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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Dec 16. 2021

아라비아의 로렌스(1)

1차 세계대전 발발과 중동 정세

1918년 10월 30일 아침,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대령은 버킹엄 궁전으로 들어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영국 국왕을 알현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국왕에게 상을 받을 때 이용되는 나지막한 의자에 그가 무릎을 꿇으면,

국왕은 수백 년 전통의 근엄한 예식을 통해 로렌스를 대영제국의 기사로 임명할 참이었다.


그러나 로렌스는 왕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대신 예식을 진행하는 도중에 국왕에게 영광을 거두어 달라고 조용히 아뢰었다.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시간이 잠시 흘렀다.

900년 넘는 역사를 통틀어 기사 작위 사양이라는 극히 드문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 비슷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예비해둔 의례 자체도 없었다.


 조지 5세는 메달을 어정쩡하게 들고 있다가

결국 시종관이 받치고 있던 쟁반에 도로 내려놓아야 했다.
 로렌스는 격노한 왕비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궁전을 나왔다.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

수천 년 동안 동양은 정복, 탐험, 착취의 대상으로서 서양을 끌어당겼다.

 중세에는 기독교 십자군이 근동지역에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1790년에는 나폴레옹이 파라오가 되겠다는 환상을 품고 이집트를 침략하였다.
 1930년대에는 유럽 최고의 고고학자들이,

1870년대에는 석유재벌과 투기꾼들이 카스피 해 주변으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20세기 벽두, 서로 다른 듯하지만 비슷한 이유로

영국의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미국의 윌리엄 예일,

독일의 쿠르트 프뤼퍼,

루마니아에서 망명한 아론 아론손이라는

네 사내가 중동 땅에 발을 딛고 있었다.

 


로렌스의 아버지 채프먼은 이름난 영국계 아일랜드인으로 막대한 토지를 가진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다른 영국계 아일랜드 집안의 여성과 결혼하였으나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입주한 24세의 스코틀랜드 세라를 사랑하면서 결혼생활이 무너졌다.


 1888년 중반 채프먼은 가정과 가족을 버리고 세라와 함께 아일랜드를 떠나

웨일스 북부의 작은 마을로 가서,

세라 모친의 처녀 시절 이름인 로렌스를 가져다 새 이름으로 삼았다.

 그해 8월 세라가 낳은 둘째 아들이 바로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였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로렌스는

1907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했다.


 1908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무려 3,860킬로미터를 자전거로 달려

프랑스 전역의 중요 건축물을 답사하는 여행을 했다.

 


뉴잉글랜드를 터전으로 하는 예일 가문이 미국 땅을 처음 밟은 시기는

1600년대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귀족 혈통의 예일 집안은 250년 동안 해양 무역과 제조업에 종사하면서

신대륙의 부를 차곡차곡 축적했다.


윌리엄 예일은 1887년 기업가이자 월가 투자자였던 윌리엄 헨리 예일의

셋째 아들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던 중 그의 아버지는 1907년 10월 월가를 덮친 공항으로

막대한 재산을 하루아침에 날렸다.
 한순간 특권층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충격에 혼란스러웠지만

그 충격은 곧 어떤 해방감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꿈꾸던 모험가의 삶을 펼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뉴욕에 본사를 둔 스탠더드 오일사에 입사했다.


 

베를린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쿠르트 프뤄퍼는

어린 시절 결핵, 신장병, 디프테리아 등 온갖 병치레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눌한 말투에 가려진 놀라운 재능이 있었다.
 아무리 생소한 언어라도 몇 달만 배우면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소질을 지녔던 것이다.
 프랑스어와 영어를 중학교 때 마스터한 후,

베를린 대학에 입학해서는 아랍어와 터키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1906년 겨울 프뤼퍼는 베를린에서 음악을 공부하던

미국 여성을 만나 결혼하고 공부를 계속해서 좋은 일자리를 구하려면 이집트로 이주해야 한다고

신부를 설득하여 1907년 이집트 주재 독일 대사관 신입 직원이 되었다.

 


1911년 2월 로렌스는 데이비드 호가스의 고고학 탐험대에 합류하여

발굴 팀 조수로 공식적인 직함을 받았다.
 그는 시리아 지역 발굴 현장에 상주하면서 200명이 넘는 현지 인원을 감독하는 두 서양인 중 한 명으로

공사판 십장과 같은 임무를 맡았다.


 이곳에서 로렌스는 자신에게 리더로서 재능과,

동양 문화의 작동 방식을 거의 본능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랍어 구사력은 이미 현지인 수준에 도달했으며,

카르케미시에서 쉬지 않고 일한 덕분에 전문 지식도 깊이를 더했다.
 로렌스는 시리아 북부의 이 구석진 지역과 주민들에 대해

그 어떤 유럽인보다 정통한 사람이 되었다.


1914년 봄 영국 박물관의 발굴 지원금이 바닥을 드러나 작업이 중단될 시점

로렌스와 그의 동료는 영국 공병대가 팔레스타인 최남단에서 진행 중이던

진 사막 일대에 유적지 조사팀에 합류했다.

 


1913년 5월까지 아론 아론손은 일부 유대인 사회에 퍼지기 시작한 대의명분,

즉 시온주의를 가장 설득력 있게 대변해온 사람이었다.


 그는 1876년 루마니아 중부 작은 마을에서 유대인 곡물상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882년 아론손이 여섯 살 되던 해,

루마니아 출신 유대인 250여 명과 함께 배를 타고

오스만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했다.


 그 후 아론손은 농학자로 유명해졌고,

1906년 전 세계 각지에서 보편적으로 재배되고 있던 밀의 조상 격인

야생 에머 밀을 헤르몬 산기슭에서 발견했다.


이 발견은 국제적인 화제가 되어 아론손은 단숨에 학계의 이목을 사로잡았고,
 3년 뒤에는 미국 농무부 초청으로 미국 서부에 대한 조사를 수행했고,

가는 곳마다 유명인 대우를 받았다.


 미국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을 옥토로 되살릴 수 있다는 아론손의 비전에 감명을 받았으며

유대인 기업가와 박애주의자들은 유대인을 위한

팔레스타인 농업연구소 창립 기금으로 2만 달러 모금을 그에게 전달했다.


 아론손은 지크론애코프 북쪽으로 13킬로미터 떨어진

지중해가 내려 다 보이는 절벽 위에서 그의 새로운 임무를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

1914년 6월 29일 월요일,

영국에서 발행되는 거의 모든 신문의 1면은 사라예보 거리에서

아내와 함께 세르비아 혁명 세력의 손에 살해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으로 도배되었다.
 

그리고 1914년 8월 첫날, 유럽 대륙 전체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심연에 빠져들었다.
 

1차 세계대전을 치른 4년 동안 군인 1000만 명과 민간인 6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은 군대에 입대할 수 있는 남성 중 13%가 죽었고,

세르비아는 전체 인구의 15%가 죽었다.


 1913년부터 1915년까지 불과 2년 사이에 프랑스 남성의 기대수명은 57세에서 27세로 떨어졌다.
 1916년 솜 대 공세 첫날 5,800명의 연합군이 죽거나 다쳤다.
 이날은 오늘날까지 역사에서 가장 처참한 하루로 기억되고 있다.

 


1914년 9월 4일 오후, 쿠르트 프뤼퍼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게르마니아 호텔에서

로베르트 모르스라는 독일인을 만나고 있었다.
 그들의 만남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정치적인 차원에서나 주목할 만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프뤼퍼는 뮌헨에서 동양 언어 강의를 하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으나,

지금은 첩보 작전의 핵심 요원으로 은밀히 활동 중이었다.

이번 작전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전히 중립을 지키는 오스만 제국의 참전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결국 32세의 전쟁성 장관 엔베르 퍄샤는 독일과 상호 방위협정을 체결했고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독일은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전투를 개시했다.
 11월 2일 터키는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에 서서 전쟁에 뛰어들었다.

엔바르 파샤

터키가 동맹군의 편에서 참전함으로써 중동지역 지도제작에 참여하던 로렌스에게는 전장에 뛰어들었다.
 터키의 참전 선언에 따라 스튜어트 뉴컴이 근동지역 사령부가 설치될 카이로의 신설 정보대 수장으로 임명되었고 로렌스와 울리는 뉴컴의 정보부 참여 요청에 흔쾌히 동의했다.

 

1915년 1월 로렌스는 터키군의 수에즈 운하 공격을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터키군이 운하에 도착하려면 시나이 반도라는 240킬로미터나 되는 적대적 환경을 통과해야 했다.

 2월 3일 이른 아침,

마침내 터키군이 수에즈 운하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물가에 도착하자 터키군 공병들은 서둘러 부교를 조립하기 시작했고

보병들은 부교가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순간 갑자기 영국군 서치라이트가 터키군을 환히 비치더니

소총과 대포 공격을 퍼부어 부교 일곱 개를 순식간에 파괴했다.
 퇴로가 끊기기 전에 운하 건너편에 내려선 600여 명의 터키 병사는 죽음을 맞거나 포로로 붙잡혔다.


터키군의 수에즈 운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프뤼퍼의 정보원들은 모조리 자취를 감추었다.
 프뤼퍼는 당시 가까이 지내던 친구로부터 유대인을 정보원으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 친구는 미나 바이츠만이라는 이름의 활달하고 아름다운 20대 여성으로

시리아에서 여의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의 친오빠는 1904년 영국으로 건너 간 유명한 화학자 차임 바이츠만으로

1915년 무렵 영국 군의 전력 증강을 위한 군수산업에 긴밀히 협조 중이었다.

차임 바이츠만

 차임은 훗날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미나의 조카 에제르는 7대 대통령이 되었다.



 로렌스가 카이로에서 정보대 요원으로 활동하는

처음 몇 달 동안은 온 신경을 시리아에 집중했다.


 그런데 이집트 총영사의 동양 문제 보좌관으로 일하던

로널드 스토스와 안면을 트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스토스는 정치적 음모로 얼룩진 중동에서 가장 위험한 비밀을 간직한 인물로

 카이로와 영국 그리고 메카의 극소수만 알고 있는 민감한 게임에서

핵심적인 통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스토스는 정보대 소속 애송이 장교 로렌스를 명예로운 영광의 길로 안내한 당사자다.


 

동맹국은 전쟁에 승리할 경우의 위시리스트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제국주의적인 소원 목록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늘어났다.


반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연합국으로서는

그동안 허비한 만큼 뽑아낼 것이 많다고 생각되는 지역은

단 한 곳, 즉 분열과 혼돈의 땅 오스만 제국이었다.


 사실 1915년 가을을 전후로 연합국 정가에서는

오스만 제국을 냉소적으로 ‘거대한 전리품’이라고 언급했다.


 러시아 차르는 콘스탄티노플을 낚으려고 200년 전부터 낚싯대를 드리운 채 기다려 왔고,

프랑스 역시 가톨릭 신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시리아 땅을 탐했으며,

영국 또한 인도로 가는 육로를 제국주의 경쟁자들이 갉아먹지 못하게 하려고 오랫동안 공을 들여왔다.


이처럼 오래된 열망을 실현 가능성의 영역으로 이끈 것은

아마도 영국과 에미르 후세인의 비밀 협상이었을 것이다.
 양측의 협상이 차츰 실체를 드러내면서 아랍 반란의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오자

연합국 각국은 군침을 흘리며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1915년 11월 17일 이와 같은 술수의 대명사 격인 인물이 카이로를 방문했다.
 그는 바로 마크 사이크스 준 남작이었다.
 36세의 나이에 창백한 미남자인 그는 역사상 가장 많은 비극을 야기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사이크스-피코
 마크 사이크스는 영국인들은 수많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으며,

세상의 모든 골칫거리를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오만,

나아가 나머지 인류를 일깨우기 위해 영국인들은 특별한 노고를 감수해야 한다는

건방진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영국 정부는 사이크스에게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까다로운 숙제를 떠넘겼다.
 그것은 대영제국과 중동 우방들의 상충하는 영토적 요구를 정리하는 업무였다.


1916년 1월 초,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중 진급 외교관인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는

미래 중동의 지도를 날림으로 짜 맞추었다.


 피코는 영국 측과 마주 앉아 회담하는 동안에도 자국의 영토 요구가

에미르 후세인의 입장과 얼마나 상충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영국 측에서 한 번도 이야기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아랍과 프랑스와 영국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결국에 충돌하리라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마크 사이크스뿐이었다.
 그리고 1916년 5월,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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