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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Dec 20. 2021

아라비아의 로렌스(3)

시온주의와 유대인 연합

1917년 예일은 예루살렘에서 사면초가에 빠졌음을 직감했다.

부분적으로는 미국인이라는 국적이 원인이었다.


 전쟁에 휘말린 모든 주체가 미국에 대해 분노를 키우고 있었다.

‘자유무역’이라는 신성한 교리를 방어 논리로 내세운 미국은

갈등 관계인 양측 모두로부터 잇속을 챙기면서

유럽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동안

그 어느 때보다 큰 부를 끌어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드로 윌슨이 재선에 성공하자 변화의 기류가 일었고

미국이 연합군에 뛰어들 것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마침내 독일은 유럽 내 적국을 지원하는 모든 상선에 대해

무차별적인 유보트 공격을 재개한다고 선포했다.

이는 미국 상선을 표적으로 삼은 조치였다.


 미국은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지는 않았으나

며칠 후 윌슨은 독일과의 외교를 단절하는 과도적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게다가 독일이 미국을 공격하도록 멕시코를 꼬드겼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되었다.

이 모든 요인이 정치적으로 작용한 결과

마침내 4월 초 윌슨은 독일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우드로 윌슨 14대 마국 대통령

예일은 팔레스타인을 떠나 오스만 제국 수도로 이동하라는

스탠더드 오일 콘스탄티노플 사무소의 전보를 받았다.


삐걱거리면서 멈추고 출발하기를 반복하는 열차를 타고

거의 3주에 걸쳐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는 고통스러운 여정 내내

예일은 독일의 부대 이동 상황 및 철도 건설 사업의 현황,

군대 숙영지 및 보급창의 위치 등 창밖으로 내다본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는 다가올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대단히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었다.
 물론 그 누구보다도 윌리엄 예일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기록일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을 벌이는 군대라면 당연히 그렇듯이,

영국군은 비밀 협정을 제삼자에게 누설하는 것을 반역 행위로 간주하여

당사자를 처형대에 세우거나 종신형에 처했다.


 2월 초 어느 날 로렌스는 와즈에서 명확하게 이 반역행위를 저질렀다.
 로렌스는 파이살을 앉혀 놓고 아카바에 도사린 함정을 피해

시리아를 향한 내륙 경로로 진격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한편,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가 은밀히 맺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존재와 핵심 조항을 낱낱이 폭로한 것이다.

로렌스의 폭로로 아랍 지도자 파이살은 영국이 당초 약속과는

 달리 시리아를 순순히 넘겨주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아랍이 시리아를 원한다면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1917년 3월 농학자 아론손은 드디어 영국군 첩보 관계자들 사이에서

가장 소중한 자산의 일원으로 다시 말해 적군이 점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에 관한 풍성한 정보 제공자로 인정받았다.


 아틀리트에 접근하기 위해 첩보선 메너 젬 호에 오른 2월 중순,

날씨도 좋았고 아론손의 동지 가운데 한 명인 리오바 슈네르손도 첩보선에 함께 타고 있었다.


그리하여 슈네르손은 아틀리트에서 최근 확보한 정보를

방수가방에 고이 담아서 첩보선으로 귀환했다.


이후 몇 달이 지나는 동안 영국군 첩보원들은 해안 침투선을 활용하여

팔레스타인의 내부 정보를 안정적으로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토록 풍부한 정보를 받아 든 영국인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유대인 첩보망은 24명을 거느린 조직으로 성장했으며

조직원들은 대부분 지방 정부에서 상당한 지위를 지닌 자들이었다.


마침 머리 장군의 팔레스타인 공격 시점을 앞둔 때인지라

아론손의 유대인 첩보조직이 작성한 지역 자료는 영국군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레제널드 윈게이트는 이 보고서에 깊은 인상을 받아

런던의 신임 외무상 아서 벨푸어에게 전달해 주었다.  


 

1917년 초 사이크스는 영국 시온주의 지도자들과 연이어 만났다.
 이런 흐름에 정점을 찍은 것은 1917년 2월 7일 런던 시내 한 저택에서 열린

영국 최고의 ‘유대인 신사들’과 함께한 특별 회담이었다.


 사이크스는 자신이 그 자리에 참석한 사실을 외무성이나 전쟁 내각이 모르기 때문에

주고받은 모든 대화 역시 비밀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참석자 여덟 명 중에는

월터 로스차일드 경, 허버트 새뮤얼 전 내무장관,

사이크스의 팔레스타인 구상에서 핵심인물로 부상하게 된

영국 시온주의 협회의 신임 회장 차임 바이츠만이 있었다.


 제정 러시아에서 탈출한 42세의 망명객인 바이츠만은 활달한 성격에 염소수염이 인상적인 인물로,

한때 맨체스터 대학교 화학과 교수였고,
 최근 10년 사이에는 영국의 시온주의자 가운데 가장 지적이고 설득력 있는 사람으로 떠올랐다.


 1908년에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유대인에게 농지를 사주는

‘팔레스타인 토지 개발사’의 설립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바이츠만의 업적 가운데 가장 주목받은 것은 화학분야의 실적이었다.


 그는 사이크스와 만나기 직전 아세톤을 합성하는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여

영국의 탄약 산업에 활용하도록 허용했고

영국 정부는 지극히 감사를 표명한 바 있었다.


아틀라스 출신의 농학자 아론손은

사이크스가 런던에서 은밀하게 모의하던 인사들과는 사뭇 다른 분류였다.


런던 사람들은 냉철하고 조심스러우며 신사답게 접근한다면,

아론손은 열정적이고 과격하게 밀어붙이는 유형이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서 시온주의자의 꿈을 실제 삶으로 단련한 사람이었으며,

팔레스타인의 앞날에 대해 런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멋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영국의 보호 아래 유대인 공동체를 확장하는 수중에 그쳐서는 안 되며,

궁극적으로 지중해 바닷가에서 동쪽으로 요르단 강과 다마스쿠스 초입에 이르는 땅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아론손은 급진적인 인물이었다.


아론 아론손은 1년 가까이 만날 수 없었던 여동생 사라가 사이드 항에 도착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무치는 재회의 순간이었다.
 아틀리트에서 매너 젬 호를 타고 온 그녀는 야위었고 창백했지만 활기가 넘쳤다.


 1900년 대 초반에 청춘을 보낸 사라 아론손의 가장 놀라운 측면은

자신의 지적 능력이나 타고난 리더십 역량을 전혀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위험한 임무를 훌륭히 처리했다.


 신경질적인 친오빠나 충동적인 파인버그 등

과거의 NILI를 이끌었던 그 누구보다 유능한 솜씨를 발휘했는데

여기에는 여성이라는 점도 도움이 되었다.


 서구를 추종하는 팔레스타인 유대인 패거리를 의심하는

오스만 관리들의 시선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웠기 때문에

교외에 대한 광범위한 정찰활동도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영국과 첩보 보고 라인을 확립한 이후 그녀는 아틀리트를 지휘 본부로 전환했다.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들어오는 정보의 파편들을 분류하고 체계화해서

다음 첩보선이 해안에 접근했을 때 무사히 전달되도록 만전을 기했다.

 


1917년 봄까지 오스만 제국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현지 주민들보다 외부 세계가 더 선명한 정보를 얻고 있었다.


 이런 정보들은 4월 미국과 터키의 외교단절에 따라 터키를 떠나야 했던

 미국 영사관 직원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스위스와 워싱턴과 런던에서 이들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 몇몇 지역에서 발생한 질병과 기아로 수십만 명의 시민이 희생되자

반란을 일으키려는 군중으로 일촉즉발 상태였다.

또한 군부대에서는 탈영하는 병사들이 25-30%, 또는 40%까지 이르기도 했다.

관찰력이 뛰어난 미국 공무원 증언에 따르면 터키군과 독일군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어

폭력 사태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대중은 이런 상황에 별 관심이 없으며 오직 전쟁이 빨리 끝나서

안정적인 생활을 누릴 날이 오기만을 갈망한다고 밝혔다.


1917년 5월 중순까지 미국의 십자군 원정에 이름을 올린 젊은이는 10만 명에 못 미쳤고,

결국 남북전쟁 이후 처음으로 강제 징집을 위한 법률을 제정해야 했다.


 그 결과 그해 6월 뉴욕항에 도착한 예일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맨 처음으로 했던 일은 해당 지역 병무청에 가서 이름을 등록하는 것이었다.


 예일은 징집관이 자신을 어디로 배치할지도 정확히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징집 제한 나이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고 명문대와 귀족 집안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장교 양성 기관으로 가게 될 게 뻔했다.


 야심 찬 석유꾼이 자기 미래로 상정하기에는 매우 괴로운 그림이었다.

자신이 오스만 제국에서 쌓은 4년간의 경력이라면

정부나 군대 조직에서 훨씬 더 의미 있는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뉴욕에서 아무런 소득을 올리지 못한 예일은 절망감을 안고서 워싱턴으로 갔다.

권력의 중심부에 가면 자신을 알아봐 줄 사람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예일은 시리아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모든 것을

상세하게 기술한 보고서를 명함처럼 돌렸다.

한 달 동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그의 시리아 보고서에 호기심을 발동한 사람은

미국 국무장관 특별보좌관 릴런드 해리슨이었다.


 해리슨은 예일에게 놀라운 제안을 내놓았다.

국무부 소속 ‘특수 요원’ 자격으로 중동에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제시한 연봉은 2000달러였고, 활동에 필요한 경비는 별도였다.

그의 임무는 미국 정부가 흥미를 느낄 만한 모든 사안을 조사해서 보고하는 것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릴런드 해리슨의 관심 분야를 깊숙이 관찰하는 임무였다.

이제 예일은 카이로를 본거지로 활동하면서

미국 대사관의 외교 우편을 통해 오직 해리슨에게만 전달되는 보고서를 매주 보내야 했다.
 당연히 예일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8월 14일 랜싱 장관은 그를 국무부 소속 중동 담당 특수 요원으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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