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보관의 정석

by 산내

와인을 어떻게 보관할 것인가는 꽤 중요한 문제다.

와인은 숙성됐을 때 풍미가 향상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식품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셀 수 없이 많은 품종과 다채로운 스타일로 만들어지다 보니 저마다 '숙성 잠재력'이 달라서 장기 숙성에 적합하지 않아 빠르게 마셔버려야 하는 와인도 있고, 아직 마시기에 너무 일러서 오래 숙성시켜야 하는 와인도 있다.

전체 시장에서 보면 장기 숙성에 적합한 와인들이 더 드물고 가격이 비싼 편이다.

분명한 것은 아직 마시기 이른, 그래서 '어린 와인'이라고 "불리는 와인들은 올바른 환경에서 잘 숙성하면 어릴 때는 표현되지 않았던 풍부하고 복합적인 향과 맛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만약 장기 보관에 적합한 와인을 구매했거나 선물 받았다면 이 와인을 어떻게 보관해야 할까?

물론 가장 쉬운 방법은 와인 전용 냉장고(와인 셀러)에 넣어두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전용 냉장고가 없다고 가정하고 와인보관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에 대해 알아보자.

온도

온도는 와인보관에 있어서 가장 신경 써야 하는 요소다.
포인트는 적당히 서늘한 12-15℃에서 일정하게 보관하는 것이다.
이 수치는 인류가 오랜 시간 몸소 체득한 온도다.

와인을 기원전부터 만들어 온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는 와인을 지하에서 보관하면 시간이 지나도 와인의 맛이 변하지 않거나 간혹 좋아지는 걸 발견했는데 이 온도가 12~15℃다.

열은 병 안 와인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분자의 활동 속도를 빠르게 만든다.

분자들은 서로 충돌하면서 에너지를 만들고, 그 에너지가 다른 분자들과 반응한다.
그래서 장시간 높은 온도에서 보관된 와인은 변질된다.
예를 들어 불볕더위가 이어진 여름에 30-40℃를 오가는 실온에서 와인을 장기간 보관했다면 병 안의 화학반응이 세 배가량 빨라지는데, 이런 와인을 맛보면 대개 푹 익은 듯한 맛을 낸다.
이를 '끓었다' 혹은 '열화 되었다'라고 표현한다.

반대로 너무 낮은 온도는 어떨까?

이 경우 와인이 얼 정도의 온도만 아니라면 큰 문제는 없다.
냉장고의 온도가 낮으면 낮을수록 식품의 신선도가 연장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다만 얼어버린 채소를 되돌릴 수 없듯이 한 번 열었던 와인은 본래의 캐릭터를 조금씩 잃게 마련이다.

물론 열화 된 와인보다는 얻었던 와인이 훨씬 더 마실 만하다.

그렇다면 모든 와인을 똑같이 12-15℃에서 보관해야 할까?

화이트 와인이나 스파클링 와인은 레드 와인보다 조금 낮은 온도에서 보관하는 것이 좋다. 그 이유는 스파클링과 화이트 와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신선한 과실향과 맛, 산도가 낮은 온도에서 잘 유지되기 때문이다.


온도 관리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높은 온도가 병 내부의 공기를 팽창시키기 때문이다. 병 내부의 공기 팽창은 와인을 막고 있는 코르크를 밀려 나오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온도 변화가 잦은 곳에서 와인을 보관하면 공기가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면서 코르크가 마치 천천히 펌프질을 하듯 밀려 나오게 된다. 코르크가 밀려 나오면 완전히 막혀 있을 때보다 많은 공기가 유입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는 와인의 산화로 이어질 수 있다.

와인을 사러 가서 간혹 와인병의 코르크가 살짝 밀려 나온 와인을 볼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와인이 고온에서 오랜 시간 보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와인에게 빛은 온도만큼 중요하다.
와인에 직접 내리쬐는 햇빛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햇빛이 와인병을 투과해 내용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고 학자들이 밝혀낸 것은 강한 햇빛을 받은 와인은 산화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상식은 와인병의 색에 따라 햇빛의 투과율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투명한 병이 가장 높은 투과율을 보이고, 짙은 색일수록 투과율이 낮다.
병의 색 때문에 걱정이라면 와인병을 다 진하게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와인병의 색이 마케팅 요소로 활용되는 경우도 많기에 쉽지 않은 이야기다. 예를 들어 로제 와인은 병 안에 든 아름다운 장밋빛 와인이 판매에 큰 영향을 미치고, 스파클링 와인 또한 와인병의 자태와 황금빛 와인이 병을 집어 들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습도

습도는 와인의 보관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여겨져 왔지만 온도나 빛과 비교하면 치명적이지 않다.
물론 와인을 나무통에서 숙성하고 보관하는 와이너리에서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또한 유리병이 대중화되기 전 나무통에 담긴 와인을 거래하고 서빙했던 시대에는 습도가 중요했다.

하지만 이제는 외부의 습도가 내부에 영향을 줄 수 없는 유리병에 와인이 보관되다 보니 크게 신경 써야 할 요소가 아니다.

와인 보관에 있어서 유일하게 습도를 고려해야 하는 경우는 건조한 상태에서 천연 코르크로 밀봉된 와인을 장기간 보관하는 것이다.

이 경우 나무가 마르듯 코르크가 마르게 되고, 심한 경우 수축한다.

마른 코르크는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코르크를 뺄 때 부러지기 매우 쉽다는 점과 산소가 유입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습기 제거 기능이 있는 냉장고에서 와인을 장기간 보관할 때 발생할 수 있다.

진동

진동은 와인 보관의 4대 요소 중 하나로 계속 언급되어 왔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와인 연구 분야에서 수많은 업적을 쌓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UC DAVIS의 연구에서도 파괴적인 수준의 진동이 아닌 이상 진동은 와인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못 박았다.

물론 와인을 빈번하게 이동시켜서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진동이 생기면 와인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미세입자들이 가라앉지 못하고 침전물이 흩어져 혼탁한 와인은 와인 맛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와인을 마시기 전에 안정을 취해주면 해결할 수 있고, 침전물이 꼭 나쁜 맛을 내는 것도 아니다.
그 맛을 즐기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그리고 이동에서 중요한 건 와인을 흔드는 행위라기보다 그 과정에서 형성될 수 있는 온도 변화나 햇빛 노출이라는 환경이다.
그러므로 와인을 장기 보관할 때 온도, 햇빛, 습도는 적절히 조절하되 진동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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