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구천이 네 아비를 죽인 것을 잊을 수 있겠느냐?"

by 산내

춘추시대 중원을 장악한 진나라는 남쪽에서 세력을 키워 자신들을 위협하는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오나라를 키웠다.

춘추말기 오나라가 성장을 거듭하자 초나라는 위기감을 느껴 월나라를 지원해 오나라 후방을 노리게 했다.


이렇게 초나라의 지원을 받던 월나라에 새로 등극한 군주는 구천이었다.

그는 춘추 말기를 장식한 인물들 중 가장 극적인 삶을 산 사람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오나라 합려가 월나라를 치려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구천은 전당강을 건너 취리에 진을 쳤다.

오나라 왕이 보기에 오랑캐 땅의 신출내기 월나라가 오나라의 군대를 막아서는 것이 처음에는 가소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곧 이 신출내기의 담력이 흡사 자신을 빼닮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구천이 보니 오나라 군의 진영은 견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죽음을 불사하는 용사들을 두 차례나 내보냈지만 두 번 다 포로가 되었다.

그러자 그는 한때 합려가 오나라를 치러 나온 초나라 연합군을 공격했을 때 썼던 방법을 그대로 모방했다.


월나라 군 진영에서 세열을 지은 장정들이 나오더니 괴이한 소리로 외쳐댔다.

"두 군주께서 군대를 다스리는 마당에 저희들이 군기와 전고 앞에 죄를 지어 행군에 누를 끼쳤습니다.
감히 형을 피하지 못하고 기꺼이 죽겠습니다."

그러고는 전열에 섰던 사람들이 나와서는 스스로 목을 베었다.

그 후열이 나와서 똑같이 목을 베고, 마지막 열까지 그렇게 자진했다.
오나라 군은 그 진저리 나는 행동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때 구천의 본진이 갑자기 들이치자 순식간에 오나라 군의 전열이 흩어졌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월나라의 영고부가 합려에게 달려들어 과를 내리쳤다.
합려는 발을 다치면서 신 한쪽을 잃었다.

오나라 군은 황급히 퇴군하여 진지를 다시 구축했으나, 합려는 이 상처로 인해 진중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초나라를 제압하며 중원에 무명을 떨쳤던 풍운아의 최후는 그렇듯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합려는 임종을 앞두고 태자 부차에게 다짐을 두었다.


"너는 구천이 네 아비를 죽인 것을 잊을 수 있겠느냐?"

"감히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합려는 죽을 때 다시 다짐을 두었다.

"절대로 월나라가 우리의 원수임을 잊지 마라."

이리하여 일세의 영웅 합려는 가고 태자 부차가 왕이 되었다.

왕이 된 부차는 복수의 칼을 갈았다.
궁실의 문에 시종을 세워놓고 그가 드나들 때마다 이렇게 외치게 했다.


'부차야, 구천이 네 아비를 죽인 것을 잊었느냐?"

그러면 부치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어찌 감히 잊겠습니까."

부치는 아비 못지않은 싸움꾼이었다.


부차가 오자서를 참모로 월나라를 침공하니 월나라는 속수무책으로 밀려 수도 회계마저 안전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구천은 대부 문종이 강화 사절로 파견되었다.

문종은 오나라 군 진영으로 가서 청했다.

" 저희 군주의 군대로는 군왕의 군대를 욕보일 능력도 없습니다.

금옥과 자녀를 보내 군주께서 욕되이 왕림하심을 위로하나니, 구천의 딸은 군왕께 시집보내고 대부의 딸은 귀국 대부께 보내고 사의 딸은 사에게 보내고자 합니다.

또한 월나라의 보기는 모두 딸려 보내고, 저희 군주가 나라의 군중을 데리고 군왕의 군대를 따라 배웅할 것이니 군왕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십시오."

이름하여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부차는 이 제안을 들으려고 했다.

그러나 오자서는 강경했다.

"불가합니다. 대저 우리 오나라와 저들 월나라는 서로 원수로 싸울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오나라가 살면 월나라가 죽을 것이요 월나라가 살면 오나라는 죽게 되어 있으니, 장차 이런 형세는 바꿀 수가 없습니다.

군주께서는 반드시 월을 멸망시키소서. 이 기회를 버리면 후회해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오자서는 월나라의 강화 요청을 물리쳤다.

이제 더는 방법이 없는 듯했다.
방법이 없다면 싸울 용기는 있는 구천이었다.

그러나 문종은 이번 행차에서 오나라의 약점을 파악하고 돌아왔다.
오나라 태재 백비는 재능이 뛰어나나 물욕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문종이 구천에게 말했다.

"오나라 태재 백비는 탐욕스럽다 합니다. 뇌물을 써서 그를 회유해 보시지요."

구천은 이 말을 따랐다.

그리하여 아름답게 꾸민 여덟 명의 여인을 백비에게 보내며 말을 넣었다.

"어른께서 실로 저희 월나라의 죄를 사해주신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들이 또 있습니다."

그러고는 훨씬 좋은 강화 조건을 제시했다.

아예 나라의 재산을 다 넘기고 구천 자신이 인질로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제목을 입력해주세요. (1).png


뇌물을 먹은 백비가 부차에게 유세했다.

"저 비가 듣기로, 옛날에 다른 나라를 정벌할 때는 항복을 받으면 그뿐이었습니다.
지금 항복을 받았는데 또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부차는 오자서가 강력히 반대함에도 이 요청을 들어주었다.

구천은 이렇게 기사회생했다.

하지만 약속대로 오나라로 가야 했다.
떠나기 전 그는 국인들을 모아놓고 참회했다.

"과인이 제 힘이 부족한 것도 알지 못하고 또 큰 나라와 원수를 맺어 백성의 뼈를 들판에 버려두게 되었으니 이는 과인의 잘못입니다.
과인이 잘못을 고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죽은 이들을 묻어주고, 다친 이들을 찾아보고, 살아남은 이들은 북돋우고, 근심이 있는 집에 찾아가 슬퍼하고, 경사가 있는 집에 가서 축하해 주고, 가는 이는 전송하고 오는 이는 환영하며, 백성들의 미움을 받는 자는 제거하고, 백성들의 부족한 것은 보충해 주었다.


그리고 떠날 시간이 되자 범려를 불렀다.

"범려는 나를 위해 본국을 지켜주오"

범려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우리 국토 안에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에서는 저 려(범려)가 중(문종)만 못합니다.
국토 밖에서 적국을 제어하고 때에 맞추어 결단을 내리는 일은 중이 또한 저보다 못합니다."

구천은 이를 허락했다.

그래서 구천은 범려와 관리 300명을 이끌고 오나라로 들어가 스스로 부차의 수레를 끄는 말의 고삐를 잡았다.

하지만 구천은 부차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이었다.

후일을 기약하고 이런 모욕을 다 받아들였으니, 이제 그는 어떤 복안을 들고 나올 것인가?

산내로고.pn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손무(손자)에게 군사를 맡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