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내 Dec 27. 2021

아라비아의 로렌스(5)

연합군의 총공세

사라 아론손과 2인자 요세프 리샨스키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얼마 전 

아틀리트에서 15킬로 미터 가량 떨어진 지크론 야코프 마을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마침내 10월 2일, 터키군 병사들이 야음을 틈타 마을을 포위한 뒤 

아침까지 체포 작전을 펼쳤다. 


이미 아틀리트 수색을 마치고 온 군인과 비밀경찰은 

수십 명에 이르는 체포 대상자 명단을 손에 쥐고서 색출 작업을 벌였다. 


1차 체포 대상에는 사론 아론손을 포함하여 

그녀의 아버지 에프라임, 둘째 오빠인 츠비까지 올라 있었다. 


 터키군이 조직의 수뇌로 지목하여 기장 먼저 체포하려던 

요세프 리샨스키는 달아난 상태였다.


 1917년 당시 터키군의 남성 우월주의 사고방식으로 

첩보 조직의 우두머리가 여성이라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공포영화를 느리게 재생하듯 터키군의 지크론 야코프 체포작전은 끔찍하게 전개되었다.


 질문이 시작되던 날, 

터키군은 사라 아론손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와 오빠를 구타하면서 

리샨스키의 소재를 대라고 추궁했다. 
 그러나 사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는 더 지독한 일이 벌어졌다. 

에프라임 아론손과 츠비를 비롯한 체포자들이 마을 광장 한복판으로 끌려가 

기둥에 묶인 다음 채찍질을 당했다. 


 이 모습을 주변에 숨어 있는 자들에게 보여주어 자수를 유도하려는 계획이었다. 

터키군은 전날 차갑게 반항했던 사라에게 특히 더 무자비했다. 


 지크론 야코프 대로변에 있는 그녀의 고향 집 문기둥에 묶은 뒤 

채찍과 몽둥이로 마구 때렸다. 

하지만 사라는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고문을 가하는 터키군을 비웃다가 기절했다.


터키군의 체포 명단에 이름이 실려 있던 사람들은 

일가 친족의 울부짖는 소리에 못 이겨 하나 둘 은신처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숨겨준 사람의 배신으로 끌려온 이들도 있었다. 

참혹한 공포에 기인한 일종의 집단적 정신이상 증세가 지크론 야코프를 뒤덮은 결과였다.


이튿날 10월 5일 금요일 나사렛으로 향하는 차량에 짐짝처럼 실린 피범벅의 

사라 아론손이 깨끗한 차림으로 고향을 떠나게 해달라고 청했다. 


 집으로 들어간 사라는 화장실에 들어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고, 

그 안에서 살아남은 다른 NILI동지들에게 전할 마지막 명령을 급히 쪽지로 남기고 

이런 날이 올 때를 대비해 벽장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 

총구를 입에 낳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해 그녀의 나이 27세였다. 

 


엘아리시에서 출정식을 준비할 때 

로렌스는 고성능 폭약과 기폭장치를 연결하는 두 가닥으로 꼬인 가벼운 전선 914미터짜리를 

신제품으로 구해달라고 클레이턴에게 부탁했다. 


 폭파 대원들이 야르무크 철교에서 날아온 파편이나 

그 충격으로 굴러 떨어질 돌덩이 따위에 다치지 않을 거리를 두고 작전을 수행하려면 

전선의 길이가 넉넉하고 가벼워야 했다. 


 그러나 아카바로 배송된 전선은 외줄짜리 재고품에 길이도 457미터에 불과했다. 

이 전선을 두 가닥으로 꼬면 로렌스는 폭파 지점으로부터 230미터 이내 거리에서 

기폭 장치를 눌러야 할 판이었다. 

적군이 퍼붓는 총알을 피하기 어려운 거리였다. 


그리고 습격대 인원 구성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로렌스와 함께 야르무크 작전에 나서기로 한 현지 주민들은 표적이 

열차가 이나라 철교라는 설명을 듣고는 싸늘한 표정이었다. 


 열차를 세워서 약탈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 부족했다. 


 이들에게 로렌스는 도적 떼의 두목이었고 습격 대장이었고 

진정한 전투의 유일무이한 지휘관이었다. 

로렌스 역시 아랍인들에게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주된 근거가 

그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로렌스는 성공의 문턱까지 다가갔다. 


 11월 7일 밤, 

텔알셰하브에 있는 철교에 도착한 로렌스와 폭파대는 

터키군 초소 바로 밑에 위치한 협곡으로 폭약을 운반하기 시작했다.

 이때 누군가가 소총을 바위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터키군 경비병들이 초소 문짝을 박차고 나와 사방으로 총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폭약이 총에 맞으면 터진다는 사실을 잘 아는 폭파 대원들은 

폭약을 그대로 내팽개친 채 황망히 달아났고 로렌스도 몸을 숨겼다. 


결국 로렌스는 다른 곳에서 열차를 공격하기로 결정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 위험한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 처하자 

로렌스는 일부 대원에게 떠날 것을 명령했다. 

그중에는 인도군 기관총 사수들도 포함되었는데 

이는 열차를 공격하는 대원들이 중화기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야르무크 철교 작전에서 많은 양의 전선을 잃었기 때문에 

이제 폭파 지점에서 겨우 46미터 떨어진 곳에서 기폭장치를 눌러야 했다. 

물론 이 역할은 로렌스의 몫이었다.


그가 선택한 곳은 암만 남쪽 헤자즈 철도선상에 위치한 

무니피르 마을 외곽의 으슥한 오솔길이었다. 


 로렌스는 터키군 병사들을 가득 싣고 지나가는 열차를 폭파하려 했으나 

전선에 이상이 생겨 실패하고 말았다. 

로렌스는 지나가는 열차 안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터키 병사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고통스럽게 견디면서, 

간간히 손까지 흔들어가며 의심을 피해야만 했다. 


다음 날, 그보다 작은 부대가 탑승한 열차를 공격했다. 

그러나 로렌스는 폭파 지점과 너무 가까운 곳에서 기폭 장치를 눌렀고, 

폭약이 터지는 충격으로 몸이 날아갔다. 


 기관차에서 분리된 커다란 파편이 날아와 무릎 사이에 떨어졌고 

비틀거리며 정신을 차린 로렌스의 셔츠는 갈가리 찢겨 있었고 왼팔에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터키군 병사들은 비틀거리며 도망치는 로렌스를 겨냥하여 총을 쏘아 댔다. 

로렌스는 그들의 사격 실력이 형편없다고 평가했지만 

적어도 다섯 발이 로렌스의 몸에 스쳤고 

그중 몇 발은 깊은 상처를 남겼다.  


로렌스는 무니파르에서 대원 60명과 함께 터키군 400명을 상대로 싸웠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어떤 대원들은 무기가 없어서 열차를 향해서 돌을 던졌다. 

헤자즈 철도노선

20명이 순식간에 총에 맞아 쓰려졌고 

최소한 7명은 로렌스를 구출하러 언덕 아래로 내려가다가 죽었다. 
 

하지만 로렌스는 승리했고 

다음날 아즈라크로 이동해 대대적인 환영 속에서 승리를 한껏 자랑했다.

 


11월 7일 터키군이 가자에서 퇴각하기 시작한 바로 그날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레닌과 볼셰비키 동지들은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정권을 타도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볼셰비키들은 모든 전선에서 물러 나겠다는 평화 포고령을 발표했다. 
 전장에 있던 러시아 전군은 일방적으로 총을 버리고 퇴각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소식이 잇따랐다. 

무너진 옛 정권의 서류를 샅샅이 뒤지던 볼셰비키들이 

비밀 상태에 있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사본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지난 3년 동안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대학살이 벌어진 것이 

제국주의 권력 강화 때문이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명확히 증명하는 문건이라고 판단, 

11월 중순 이 협정문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물론 이 협정문은 영국과 프랑스가 아랍의 독립을 지원하겠다는 말은 

아랍 땅을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책략이라는 제말 파샤의 오랜 의혹을 증명해주는 내용이기도 했다. 

그는 베이루트 연설에서 전체 아랍인과 무슬림 세계를 향해 그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12월 11일 아침에 예루살렘 성안으로 발을 디디는 

역사적인 순간에 동참하는 기회가 로렌스에게 주어졌다. 


그는 야르무크 작전의 실패로 질책을 받거나 강등까지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앨런비 장군은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는 부하들이 대견스러워 

야르무크 사건은 잊은 지 오래였다.


 낡은 아랍 옷을 벗고 군복과 계급장을 빌려 입은 그는 

클레이턴 장군의 참모 자격으로 예루살렘 입성 진에 참가했다. 


로렌스에게 기독교인으로서의 믿음 따윈 남아 있지 않았지만 

벅찬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의 군대가 6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서구의 종교적 고향을 밟은 날이자, 

다시는 중동이 예전과 같은 시절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날이기 때문이다. 


카이로로 돌아온 로렌스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미래가 어둡다고 판단했다. 

비교적 차분한 편이며 경찰을 두려워하는 이집트 사람들조차 

벨푸어 선언과 사이크스-피코 협정 소식에 궐기할 태세인데 

아카바에 집결한 반란군과 시리아 전역의 동맹 부족들에게는 얼마나 큰 타격을 주었겠는가.


 로렌스는 9개월 전 파이살에게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알려주었던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카바는 몇 달 만에 급격한 변화를 거쳐 

이제는 낯선 도시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비좁은 해변을 가득 메운 막사들, 

온갖 선박이 빈틈없이 정박한 부두, 곳곳에 산더미처럼 쌓인 보급품과 무기들만 봐도 

상전벽해가 따로 없었다. 


 로렌스가 그곳을 방문할 때 이용한 교통수단만 봐도 상황이 얼마나 변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임박한 시리아 공격에 대한 앨런비의 구상을 파이살에게 설명하기 위해 

아카바를 찾을 때 

홍해를 저속으로 오가는 선박이 아닌, 

비행대가 총사령부 전용으로 배정한 복엽 기를 이용했다. 


 파이살과 대화 내용도 바뀌었다. 

차를 마시며 전술과 정치 등 다양한 주제로 잡담을 나누는 것은 과거의 풍경이 되었다. 


 이번에 두 사람이 만나는 이유는 

반란군이 공격 작전에서 어떤 임무를 맡을 것인지를 궁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란군이 맡아야 하는 임무를 로렌스가 파이살에게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아카바에 착륙한 지 24시간도 안되어 용건을 처리한 

로렌스는 전쟁 물자로 징발한 그 비행기를 다시 올라탔다. 

 


1918년 9월 12일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50개월이 되던 날이었다. 


그날 각지의 전황을 살펴보던 연합국의 군사 및 정치 지도자들은 

동맹국의 붕괴가 머지않았다고 생각했다. 
 전 세계적으로 무려 16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전쟁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속도로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당시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춘계 대공세에서 획득한 땅을 도로 내어주고 

힌덴부르크 저지선 뒤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7000여 명에 이르는 다양한 병력이 아즈라크의 오래된 성으로 집결하기 위해 

곳곳에서 시리아 사막을 건너고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이동이 발각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터키군에게는 아즈라크에서 서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암만을 향해 

연합군이 이동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아즈라크 혼성부대의 진짜 목적지는 서북쪽으로 120킬로미터 데라였다. 


 이 부대는 전면적인 공격에 앞서 기습 타격에 나설 특공대로 

앨런비 장군이 대공세를 전개하기 전날 야간에 

헤자즈 철도 본선 및 팔레스타인으로 이어지는 지선을 

동시에 차단하여 후방에서 터키군을 마비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9월 12일, 

특공대 소속의 마지막 부대가 아즈라크에 도착하자 

영국군 중령 두 명이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합류했다. 


피어스 조이스와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였다. 

일주일 먼저 아즈라크에 들어온 로렌스는 속속 도착하는 전투 부대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12개 아랍 부족이 보낸 전사들, 

영국과 프랑스의 병참 및 포격 전문가들, 

인도군이 파병한 기병대는 물론 쿠쿠리 단검으로 네팔의 구르카 부대까지 합류했다. 


 아랍 반란군 지도부가 아즈라크에 도착함으로써 부대의 편제가 완결되었다. 

반란군 지도부는 파이살 후세인을 선두로 누리 샬라인과 아우디 아부 타이, 

지난 2년 동안 로렌스가 아랍 독립을 위한 전쟁에 동참하자고 호소했던 여러 부족장이었다. 


 로렌스가 갑자기 무기력과 우울 증세에 빠진 것은 바로 이 시점,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바로 전날이었다. 

후세인과 다른 아랍 지도자들이 도착한 직후, 

그는 아즈라크를 빠져나와 아인 알아사드 라 불리는 비좁은 계곡으로 향했다. 


 사실 로렌즈가 이렇게 무너져가고 있다는 신호는 진적부터 있었다. 

앨런비가 공격 개시일을 결정한 7월 중순부터 

로렌스는 패기만만한 기백을 내보이기는커녕 우울한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로렌스는 첫 번째 공격을 불과 몇 시간 앞둔 시점까지 은신처에 숨어 있다가 

병력이 집결한 아즈라크로 돌아왔다. 


 9월 14일 오전에 아즈라크를 떠난 로렌스는 일주일 동안 롤스로이스 장갑차를 타고 

데라 일대 사막을 질주하면서 다리를 폭파하고 철도를 끊었으며 

적군의 어설픈 공격을 피하는 한편 오합지졸의 터키군 도보 순찰병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충분히 흡족한 성과를 거두었다. 


 팔레스타인으로 이어지는 터키의 전신망을 파괴했고, 

철로 세 구간을 폭파해서 시간을 지연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9월 18일 오후, 

그는 자신의 경력에서 79번째에 해당하는 철로 폭파 작업을 감독했다. 

이로서 아즈라크 특공대는 몇 시간 앞으로 다가온 앨런비 총공세의 전주곡 차원에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한 셈이었다. 


 엿새 전 아즈라크를 떠난 이후로 한숨도 못 잔 로렌즈는 

숙영지 야전병원의 주인 없는 간이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작가의 이전글 국민가수 결승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