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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Dec 23. 2021

아라비의 로렌스(4)

헤자즈 철도 폭파 작전

로렌스는 이스마일리아 승강장에서 만난 장교로부터 

아랍 반란군과 아카바 점령기간 동안 벌어진 주요한 변화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그동안 아치볼드 머리 장군은 두 번째 가자 전투에서 패한 뒤 

이집트 원정군 총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후임자는 기병대 사령관 출신의 에드먼드 앨런비로, 

카이로에 도착한 지 2주도 안 된 상태였다. 
 로렌스는 이 소식을 듣자 기운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까칠한 머리가 아랍 반란을 지지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꿀 때까지 

자신과 클레이턴 그리고 아랍국의 여러 인원이 몇 달간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랐고,

 이제 그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렌스가 카이로에 도착해보니 분위기는 예상과 많이 달랐다. 
 영국군 사령부는 이미 그의 무용담으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가자 전투 완패에 이어 헤자즈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유럽에서도 암울한 소식(서부전선 연합군의 공세는 또다시 실패하고 

프랑스에서는 폭동이 일어났으며 러시아는 정부가 무너지는 등)만 들려오던 와중에 

로렌스와 아랍 반란군이 아카바를 점령하는 사기충천의 소식이 날아든 것이었다. 

 영국인의 대담성과 집념을 보여주는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아카바 점령은 환상적인 과정도 과정이려니와 

아랍 전선이 단숨에 무려 400킬로미터 북쪽으로 올라갔다는 데 의미가 컸다. 
 시리아를 향해 공세를 취하기가 대단히 유리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따라서 머리와 마찬가지로 앨런비가 이집트로 발령을 받은 것은 좌천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처사에 머리는 몸을 사린 반면 

앨런비는 이번 기회를 색다른 자극제로 산은 듯했다. 


 그날 오후 앨런비가 참석한 총사령관 집무실에서 로렌스는 

아랍 반란군이 성취할 미래에 대해 놀라운 설계를 선보였다. 


 아카바를 핵심 거점으로 신속하게 강화한다면 

마침내 반란군은 시리아의 심장부로 쳐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설명한 것이다.


 로렌스 말마따나 비로소 그 지역 전체에 반란의 불길을 당길 수 있는 

실로 중대한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앨런비는 로렌스 앞에서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대영제국 군대의 통솔자 위리엄 로버트슨 참모총장을 비롯한 상관들에게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보고를 올렸다.


 뼛속 깊이 서구 사람인지라 동방 작전이라면 시큰둥해하던 

로버트슨조차 곧바로 입장을 바꾸었다. 


 7월에 카이로와 부지런히 전보를 주고받은 끝에 

그는 임박한 팔레스타인 공격에 대비할 만한 

병력 5000명을 곧 보내겠다고 앨런비에게 약속했다. 

아랍 반란의 앞날에 일대 전기가 마련된 셈이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아치볼드 머리에게는 성가시고 부차적인 존재였던 반란군이 

이제는 영국군이 반란군 공격 일정에 맞추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로렌스가 중동에서 지위를 얻기까지 가장 큰 신세를 진 사람은 스튜어드 뉴컴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전쟁이라고, 로렌스는 냉정히 판단했다.


 자심의 멘토에 대한 개인적인 고마움 때문에 전쟁 수행에 지장을 초래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뉴컴은 헤자즈에서 논쟁으로 얼룩진 임기를 보내는 동안 

전쟁에 대한 아랍의 괴상한 접근 방식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고, 

항상 아랍군은 원칙과 신뢰가 부족하다는 비판적인 보고서를 제출했다. 


 로렌스는 시릴 윌슨에게 자신이 제다에 온 이유를 설명하면서 

뉴컴이 전방 작전에서 손을 떼고 후방으로 물러나기로 결정되었음을 밝혔다.
 사실상 좌천이었다.
 윌슨은 깜짝 놀랐으나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같은 날 저녁, 로렌스는 윌슨과 함께 후세인 왕을 만났다. 
 로렌스가 왕을 알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나 

왕이 매력과 품위가 넘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파이살과 그의 군대를 앨런비 직속으로 두는 문제를 선뜻 허락한 점도 그런 인상에 기여했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 후세인 왕은 단둘이 만나고 싶다며 로렌스를 제다의 왕궁으로 불렀다. 

왕은 평소와 달리 퉁명스러운 말투로 마음속 깊이 담아 두었던 화제를 꺼냈다. 
 지난 5월,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를 만난 이야기였다.

 

사이크스-피코 협정


그들은 예전에 팔레스타인에서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아론 아론손은 저명한 과학자로 농경학 분야의 선구자였고, 

윌리엄 예일은 뉴욕 스탠더드 오일 사의 현지 대표자였다. 

 1917년 9월 말 현재, 둘의 입지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아론손은 국제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고, 

예일은 미국 국무부 소속 특수요원으로 중동에 돌아온 터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예일은 아론손이 중동에서 

가장 광범위한 첩보 조직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아론손 역시 모호한 직함을 가지고 다시 나타난 

윌리엄 예일의 정체가 스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짐작하듯이, 둘이 9월 25일 파리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이렇듯 상대의 신분을 몰랐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예일은 영국 시온주의자와 반시온주의자 

그리고 고위층의 대립 진영끼리 벌이는 노골적인 싸움에 대한 

부족한 정보를 파리에서 아론손을 만나면 상황 파악에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무언가 얻은 것도 있었다. 


 아론손은 자신을 찾아온 이 미국인에게 카이로로 가면 

남동생 알렉스 앞으로 부쳐 달라며 편지 한 통을 맡겼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작성한 것 말고는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는 편지였다. 

암호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경솔하기 그지없는 편지에 아론손이 에드몽 드 로쉴드와 마크 사이크스를 만난 일부터 

런던에서 정부와 시온주의자 간의 협상에 대한 내용까지 상세하게 담겨 있었다. 

첩보조직의 수장 아론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동향을 유심히 살펴야 하는 카이로 주둔 

영국군 수뇌부의 친구들 이름을 하나씩 나열하는 동시에 

이집트로 이동 중인 프랑스 대표자 조르주 피코를 감시하라고 남동생에게 일렀다. 


 카이로에서 가장 중요한 조력자인 파스칼이 

그의 동태를 파악하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라고도 했다. 


미국 정부도 영국이 유대인 국가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윌슨 대통령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논의가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특히 사이크스가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론손이 그토록 중요한 편지를 부주의하게 맡긴 대상이 예일이라는 점은 그에게 행운이었다. 

예일은 첩보원이라는 본분에 맞게 알렉스 아론손에게 편지를 건네기에 앞서 

봉투를 열어 내용을 영어로 옮겨 국무성으로 보냈다.

 


1917년 당시만 해도 비행기는 중동에서 보기 힘든 물체였다. 

그런 비행기가 10월 12일 아침 로렌스 소령을 데려오기 위해 아카바로 날아올랐다. 
 그에게 맡길 중요한 임무가 있다는 뜻이었다. 


 로렌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면면만 보아도 사태의 중요성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앨런비 장군과 클레이턴 장군, 

옥스퍼드 시절부터 자신의 멘토였고 지금은 아랍국의 명목상 대표인 데이브드 호가스였다. 
 

마침내 앨런비 장군이 터키 공격 일자를 정했다. 

2주도 안 남은 10월 28일이었다. 


 작전은 우선 영국군은 사흘 동안에 걸쳐 가자 지역에 포격을 퍼붓기로 했다. 

그러나 실제 돌격 목표는 가자에서 동쪽으로 47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베르셰바로 방비가 훨씬 더 허술한 곳이었다. 


 베르셰바를 점령하여 그곳 우물을 확보한 뒤 북쪽과 서쪽으로 세력을 넓힘으로써 

가자에서 팔레스타인 내륙으로 이어지는 보급선을 공략한다는 작전이었다. 

계획대로 된다면 가자에서 참호를 지키는 터키군은 포위되거나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로렌스를 급히 불러들인 이유는 이렇게 그럴듯한 작전에서 

아랍 반란군에게 어떤 역할을 맡겨야 할지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베르세바 점령이라는 기발한 작전이 매우 신중하게 기획된 만큼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아랍군에게 맡길 역할을 결정하기란 어려운 문제였다. 

헤자즈 철도 노선도


 그들에게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터키군 보급선을 차단하도록 한다면 

공격 지점은 시리아 중부의 철도 요충지 데라가 될 것이었다. 


 헤자즈 철도의 서쪽 지선이 갈라져 나오는 이곳은 전장의 터키군에게는 중요한 보급 거점이었다. 
 게다가 로렌스는 6월 내내 시리아 전역의 첩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데라 지역의 아랍 부족민 수천 명이 반란에 가담하려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군이 데라에서 190킬로미터 서남쪽에 확보한 팔레스타인 거점 이상으로 진격하지 못한다면, 

데라 공격에 나선 수많은 아랍인은 참혹한 결말을 맞을 수도 있었다.


 데라 말고도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오는 철도 지선을 차단할 수 있는 곳은 또 있었다. 

데라에서 24킬로미터 서쪽에 위치한 야르무크로 

이곳은 열차가 까마득히 높은 철교를 수도 없이 지나는 바위 투성이 협곡이었다. 
 따라서 철교를 하나만 폭파해도 열차는 그것으로 끝나는 셈이었다. 


 이 작전은 소규모 기동 부대의 전형적인 열차 공격인 

치고 빠지기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로렌스는 세밀한 대책을 내놓았고 자신이 직접 폭파 임무를 실행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적의 눈길을 피하려면 소수 정예 부대로 편성해야 한다면서 

임기응변에 능하고 진중한 전사들을 직접 선발하겠다고 했다. 


아울러 협곡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작당한 현지인이 있으면 뽑겠다고도 했다.

 작전을 마친 뒤 현지인들은 자기 마을로 돌려보내고 

부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안전한 피난처를 찾으면 되는 것이었다.


엘아리사에 모인 사람들에게 로렌스의 새 작전은 작전이라기보다는 자살 행위로 보였다. 
 게다가 이들에게는 로렌스는 이름도 모르는 아무개 병사가 아니라 

친구이자 부하였고 존경할 만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는 무조건 내칠 수만은 없는 제안이었다.


1917년 10월 중순, 전쟁에 임하는 연합국의 상황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프랑스군은 사분오열 상태였고, 

동부전선에서 러시아는 또다시 독일에 패했다. 

남부전선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군에 대적해 실패하고 궤멸 직전이었다. 


 서부전선의 영국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헤이그는 7월 31일 이후 

과거 솜 전투보다 더 무모한 공격 작전을 고집함으로써

 ‘냉혹한 도살자’라는 악명을 얻었다. 


 이런 와중에 조금이라도 승리에 보탬이 될 수만 있다면 

전쟁 기획자들의 눈에 한 명의 목숨이 아까울 이유가 없었다. 


 로렌스가 용감했던, 멍청했던, 망상에 사로잡혔던, 간에 

야르무크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다면 그를 말리지 않겠다는 게 수뇌부 입장이었다. 


 앨런비 장군은 작전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11월 5일이나 6일 아니면 7일 밤에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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