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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Dec 18. 2021

아라비아의 로렌스(2)

아랍 반란의 시작

1916년 6월 5일 아침 에미르 후세인은 메카에 있는 자신의 궁전 망루에 올라 

도시의 터키군 요새를 향해 머스킷 소총을 발사했다. 
 

혁명의 신호탄이었다. 
 그날 하루 내내 후세인 추종자들은 헤자즈 전역에 있는 터키군의 수많은 거점을 습격했다.


같은 날 오후 다섯 시가 되기 직전, 

전쟁성 장관 허레이쇼 키치너 경이 타고 있는 영국 해군 전함 햄프셔는 

스코틀랜드 북쪽의 항구를 떠나 러시아로 향했다. 


 그러나 출항한 지 세 시간도 안되어 햄프셔 함은 망망대해에서 독일 기뢰에 부딪혀 침몰했고, 

키치너를 포함한 모든 승객이 비명횡사했다.


 

살집 좋은 47세의 중년 남성 브레몽은 프랑스 제국주의 군대의 전향적인 인물로서, 

지구촌의 낙후한 지역에 프랑스 계몽주의와 선진 문화를 전하는

 ‘문명화 사명’의 위대함과 정당성을 굳게 믿고 있었다.


 사실 무슬림 세계에서 쌓은 오랜 경력 이외에도 브레몽은 사절단 대표로서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중동 전장에서 펼쳐지는 활동이 그러하듯이 

프랑스가 헤자즈에 파견한 사절단에도 숨겨진 임무가 있었다. 


 그 임무는 속임수에 능하고 교활한 인물이 수행하기에 적합한 것으로, 

에두아르 브레몽은 그러한 면모를 갖춘 사람이었다.


 그가 헤자즈에서 맡은 표면적인 역할은 아랍 반란에 대한 

프랑스의 지지를 증명하고 지원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면의 역할은 달랐다.


 아랍 반란의 열풍이 지나치게 확산되지 않도록 제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아랍 반란 또는 아랍 국가의 범위가 전후에 

프랑스가 차지하려는 영역에 미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런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비할 데 없이 오만하고도 확실한 계획을 세워 둔 상태였다.


 

백마를 탄 압둘라가 하인 무리를 앞세우고 영국 영사관 안뜰에 나타났다. 
 그의 표정은 어두웠고 어제 오후 터키군 전투기 두 대가 폭격을 강행했다는 것과 

베두인 부족민들이 엄청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는 사실을 알렸다.


 걱정하는 압둘라에게 로렌스는 터키군 무력시위는 걱정할 것이 못되며, 

중동 전역의 터키군 배치 상황과 더 이상 공격을 계속할 전투기가 없다는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덧붙여 그는 아랍 반란을 거드는 데 가장 커다란 걸림돌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부족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당장 필요한 사람은 영국 정부의 전쟁 기획자들이 주목할 만한 객관적인 사실, 

즉 항구도시 라베그에서 원활한 공급을 저해하는 문제와 

북부 산악지대의 파이샬 부대가 겪는 수송의 어려움 등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서 포괄적인 보고서를 작성하여 상부 기획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임을 제시하면서, 

그런 임무를 확실히 수행할 인물로 자신을 천거했다.


 
압둘라는 곧바로 승낙했고 

로렌스는 파이샬을 만나는 방안으로 그가 라베그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파이샬이 있는 산악지대로 가겠다고 제안했다. 


 이는 무척 대담한 요청이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후세인에게 달려 있었다. 


 압둘라의 상황 설명을 메카 직통선 건너편에서 듣고 있던 

후세인이 스토스를 바꿔 달라고 했고, 

먼저 장남 알리가 라베그에서 로렌스를 만나보고 괜찮다는 판단을 내려야 내륙으로 이동해서 

파이샬을 만나도록 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후세인의 맏아들 알리에 대한 로렌스의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젊은 영국군 대위의 내륙 이동을 아버지가 허락했다는 

압둘라의 편지를 건네 받고는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충성을 맹세한 아들로서 군말 없이 따르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알리는 로렌스가 길을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주었다. 

일행은 마침내 10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함라 마을에 들어섰다. 


 낙타에서 내려 안뜰로 안내받은 로렌스의 눈에 현관 앞에 서 있는 한 사내의 옆모습이 들어왔다. 

파이살 이븐 후세인이었다.
 후세인의 여러 아들 가운데 파이살과 그 지지자들은 반란이 시작된 때부터 

최소의 무기와 자금지원으로 계속 전투를 치러 왔다. 

 로렌스는 압둘라와 알리에게는 부족한 열정을 파이살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은 그날 반군 진지를 몇 시간 동안 돌아다니며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더 확고 해졌다. 


 로렌스가 가장 놀란 점은 파이살이 거느린 부족들이 대단히 광범위하다는 것이었다. 

괴팍하기 그지없는 아라비아에서 그토록 많은 부족과 집안을 

통합하고 지휘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나는 기대했던 모든 것, 아니 그 이상을 얻었다. 

그동안 고생한 것에 비하면 아주 커다란 보답이다. 

나는 임무를 완수했다.”
 파이살 이븐 후세인이 아랍 반란을 이끌 수 있는 선구자라는 확신을 얻은 로렌스는 이렇게 보고했다.


집요함 그리고 행운 덕분에 로렌스의 헤자즈 방문은 한마디로 대성공이었다.
 그는 열흘 사이에 에메르 후세인의 네 아들과 제다에서 활동하는 

연합군 사절단의 주요 인사들 모두 만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로렌스는 영국이 라베그에서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보급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을 직접 확인한 사람이자, 

실제 전장을 보기 위해 내륙을 방문한 첫 번째 이방인이었다.
 
 


런던과 카이로에서는 반란 초기의 군사적 성취가 빈약하다는 판단 아래 

상당 규모의 영국군을 헤자즈에 파견해야 한다는 주장이 형성되고 있었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1개 여단에 해당하는 3000-4000명 규모를 파병하자는 주장이었다. 


 그 해 10월 에미르 후세인은 이 같은 주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등하고 있었다. 

이슬람의 성스러운 땅에 영국군 ‘이교도’가 나타난다면 

최근 세력을 규합한 부족들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위험이 있었다. 


 파이살의 진지를 직접 찾아간 로렌스는 

후세인의 우려가 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유럽인들이 자문과 교육을 위해 해안 지방에 근거지를 마련하는 것은 

크게 환영받을 일이지만 그 이상으로 정식 군대가 등장하면 분노를 살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십자군이라는 터키의 선전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했다. 


 로렌스의 주장 중 가장 논쟁적인 사실은 진중하고 목소리가 나긋한 파이살이라는 인물을

 아랍 반란의 선구자로 내세운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가 보기에 파이살의 영도력을 강화한다는 발상은 의외였고 

브레몽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파이살은 여느 형제들과 달리 유럽 열강에 대한 불신이 강했고, 

그가 시리아의 아랍 독립 지지파와 오랫동안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도 문제였다. 


 아랍 반란이 시리아까지 확산되지 않기를 열망하는 프랑스로서 

파이살의 득세보다 우려스러운 사태는 없었다.


 그날 제다의 프랑스 영사관 만찬 이후로 브레몽 대령은 

로렌스가 파이살의 부하로 전락했다고 힐난하기 시작했다. 
 또한 연합군이 개입하지 않으면 후세인의 여러 아들이 반란을 이끌어야 하는데, 

로렌스는 유약하고 결단성이 부족한 파이살을 내세워 

아라비아의 킹메이커가 되려 한다고 헐뜯었다.

 


로렌스가 파이살의 산중 진지를 방문한 날, 

스코틀랜드 북부에서는 기이한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와 미국을 오가는 정기 여객선 오스카 2세 호에서 

단속반이 무척 흥미로운 승객을 체포했다.
 건강한 체구에 나이는 41세 오스만 시민권을 소유했으며 

최근 독일에서 중립국 덴마크로 넘어온 인물이었다. 


아론손이 커크월에서 영국군에게 체포당한 것은 사실 치밀한 속임수였다. 
 즉 대중이 지켜보는 곳에서 붙잡혀 크게 떠벌린 것도 

독일과 터키 정보 당국의 방첩 요원들로 하여금 더 이상 냄새를 맡지 못하게 함으로써 

팔레스타인에 구축한 자신의 첩보망을 보호하기 위한 조작극이었다. 


 이와 같은 목적을 고려할 때 <뉴욕 이브닝 포스트>에 실린 아론손의 얼굴 사진은 일종의 보너스였다. 

런던 경찰청으로 보내진 아론손은 영국군이 사막에서 이동이 느린 이유가 물 공급 때문이며, 

자신이 가진 자료와 지도를 이용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아론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던 하원의원 사이크스 경은 그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고 

개인적인 만남을 정했다.


 

카이로의 주도권 구도는 삼파전이었다. 
 예상할 수 있듯이 맥마흔과 머리와 윈게이트는 서로 친밀하지 않은 관계였다. 


 런던이나 영국령 인도의 정치판에서 나머지 한 명을 고립시키기 위해 두 명이 합종연횡하는 사이였고, 

각각 이집트 수도에 자기만의 이해관계와 지지 세력을 보유한 사람들이었다. 


로렌스의 보고서는 그동안 군사적 맥락에서 논의되던 

연합군의 아라비아 배치 문제를 정치적인 맥락으로 깊숙이 던져 넣은 셈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국의 권력구조 내에서 

아라비아 상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랍 반란을 분쇄하고 팔레스타인 공세를 좌절시키려는 

프랑스의 교묘한 덫에 빠질 수 있었다.


로렌즈의 보고서가 일으킨 열광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헤자즈와 관련된 그의 임무는 끝났다. 

그의 상사인 길버트 클레이턴은 카이로에서 새로운 사무를 맡길 생각이었다. 


 로렌스가 이처럼 심심한 새로운 임무에서 탈출하게 된 것은 

뜻밖에도 레지널드 윈게이트 덕분이었다.


윈게이트는 맥마흔의 후임으로 카이로에 부임하여 

헤자즈 작전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정보 정교 추가 확보가 필요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라베그 주위 산악지대를 지키는 파이살에게 연락 장교를 붙이는 문제였다. 
 영국군을 통틀어 이런 업무를 담당할 사람은 스튜어트 뉴컴뿐이었고 

그는 12월까지 유럽에서 마무리해야 하는 업무가 있었다. 


 윈게이트는 카이로의 클레이턴에게 전보를 보냈다. 

뉴컴이 현장에 도착하는 대로 로렌스를 카이로로 복귀시킨다는 조건으로 

로렌스를 자신에게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1916년 봄, 시리아에서의 선전 및 감시 업무에 신물이 나 있던 프뤼퍼는 

앞으로 전개될 전투에서 역동적인 활동을 펼치고 싶은 마음에 

전투비행단 관측병 임무를 청원했다.


 5월 중순 몸무게가 갑자기 45kg로 줄었고 글씨체마저 이상했다. 

10월 초, 그는 콜레라와 결핵을 동시에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은 뒤 

병가를 얻어 독일로 돌아갔다. 


 몇 주 동안 베를린의 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난 뒤에는 

빌헬름 가에 있는 지도제작부로 배치되었다.
 지도 제작실은 따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병가 기간이 1917년 1월까지 연장되면서 프뤼퍼는 빵 배급량을 놓고 

식량 배급소 직원과 싸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당시 쿠르트 프뤼퍼는 거의 군 경력에 종지부를 찍을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그런데 쾰른 남작인 오펜하임은 베를린에서 병자나 다름없이 지내고 있는 

프뤼퍼에게 탈출구를 제공했다.
 콘스탄티노플 주재 독일 정보국 신임 수장으로 임명했고, 

2월 말 그는 베를린 지도 제작실 동료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다시 한번 중동을 향해 떠났다.
 
 


1917년 1월 초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나날 속에서 로렌스는

 갈런드 소령에게서 열심히 폭파 기술을 배웠다. 


 전쟁 전까지는 화학자였던 갈런드는 카이로 훈련소에서 용접일을 하면서 

독학으로 폭발물 전문가가 되었다. 


 그가 아라비아에 도착하기 전에 

아랍인들은 곡괭이와 삽으로 철로를 끊어 놓고 달아나는 수준이었지만, 

철로 밑으로 폭발물을 설치해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뜨리는 방법을 터득했다. 


옌보 동북쪽에 자리 잡은 오아시스 마을에서 와즈를 향한 행군이 시작되었다. 
 파이살이 새하얀 옷을 걸치고 맨 앞에 섰고, 

샤리프는 붉은 천을 머리에 두르고 헤나로 염색한 긴 옷과 망토 차림으로 파이살의 오른쪽을 지켰고 

로렌스는 희고 붉은 옷을 입고 왼쪽에 섰다. 


 행렬은 출발지인 오아시스부터 모래언덕 너머로 400미터나 이어졌다.
 로렌스는 이 황홀한 장관을 그리 오래 감상할 수 없었다. 

지난 몇 달 동안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튜어트 뉴컴이 이집트를 떠났다는 전보를 아침에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아라비아를 떠나 옌보로 돌아와 대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스튜어트 뉴컴은 

지난 6주 동안 그들과 함께 지낸 로렌스가 동행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해서 

로렌스의 동행을 요청했고 로렌스는 뉴컴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움레즈로 행군하는 동안 뉴컴의 냉정한 면모를 충분히 확인한 파이살은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기 어렵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로렌스가 카이로로 돌아갈 때가 되자, 

와즈에 도착한 날 비밀리에 제다에 있는 시릴 윌슨에게 전보를 보냈다. 

윌슨 역시 그 내용을 카이로의 길버트 클레이턴에게 전했다. 


 클레이턴은 이런 정도의 직접적인 요구를 받고도 거절한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로렌스를 헤자즈에 정식으로 배치하는 서류 작업이 마무리되었고 

마침내 로렌스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사보이 호텔의 책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궁극적으로 아라비아 전쟁을 자신의 구상대로 재개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사실 로렌스가 자신의 연락 장교로 계속 남게 해 달라는 파이살의 요구는 

영국군이라는 관료주의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뒷수습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제다에 있는 시릴 윌슨이나 최근에 책임자로 부임한 스튜어드 뉴컴이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손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일을 하다 보면 이 정도 사소한 문제는 언제든 겪기 마련이다.

 지난 2년 동안 아랍과 영국의 관계를 특징지었던 불신, 

그 모든 의심을 뒤로한 채 아랍 반란군의 총사령관 파이살이 

영국군 일개 하급 장교를 없어서는 안 될 조력자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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