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꿈꾸는 이상주의자,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라파엘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유재산이 남아있는 세계에서 법률을 집행하는 것은 불치병환자를 돌보기 위해 일시적인 완화의 치료방식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
결국에는 병을 완치해서 사회를 다시 건강하게 만들어줄 가능성이 “전혀” 없으니, 그 악덕의 뿌리를 뽑아 버려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모어는 물론 온전히 이 이야기를 맹신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곳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고, 노력한 것에 대한 보상과 권위가 보장되지 않기에 물자가 풍부해질 수 없는 위험한 환경이 될 뿐이라 생각하는 경향 역시 보여준다.
우리는 라파엘과 모어의 대화로 주를 이루는 이 책의 결론을 단순히 1부의 후반부에서 예측하기는 어렵다. 라파엘은 유포피아, 즉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곳”에서 사유재산이란 허락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모든 이들의 국가의 재산을 평등하게 나눠 가졌을 때 국가의 안정적인 통치와 행복한 국민만이 남는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어느새 책의 2부를 지나다 보면 어딘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이상주의적인 국가상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오던 모어는 결론적으로는 공동체 생활과 화폐 없는 나라는 전체주의의 표본이 되기에 국가의 존엄성을 해친다고 비평해버리는 것이다. 도대체 왜일까?
책의 제목을 통해 독자는 쉽게 모어의 유토피아와 국가에 대한 이상향이 급진적인 성격에 가까울 것이라 느끼게 되지만, 그는 놀랍도록 이성적이다. 행복한 사회는 딱 한 문장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작중에서 설명된 이상 국가 역시 완벽하게 이상적인 곳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의 결론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국가관이란 고민해야하는 것이며,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유토피아의 모델, 계획을 향한 결정들의 장단점을 비교해가며 사고실험을 해봐야하는 것임이 모어의 진심으로 밝혀진다.
이제, 쾌락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유토피아에서 허락되는 쾌락은 “정신적인” 쾌락에 가깝다. 이는 즉, 배움을 중시하며 함부로 육체를 놀려 가벼운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공부하는 것을 가까이하고, 학문적인 성취를 추구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속의 즐거움이 자라나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를 살아가는 자들은 하루에 배당된 시간 동안만 다 같이 노동하고, 그 외의 여가 시간 동안 학문을 기꺼이 즐긴다. 자신이 알던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몰랐던 것에 눈을 뜨기 위해 노력하고, 선하게 행동하고, 진리를 얻으려 하는 국민들은 그 모든 것을 통달했을 때 비로소 어떤 고차원적인, 높은 단계의 만족에 다다를 수 있다고 이야기된다.
쾌락이라 일컬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쾌락으로 여겨져서는 안되며, 선한 쾌락이 인간에게 행복을 준다고 말하는 모어는 육신에서의 쾌락 중 건강 역시 강조했는데, 병에 걸리지 않고 편안한 상태를 추구해야한다. 이 지점은 마치 유토피아의 국가관과도 맞닿아 있는데, 한 나라가 병리적인 상태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선한 것을 추구하여, 평안의 지평선에 놓여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플라톤의 국가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유토피아에는 과도하게 부가 몰리는 곳이 없으니 인민들이 궁색한 곳도 없다. 또한, 이들에게는 종교적 자유가 허락된다. 그들은 서로를 배척하기보다는 포용하고, 감싸 안으면서 인생의 같은 단계를 밟아 나간다. 이 곳 유토피아는 최소한의 법과 규칙으로 이룩한 도덕적 사회인만큼 갈등을 지양하고, 안정을 지향한다. 모두에게 이익이 될만한, 그러면서도 평화를 보장할만한 결정들을 위해 지식인들의 존재가 중요시된다.
이렇듯, 이들의 대외관계는 표면적으로 봤을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덕성스러운 것을 넘어서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원래 사회제도에 따라 저렇게 선할 수도, 또 어떤 (우리가 아는) 경우에 따라 악할 수도 있는 것일까 싶은 생각까지 든다. 이러한 사회윤리와 협조심 또한, 단지 모두가 균등한 재산을 분배받고, 미덕이 높은 가치로 평가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일까?
유토피아에서 전쟁이란 ‘계략’에 가깝다. 그들은 전쟁을 싫어하면서도 이를 대비하는 군사훈련을 혹독히 이행한다. 책의 앞부분까지 그저 아름다운 공상국가로 여겨지는 유토피아치고는 꽤 담대하고, 공격적인 처세를 보인다. 그럼에도, 육탄전은 최대한 회피하고, 아주 교묘한 책략을 통해 국가와의 갈등에 처신하는 것은 유토피아답다.
인간은 동물과는 다르기에, 외교술과 설득을 이용할 줄도 알아야한다는 것이 모어의 주장이다. 만약, 이와 같은 노력에도 결국에 물질적인 전쟁이 발발하면, 용병을 고용하여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느껴지는 유토피아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AI에 가까워보인다. “명확한 목표 설정에 따른 알고리즘의 이행”. 나는 이것이 유토피아를 설명하기에 아주 좋은 대목이 될 것 같다. 그렇게 덕스러운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자신들의 국가가 이전처럼 지켜질 수만 있다면, 차가운 이성으로 계획된 전쟁과 살인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가끔은 순간의 분노나 발작보다, 논리적인 치명타가 더 무서운 법이기에, 나로서는 이들이 지적으로 환상적이면서도, 어쩌면 그냥 고급스러운 ‘사이코패스’들 같기도 하다.
라파엘과 모어는 모두 모어의 분신이다. 라파엘은 이상 국가를 꿈꿔보고 싶었던 작중의 자신이라면, 모어는 현세의 모어의 가깝다. 라파엘의 주장은 사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동의하기 당연히 어려운 감이 있다. 여러 공산주의 국가의 몰락과 실패를 목격해오고, 심지어는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 우리의 동포들도 여전히 공산주의 아래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면서 그것을 동경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초점을 두어야 하는 곳은 이 시대가 아니다. 16세기에 지어진 이 저서는 당시로써는 엄청나게 혁명적으로 재산에 대한 분배의 이상향을 제시한 것이다. 신분 차이와 사회계급은 그들로 하여금 삶의 자유를 억압하고, 절대로 무너트릴 수 없는 “통곡의 벽” 같은 존재였다.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의무이기에 반의를 갖지 않는 이들이 더 많았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공평이 당연한 시대에서 평등의 단초는 실제 그것이 가져올 효용성보다는 엄청나게 큰 파급력과 기대감을 낳았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어는 라파엘의 의견에 기댈 수 없었다. 라파엘이 주장하는 이상 국가의 모델은 애초에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이라는 것은 아무리 거리를 두고, 똑같이 나누려 한다고 한들 쉽게 그리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조금의 자본을 더 착취해내는 세력은 등장한다. 모두의 이익을 동시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공동체에 속한 모든 이들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생각해보면 굉장히 비인간적이다.
인간은 각자의 특별함을 가지고 태어난다. 각각의 인간은 타인이 가진 것을 갖지 못했지만, 또 타인이 가지지 못한 것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들을 두고 공동체의 이익이 중요하다는 명목하에 획일화를 당연시하는 것은 마치 하나의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억지로 꺾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이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과정은 결과만큼이나 중요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즉 ‘대의’에 따르는 희생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것 역시 절대 아니다. 개인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것은 선택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각자의 선택이 없는 세상은 흑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나에게 있어 유토피아는 모두가 평등하게 행복하고, 평등하게 불행한, 그 어떤 원동력과 다이나믹조차 작용하지 않는 곳으로 느끼게 된다. 유토피아는 아름답지만 인위적이고, 이상적이지만 빈틈이 많다. 그 이상이 완전한 ‘이상’으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상은 이상일 뿐, 닿을 수 없기에 닿으려 하고픈, 어쩌면 닿으려 해야하는 것이 된다.
결론적으로 모어의 ‘진심’은 ‘이상’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도, 또 완전히 들어맞는 것도 아니게 된다. 그러나 조금 더 가까운 쪽은 전자라고 보인다. 모든 '이상적인 것'이 그렇다고 꼭 '비현실적인 것'과 동의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그것도 여러 인간이 이루어 살아가는 세상은 그만큼 복잡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어는 유토피아의 전체를 현실세계로 끌어오자고 말하고 있지 않다. 부분 부분을 종합해,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을 취하고, 버릴 것을 버리는 태도가 요구된다. 그가 이러한 사회를 두 자아의 대립을 통해 모순적으로 꿈꾸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앞으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사고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구체적인 공상, 계획, 그리고 실천만이 완벽한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실질적인 고민과 인식은 늘 뒷받침되어야 하는 숙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