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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Dec 15. 2021

100년의 기록(3)

문명의 충돌

<문명의 충돌>

아시아의 고대 문명들, 

특히 중국과 인도의 문명은 찬란하고 창의적이었으며 

인류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이들 문명은 배타적이지 않았고 자신들의 시각이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이들의 종교 체계는 때로 상당히 영향력이 컸으나 

대부분 간접적이고 상당히 절제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기독교와 이슬람은 다르다. 
 두 종교는 역사적 배경이 유사하지만 주관적인 사명이 있기 때문에 충돌이 불가피하다.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오랫동안 서로 공격하고 영토를 침범했다. 
 

처음에 이러한 충돌은 상호 간 차이보다는 유사성에서 비롯됐다. 


기독교 사회에서는 두 종류의 권위가 받아들여졌다. 
 서로 다른 사안을 관장하는 것으로 하느님과 카이사르, 

즉 교회와 국가 혹은 종교적 사안과 세속적 사안이다. 


 이 두 권위는 때로는 결부되고, 

때로는 분리되고, 

때로는 조화를 이루고, 

때로는 갈등을 보내고, 

때로는 한쪽이 지배하고, 

때로는 한쪽이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항상 두 권위는 존재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기독교와 달리 하나의 권위만 존재했다. 
 

무함마드는 최고의 권력자가 되어 

군대를 통솔하고, 전쟁과 평화를 결정하고, 세금을 거두고, 재판을 담당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모든 종류의 통치권을 행사했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그가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이상적인 국가와 통치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슬람의 역사에서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군위가 하나라는 것이다. 

이는 현재 모든 지역의 무슬림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동의 인식체계다. 


 하지만 종교와 정치의 결합이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테러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이슬람의 교리, 전통, 법은 이슬람의 이름으로 테러를 감행하는 사람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슬람법은 무차별적인 민간인 살해 혹은 협박을 위한 인질 납치와 같은 행위를 

명시적으로 금지한다. 



 1979
년 중동에서 큰 정치변동이 발생했는데, 

바로 이란 혁명이었다. 
 이란 혁명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반미감정이 등장해 확산된 것은 

사실 미국의 특정 정책이나 행위의 결과가 아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슬람의 역사적 경쟁자이자 적인,

 기독교 세계의 주도적 세력으로 부상했다는 것이 반미감정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1998년 2월 23일 런던에서 발행되는 한 아랍어 신문은 

오사마 빈 라덴이 직접 서명해 팩스로 보낸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한 지하드를 위한 국제 이슬람전선 선언문’을 게재했다.


 선언문에 따르면 사우디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은 

십자군 기독교 세력에 대해 더 강력한 반감을 표출했다. 
 십자군의 주도 세력이 미국이라는 점도 분명히 지적했다.


이슬람 세계의 사건과 담론을 면밀히 분석해온 학자로서 

9.11 테러 공격은 이슬람 과격 무장단체의 시각에서 

이는 무슬림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향하는 길의 첫 단계가 완성된 것일 뿐이다.
 불신자들과 그들의 군대를 이슬람 땅에서 축출하는 것이다. 
 그다음과 마지막 단계는 적의 영토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다. 


 세계의 지배권을 놓고 진정한 신자들과 불신자들 간에 최종 전투를 시작해 

이슬람의 대의가 궁극적으로 승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9.11 테러 공격 직후 

내 책 <무엇이 잘못되었나: 서구와 중동, 그 화합과 충돌의 역사>와 

이어 또 다른 책 <이슬람의 위기: 성전과 불경한 테러> 

두 권의 책이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는 전무후무한 경험을 했다. 

오사마 빈 라덴 덕분에 아주 유명해졌다. 


<애넌버그 연구소>

일흔 살을 맞아 정년이 된 1986년 

나는 프린스턴 대학교와 고등 학술 연구소 두 기관의 직책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났다.

 몇몇 제안이 있었다. 
 그런데 필라델피아에 있는 애넌버그 유대 및 근동학 연구소가 색다른 제안을 했다. 

연구소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이곳은 신생 연구소였다. 
 나는 제안을 수락했고 설립자 월터 애넌버그를 종종 만났다. 

또 그가 임명한 이사회와도 여러 차례 회동을 가졌다


새로운 연구소의 활동은 연구와 출판에만 집중됐다. 
 일반적인 의미의 학생도 없고 학위도 주지 않았다. 
 소규모 정식 교수진과 매년 승인된 연구를 수행할 기회를 얻은 객원 연구자들만 있었다. 


애넌버그는 오만하고 독단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모든 사안에서 심지어 자기가 전혀 모르는 분야에서도 

당연히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고 실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자신이 몸 담은 비즈니스 세계에서 애넌버그는 

즉각적이고 완벽한 동의와 복종에 익숙해 있었다. 
 사업 외 분야에서도 그는 이런 방식을 기대했다.


1990년 나는 연구소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내 사의는 신속히 처리되었다. 
 결국 연구소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귀속되었고 이로써 나와의 인연은 4년으로 끝났다.

 


분치와 나는 1989년 필리델피아 외교위원회의 연회에서 만났다. 
 우리는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내 사무실이 그녀 사무실 바로 옆 모퉁이에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우리는 두 달에 한 번 정도 점심을 같이 했다. 
 관심사가 비슷했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구가 됐다.


 그녀의 남편이 1994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후 우리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가끔 우리는 결혼에 대해 논의했지만, 

그녀에게는 필리델피아의 삶이, 

나에게는 프린스턴에서의 삶이 있었다. 


 우리는 주말을 함께 보내고 여행을 다니곤 한다. 

이렇게 우리는 현재 상태를 유지한다.

 

<정치와 이라크 전쟁>

이라크와 이란의 8년 전쟁(1980-1988) 동안, 

사담 후세인은 미국의 우호적인 입장과 때로는 상당한 지원에 의존할 수 있었다. 


 종전이 되면서 사담 후세인은 그가 이후 어떤 행보를 보이더라도 

미국의 지원, 혹은 묵인을 얻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다음 행보는 쿠웨이트를 침공해 합병하는 것이었다. 
 사담 후세인에 따르면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한 부분이었고 

다시 모국으로 돌아와야 할 영토였다. 


 부시 행정부는 우선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도록 데드라인을 결정했다. 

데드라인이 지나자 군대를 보내 무력으로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미국 정부는 목적을 달성한 후 전쟁을 끝내고 말았다. 
 그리고 사담 후세인은 그대로 통치자로 남았다. 


사담 후세인 독재정권에 관용을 베푼 것은 재앙이었고, 

중동 전반에 악영향을 주었다. 


 그 당시 이라크 내부의 뜻을 반영한 임시정부가 이라크 땅에서 설립되고 선포되었다면 

사담 후세인과 두 번째 전쟁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서구의 시각은 달라져야 한다.
 ‘그들은 고대에 있었던 위대한 문명의 후손이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중동 사회에는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에 근거해 제한적이라도 합의에 의한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여러 요소가 존재한다.'
 

이런 시각이 종종 제국주의적 음모라고 비난받는다. 
 그러나 이런 시각이 중동 지역 국민들이 가진 바람과 야망을 훨씬 더 존중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우리가 제시한 해결안이 중동에서 신뢰받지 못한다는 점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의 정치와 외교는 중동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미래의 선택권을 맡기는 지혜가 필요하다.

 


버나드 루이스는 95세에 독자들에 대한 감사의 글은 책 뒤 편에 실었다. 

100년이란 긴 세월을 역사학자로 살아왔으며 

중동 전문가로 살아온 노학자의 끈기와 집념에 경의를 표한다. 


 유대인으로 2차 대전을 겪어야 했고, 

이혼과 새로운 연인과의 만남은 중동 역사만큼 

그의 삶이 드라마틱하고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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