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 정국에서 다시 한 해가 다 가는 중이었다.
한신이 제를 격파해야 삼면에서 초를 누를 수 있지만 한신은 여전히 평원주 나루를 건너지 못했다.
유방은 낙양 일대로 물러나 방어하고 있었지만 향방을 가늠할 수 없었다.
어떻게 초를 막을까 고심하던 차에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 문제 해결을 자처하는 사나이 역이기가 나타났다.
장량의 지모와 한신의 적극성을 모두 갖춘 그는 유방 진영에서 칼을 들지 않은 전사였다.
역이기가 제안했다.
역이기는 한신의 소식을 기다릴 것도 없이 자신이 동방의 일을 정리하겠다고 나섰다.
"방금 연과 조를 평정했으나 유독 제가 항복하지 않습니다.
신이 명을 받들고 가서 제왕을 우리 한의 동쪽 번신이 되도록 설득하고자 합니다."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나쁘지 않다. 유방이 허락했다.
"좋소."
이리하여 한은 다시 작전을 개시했고 동시에 역이기는 제왕 전광을 만나러 동쪽으로 떠났다.
역이기는 유방과 항우의 사람됨을 비교한다.
"유방은 성을 항복시키면 바로 그 장수를 후로 봉하고 재물을 얻으면 사졸들과 나누어 천하와 이익을 함께 하니 영웅호걸과 현인재사가 모두 기꺼이 그를 위해 일합니다.
지금 제후의 군대가 사방에서 몰려들고 촉한의 곡식이 배에 실려 내려옵니다.
반면 항우는 약속을 배신한 악명과 의제를 시해한 책임을 지고 있는 데다, 남이 공이 있으면 기억하지 않으면서 죄가 있으면 잊지 않습니다.
전투에서 이겨도 상을 주지 않고 성을 뽑아도 그를 봉해주지 않고 항씨가 아니면 들여 쓰지 않습니다.
또한 성을 공격해 재물을 얻으면 쌓아두고도 주지 못하니 천하가 그를 등지고 현인과 재사가 원망하며 그를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역이기는 이어 한신이 북방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이야기하고 천하의 형세가 정해졌음을 강조했다.
"지금 한 왕께서는 이미 오창의 곡식을 차지하시고 성고의 요새를 막고 백마진을 지키고 있으며, 태행의 험로를 막고 비호의 입구를 차단했습니다.
하오니 천하에서 늦게 복종하는 이가 먼저 망할 것입니다.
지금 왕께서 먼저 달려가 한 왕에게 항복하시면 제나라의 사직은 보존할 수 있을 것이나 항복하지 않으시면 망할 날을 선채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전광이 드디어 설득되었다.
"좋습니다. 선생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전광은 한으로 마음을 정하고 역이기와 날마다 즐기며 마셨다.
그럼 막 제를 공격하려고 준비하던 한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한신은 인간적으로는 순진한 사람이다.
그는 군대를 멈추려고 했다.
그러나 그 옆에는 괴철이라는 희대의 책사가 붙어서 욕망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괴철이 한신에게 말했다.
"장군은 제를 치라는 조서를 받았습니다.
한이 무단으로 밀사를 보내 제를 항복시키면서 장군께 군대를 멈추라는 조서를 내렸답니까?
한데 어찌 군대를 멈추시렵니까?
역생(역이기)은 한갓 선비에 불과한데 수레 위에서 세치 혀를 움직여 제나라 70여 성을 항복시켰습니다.
장군은 수만의 무리를 이끌고 한 해 남짓하여 겨우 조나라 50을 항복시켰습니다.
장군이 된 지 여러 해인데 그에 유생 하나만 한 공도 이루지 못했단 말입니까?"
한신은 괴철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한신도 사람이니 욕심이 있었을 것이다.
한신은 괴철을 말을 듣고 공격을 그만두라는 명령이 없었다는 핑계를 대며 그대로 진격했다.
제는 이미 항복했다고 생각해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
한신은 역하를 습격해 점령하고 곧장 임치에 닿았다.
제왕 전광이 속았다고 생각해 역이기를 불렀다.
"네가 한군을 멈출 수 있다면 그대를 살려주겠다.
그러지 못하면 내 너를 삶아 죽이겠다."
허나 역이기는 되받았다.
"대사를 도모하는 이는 자질구레한 근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큰 덕은 사양치레를 돌아보지 않소.
공은 내게 다시 그런 말을 하지 마소.”
자신의 할 일은 끝났으니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전광은 결국 역이기를 삶아 죽이고 고밀로 후퇴하며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한신은 고밀로 군대를 진격시켰고 초는 용장 용저를 보내 제를 구원하게 했다.
용저는 영포를 격파한 적이 있는 용장으로 초장 가운데 그 명성이 최고였다.
이리하여 유수를 사이에 두고 한신은 용저와 대적했다.
그러나 지금의 한신은 용저가 알던 말단 군관 한신이 아니었다.
용저는 한신의 진면목을 몰랐지만 한신은 용저가 자신을 깔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한밤중에 자루를 그러모아 유수의 상류를 막았다.
날이 밝자 강을 건너 초군을 공격하다 초군이 공격하니 한군은 이내 달아났다.
"내 본시 한신이 겁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용저가 옳거니 기뻐하며 진격을 명했다.
그러나 초군이 한참 강을 건널 때 한군이 상류의 둑을 틔우니 물이 늘어났다.
이때 한신이 반격해 왔다.
초군은 우왕좌왕하며 힘도 쓰지 못하고 달아났다.
이 싸움에서 용저는 죽고 전광은 달아났다.
용저를 꺾음으로써 한신은 초한쟁패 시기 최고의 명장으로 떠올라 항우와 비견되었다.
한신이 제를 격파함으로써 유방은 변수 하나를 줄였다.
지금까지 제나라 전 씨는 믿을 수 없었지만 한신이라면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역이기의 억울한 죽음과 항복한 후 다시 전쟁으로 내몰린 제나라 장정들의 애꿎은 희생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한신은 이번 행동으로 불신의 씨앗을 심었다.
유방은 결과에 만족했지만 역이기의 희생을 잊지 않는 동시에 한신에게 복잡한 마음을 품었다.
'한신이 통제 범위를 벗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