

두 명의 결혼한 부황제를 이혼시켜, 

두 황제의 딸들과 결혼시켜 인위적인 가족 관계를 만들었다. 


횡제 2명과 부 황제 2명이 권한을 나누어 광대한 로마제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두 명의 황제에게는 질투심이 없어야 했고, 

두 명의 부황제에게는 야심이 없어야 헸으며, 

네 명의 독자적인 군주들이 항상 전체적인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야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역할을 현명한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적절히 잘 해냄으로써 

권력의 주도권 싸움 없이 로마제국 통치가 37년간 이루어졌고, 

콘스탄티우스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가 한 사람의 권위 아래 통일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에 집중된 제국의 수도를 

그 당시 비잔티움이라 불리던 이스탄불로 옮기고 도시 이름을 

그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이라 칭하고, 

행정 및 종교제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날 때부터 정신뿐 아니라, 

신체 또한 최고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친밀한 대화가 오고 가는 사교생활을 즐겼고, 

피로를 모르는 정신력으로 끊임없는 독서와 사색에 몰두하는 장점을 가졌지만, 

일단 그의 치세가 끝나자마자 역대 로마 황제들 가운데 자장 큰 공적을 세운 황제라는 

명에는 단번에 실추되고 말았다.


정복을 통해 최고의 지위에 오른 다음 결국 잔인하고 방종한 황제로 전략하는 모습을 보이며, 

노년은 탐욕과 낭비라는 상호 적대적이며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악덕으로 더럽혀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큰 아들 크리스푸스는 

아버지와 같이 전쟁에서 많은 공적을 쌓고, 

존경을 받았으며, 

실제로 궁정과 군대 그리고 국민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았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들의 위협적인 인기에 주목하게 되고 

자신과 대등한 자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반역적 행위를 처단할 것을  선언한 후, 

미끼에 걸려던 그의 아들과 친구들을 순식간에 처형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치세 가운데 그의 종교적인 측면은 역사의 큰 획을 그은 사건으로 기억되는데, 

그는 당시 세력을 넓히고 있던 그리스트교로 개종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대한 치세 30주년 기념 축전 이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사망 후, 

유언에 따라 장례문제는 둘째 아들인 콘스탄티우스에게 일임되었는데 

황제의 유언장에 동생이 자신을 독살한 것 같다는 의혹을 표명하면서 

아들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또한 범죄자를 처벌하여 안전을 도모하라는 충고가 들어 있었다.


무시무시한 피의 학살로 두 명의 숙부, 

일곱 명의 사촌, 권력과 재산으로 제위를 노리던 총독 등,

끔찍한 살생이 뒤따랐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권력은 그의 세 아들이 나누어 통치하게 되었다. 

그 당시 콘스탄티누스 2세는 스무한 살, 

콘스탄티우스가 스무 살, 

콘스탄스가 열여덟 살이었다.


하지만, 형제간의 세력 다툼으로 

콘스탄티누스 2세는 젊은 나이에 수행원과 함께 살해당하고,

콘스탄스마저 운명을 달리하므로 로마제국의 운명은 콘스탄티우스에게 집중되었다.

 

혼자의 힘으로 넓은 제국의 통치가 어렵다는 사실을 직시한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두 명의 사촌을 부 황제라는 칭호로 권력을 나누어 주지만, 

율리아누스가 군대와 백성들의 인기가 날로 상승하자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껴 군의 세력을 약화시킬 전략을 구사했다. 


하지만, 율리아누스의 군대는 황제의 명령에 불복하고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여 로마는 내전의 위기에 직면했지만,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사망함으로써 모든 권력은 율리아누스 황제에게로 넘어갔다.

 

어릴 때부터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던 율리아누스는 황제의 역할을 

절제와 검소한 철학자적인 사고로 수행해 나가지만, 

오랜 숙적인 페르시아 침공을 감행하여 전쟁에 직접 진두지휘하던 도중 

페르시아 군이 던진 창에 맞아 황제에 오른 지 

1년 8개월째인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마지막 혈통인 율리아누스사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후 80년 만에 후계자 없는 

혼란스럽고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면서 아직 친위대 부대장에 불과한 요비아누스를 

황제에 자리에 앉히게 되었다.

 

동, 서 로마 제국은 집권하는 황제들의 관계와 그들이 처한 정치적, 대내외 상황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가지면서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불신과 반목으로 갈등을 빗기도 했다.


로마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서로마 제국은 

4세기부터 시작되는 외부 세력의 침략으로 국력이 약화되면서 

서로마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테오도시우스의 아들과 손자들이 미성년이었던 때, 

제국은 가장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 무능한 군주들은 성년에 이르러서도 교회는 주교에게, 

나라는 환관에게, 

속주는 야만인에게 계속 내맡겨 두고 

자신들의 쾌락과 어리석은 정치로 백성들을 나락에 빠지게 하는 누를 범했다.


<로마제국 흥망사>는 복잡하고 어려운 고대 역사를 알기 쉽게 잘 정리해 놓았다.

그리고 권력 앞에 약해지고 추해지는 인간의 욕망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창 시절 나에게는 특별히 좋아하는 과목은 없었지만, 

수학이나 물리학이 다른 과목에 비해 흥미가 있었다.


그 당시 역사는 국사와 세계사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국사도 어렵고 재미없는 과목이었지만,

세계사는 지겹고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듣기 힘들었다. 


나에게는 역사를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졌지만

세계사 담당 선생님은 다른 과목 전공으로 학교 내에 세계사 전공자가 없어

궁여지책으로 세계사 과목을 학생에게 가리켰다. 


세계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님이 가르치다 보니

그 시간은 지루하고 답답했으며

나쁜 기억으로 남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연히 접한

일본 대하소설 <대망>을 읽으면서 야마오카 소하치라는 작가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

직장생활 기간 동안 4번을 읽은 이 소설은 한 번도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밤새워 재미있게 읽었고 더불어 세상을 사는 지혜를 주었다. 


이후 역사소설은 쉽게 선택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2년 전, 사마광이라는 특출한 역사 소설가를 만났다.

<자치통감>은 그전에 즐겨 읽었던 삼국지와 초한자와는 

 다른 시각으로 중국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고

그동안 우습게 여겼던 중국 역사에 대한 나의 시각을 돌려놓았다. 


에드워드 기번은 영국인으로 <로마제국 흥망사>라는 걸출한 역사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고 나 자신의 학장 시절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역사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인식했다.


좋은 역사책은 시간이 날수록 

가치를 더하고 

사람 사는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나를 깨우쳐 준 것은 학창 시절 스승이 아니라 

우연히 마주친 훌륭한 역사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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