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
“우리는 하나님이 첫날에 창조한 빛을 찾아 항해를 합니다. 빛이 항해의 목표입니다. 세계의 방방곡곡에서 점점 밝아오는 빛을 우리는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선원들은 신의 창조력에 감탄하며, 그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서려는 인간의 신앙심과 욕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의 대사는 베이컨이 종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은연히 드러내는데, 이곳에서의 빛은 하나님의 뜻과 그로부터 올 수 있었던 진보된 기술 모두를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빛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추구한다. 17세기의 과학혁명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빛’이었다.
그럼 이 대목을 어떨까?
“우리는 소리를 높여 저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다. 어둠의 혼돈 속에서도 기적을 행하시는 하느님, 태초 시커먼 어둠이 배회하는 수면에 마른 땅을 마련하신 하느님이신지라,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무사히 상륙하도록 은총을 베풀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위와 마찬가지로 신을 찬양하는 투이지만, 은근한 ‘데자뷰’가 느껴진다. 바로 성경에서 나타나는 창세기에 대한 묘사와 비슷한 서술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원들이 ‘벤살렘’ 섬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은 신에게 섬김을 행하여 은총을 얻은 것이며, 소리 높여 기도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그려진다. 죽음까지 각오하며 항해에 나서야만, 신이 내린 축복을 받을 수 있었고, 버림받는 삶이 아닌 구원받는 삶에 다다를 수 있었다.
<유토피아>와 <새로운 아틀란티스>의 두 작품 모두 “세계 어디에도 없는 곳”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페루에서 출발한 배가 조난을 입어 근처 섬에 정착하게 되는 계기로 발견된다는, 마치 ‘로빈스네이드’적인 스토리로 그 출발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와는 차이를 보인다. 또한, 뉴아틀란티스에는 솔로몬 학술원이 최고 학술기관으로 자리 잡고 있어, 세상의 지식과 기술을 국민들에게 전파한다. 이곳에는 오랫동안 배를 채워주는 빵, 바다를 잠수하는 배, 기계로 만들어내는 종이와 비단, 강력한 힘을 가진 대포, 인공으로 내리는 비와 눈, 마시면 오래 살 수 있는 천국의 물 등등 비현실적일 만큼 진보된 과학 기술이 존재한다. 또한, 현시대의 현미경, 유전자 복제와 같은 원리를 띠는 기술들도 보인다.
‘아틀란티스’란 예로부터 대서양 어딘가에 존재하는 신비의 섬, 미지의 땅으로 일컬어지는 곳으로서 보통의 인간은 진입할 수 없으며, 고도의 기술을 갖고 살아가는 차원 높은 생명체들의 나라를 의미한다. 베이컨은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 이곳을 태평양 근처로 상정하여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군주체제 국가로 그려내고 있다.
뉴아틀란티스의 사람들은 기술로 원하는 것을 성취해내고, 과학의 발전으로 번영과 복지의 풍족함을 누리고 살아간다. 심지어 솔로몬 학술원의 회원이 행차할 때는 금박장식이 수놓인 황금전차를 이용하며, 사파이어와 에메랄드로 구성된 판벽이 이들을 두루고 있다고 묘사될 정도이다.
유토피아에서는 모두가 ‘똑같이’ 열심히 일하고, ‘똑같이’ 봉급을 받아 살아가지만, 이들은 온갖 수많은 과학적 기술로 인해 이미 풍족하다. 정신적 쾌락, 높은 수준의 지적 성취를 ‘추구’해야 할 필요 없이 과학을 통해 하고 싶은 것들은 이미 그들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유토피아도 국가의 이념이나, 체제는 그 자체로 급진적일만큼 이상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고전적인, 또 보수적인 생각의 틀 안에서 과학 기술을 상상해냈을 뿐이다.
뉴아틀란티스의 사람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엄청나게 향상된 테크놀로지와 물질의 세계 속에서 합리적이고, 근본적인 힘에 눈을 뜨고 있었다. 모어가 ‘부’, 혹은 부의 추구를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면, 베이컨은 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과학의 혁명적인 역할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를 단지 세속적으로 추구하는 사회가 아닌, 그 이상의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사회가 처한 항해의 여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과학과 ‘하느님의 뜻’과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뉴아틀란티스에서 과학 연구 및 교육을 맡고 있는 솔로몬 학술원에서 가장 핵심적인 책임은 바로 사물의 본질을 발견해내는 데 있다. 그 사물의 본질은 그것의 형태나 표면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성격, 즉 신의 피조물로서의 의미에 있는 것이다. 솔로몬 학술원의 노력과 임무는 신이 창조한 세계의 만물들이 제 쓰임에 맞게 쓰이고, 값진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데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은 이미 완벽한 존재이다. 인간은 그들의 뜻을 전해받고, 우주의 질서를 이성적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신으로부터 그러한 능력을 부여받았기에 국가를 잘 관리 개선할 수 있게 되며,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바로 뉴아틀란티스이다. 이곳에서의 과학은 인간이 더 편리하게 살아가기 위해 그저 존재하는 ‘도구’로서의 의미가 아닌, 신과 더 가깝게 연결되기 위한 만물의 질서이자, 종교적 산물, 그리고 창조 신앙의 후예인 것이다.
현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종교와 과학은 양립할 수 없는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베이컨은 오히려 과학이 종교를 증명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신에 의해 과학을 탐구할 능력을 얻었고,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타락의 죄를 씻어내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다.
기독교적인 시선에서 인간은 이미 ‘죄인’이다. 그렇기에 과학은 신앙을 대체할 수 없다. 신앙을 뒷받침하는 재료로서의 과학은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하며,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해주는 혁신이다. 지금의 과학이 아무리 창조론이나 진화론의 싸움처럼 종교와 갈라서는 것 같아도, 이렇듯 신적인 영역과 그 출발점에서부터 엮여있었기에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근대 서구의 문명은 과학 발전의 형식과 시대로 구분된다. 뉴아틀란티스가 반드시 과학의 유토피아가 아니듯이, 우리 시대의 과학도 왜곡되지 않는 기반을 다져나가며 종교와 양대산맥으로서 학문의 기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유토피아>에서 ‘절제’는 최대의 미덕이다. 욕망의 절제, 쾌락의 절제, 자본의 절제, 폭력의 절제. 절제하지 않는 자는 유토피아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어떨까? 그는 마치 모어에게 “굳이 욕망을 절제해야할까?”라고 묻는 듯하다. 욕망을 절제할 것이 아니라, 그 욕망을 적절히 충족할 수 있는 과학적, 기술적 수단을 갖추면 된다. 사실,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읽기 전에는, 이 책이 당연히 당시 사람들이 상상해본 ‘신기술’에 초점을 둔 소설일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막상 내가 읽어낸 것은 종교-신화에 가까웠다. 주인공 일행들이 이 나라에서 진행 중인 연구들을 하나하나 알아갈 때마다 매우 흥미로웠지만, 또 절대 유토피아와 닮아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뇌리에 꽂혔다. 뉴아틀란티스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의 계시를 듣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양피지에는 십자가가 그려져있고, 솔로몬 학술원은 “6일 작업대학”이라 불리우며, 천지창조의 은유적 대상으로 위치한다.
모어의 <유토피아>와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모두 유토피아 계열 소설, 즉 이상향적인 국가상을 제시하는 내용을 가진다. 그러나 베이컨은 정치, 도덕관, 쾌락, 외교, 자본의 흐름으로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과학의 발전과 종교적 원동력을 관계지어 설명해냈다는 점에서 모어와는 차이를 보이며 더 근대국가의 태동과 밀접해보인다.
왜 항상 유토피아적인 국가들은 늘 다른 세계의 부분들과는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일까? 함께 살아가기보다는 고립을 택하고, 자신들만의 이상을 추구하는 이들은 단지 저자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을 묘사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존재한 것일까? 또, 플라톤, 모어, 베이컨 각각이 제시한 일종의 유토피아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는지, 혹은 위대한지를 자랑하는 식으로 스토리가 진행된다는 공통점으로 역시 귀결된다.
(어찌되었든 간에) 더 많은 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사고실험을 살펴보았다.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생각의 힘을 길러주는 그런 사고실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