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벨러미의 <뒤를 돌아보면서>
<뒤를 돌아보면서>에 등장하는 20세기 사회에는 어떠한 ‘정치적 성향’이라는 것이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정당이나 정치인이 없고, 외교적 갈등이나 전쟁이 없으니 이를 대비할 군인도 없다. 그러나 국민을 통치할 윗사람들이 아예 없어서는 국가를 운영하기 힘들다. 이 나라의 정부는 국민들의 임금 노동 활동을 관리하고, 산업 정신의 필요에 따라 국민들을 배치하여 일을 도맡게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유토피아와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당연히 사유재산 따위는 존재할 수 없고, 사법부와 검찰, 경찰부가 구분되어있지 않으며, 원하는 주택을 모두가 소유할 수 있는 배정 시스템을 갖추었고, 모든 자본의 흐름이 정부의 손아귀에서 통제된다. 베이컨의 <뉴-아틀란티스>가 과학 문명 하의 유토피아라고 했다면, 이곳은 일종의 현대적인 유토피아이다. 그렇다면 ‘현대적’이라는 용어를 조금 정리해보고 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떻게 어떠한 화폐조차 없는 곳이 현대적일 수 있을까?
우선,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주인공 청년, ‘웨스트’가 당시로부터 100년이 넘어가는 미래인 2000년의 한 도시에서 눈을 뜨는 것으로 시작된다. 미래 사회주의 이상국가였던 이곳에서는 모두가 신용이라는 것을 부여받고, 그에 맞게 필요한 물건을 ‘빌리는’ 식으로 얻을 수 있다. 직업 역시 국가 차원에서 지정해주는 견학 기간을 통해 자신의 재능과 성향을 파악한 다음 정하게 된다. 현시대를 생각해보면, 이곳과 매우 다른 것 같으면서도 매우 닮아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교육과 직업 선택의 기회를 정해진 시간이라는 요인을 통해 제공한다는 점, 그리고 종잇돈을 따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그 당시로써 ‘신용카드’를 예상하다니 안 놀라울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이곳은 ‘유토피아’이기에 현실적으로 존재 불가능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유토피아는 그것을 사고실험 하거나 일정한 방향성에 맞게 ‘추구’될 수는 있는 존재이지만, 실제로 이상과 현실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요소이다. (추구와 실현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이곳을 살아가는 국민들은 모두 자신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봉사자라고 인식한다. 만약,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버리고, 오히려 극단적인 이타주의를 선택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다. 이들처럼 국가가 제공해주는 교육에서 ‘필수적’인 즐거움을 느끼며, 자신들이 국가의 도구이자 피고용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늘 호의적으로 인식하고, 지적이고 교양있는 부모들만이 아이를 키울 수 있다면 어떨까? 내가 이 사회에 대해 한 가지 마음에 든 부분이 있다면, ‘부분’이 ‘전체’를 삼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쉽게 부분이 전체를 가려버린다. 예를 들어,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학생으로서 충분한 자격이 없다. 열심히 하지 않는 아이는 더 그렇다. 그러나 왜 아이들이 그렇게만 평가되어야 하는가? <뒤를 돌아보면서>의 사회처럼 학문, 인성, 운동 등 많은 측면의 능력으로 그들을 바라봐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된다면 단언컨대 ‘청소년 자살’ 등의 극단적인 사례 비율을 조금은 줄일 수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머리 좋은 것이 1번 가치인 우리 사회와 달리, 정신에 더해 신체에 대한 교육도 스물한 살까지 지속된다는 점 역시 긍정적으로 보인다.
이타심은 근본적으로 평등을 부른다. 자신을 잠시도 내려놓기 힘든 우리 사회 체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사회에도 문제는 존재한다. 정말 결과가 그렇게 아름답기만 할 수 있을까? 슬픈 이야기지만, 다수가 소수를 위하는 구조가 아닌, 다수가 다수를 위해 일하는 구조는 일단 오래 지속되기가 애초에 힘들다. 누군가는 체제에 반기를 들기 마련이고, 절대 순응적이기만 할 수는 없다.
이타주의를 장착하고 있는다 한들, 어떠한 영역적인 제한 없이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게 자신을 몸 다 바쳐 노동하기란 인간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능력이기 때문이다. 또, 상대적인 우월감과 박탈감에서 행복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행복하다면, 모두가 불행한 것은 아닐까 생각할 것이다. 그런 소위 ‘속좁은’ 생각을 하지 않게끔 조기교육을 받고,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노동하고 휴식할 권리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그 누구도 억울해하지 않고 즐길 수 있다면 어떨지 감히 상상해보고 싶다.
이 작품은 그 자체로 배울 것이 많고, 흥미롭지만 비판점이 될만한 부분도 굉장히 많다. 인간 세계가 현재 갖춘 사회 경제체제는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다 그에 맞는 시대적인 흐름과 이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인간의 선험적인 본성에 대해 많이 간과한 것은 아닐지 재고해보고 싶다. 국가를 통솔하는 ‘구조’는 인간 개개인의 선호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닌, 복합적인 이해관계와 수많은 변수에 의해 생성된 것이다.
이를 고려하면,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는 국민보다는 자신의 가족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눈앞의 이익을 우선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는 가족 문화, 소비문화 중심의 산업 구조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나는 벨러미가 현재를 고려하기보다는 너무 거시적으로, 혹은 미래지향적으로만 사회구조를 재설정했고,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욕심’이라는 커다란 숙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인간을 달리 이해해보려 했다는 점에서 조금은 와닿지 않는 부분이 있다.
또한, 저자는 비폭력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가지의 차원만으로 새로운 이상향적 국가를 실험, 설립해 보고자 이 작품을 써냈다. 사회가 ‘진화’할 수 있을까? 벨러미는 그렇다고 보았다. 사회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 나은 방향은 ‘극단’의 ‘제거’라는 핵심적인 문제 해결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신기한 점은 보수에서 진보로 나아가는 것을 기본적인 진화라고 보는 당대 사람들과는 다르게, 벨러미는 ‘보수’에서 긍정적인 미래상을 발견했다.
기독교적이고, 평등-친화적인 소설 안에서 우리는 그의 많은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당연하게도 그는 사회를 바꾸기 이전에 인간을 먼저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의식이 교화, 각성되어야만 큰 단위의 국가가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뒤가 조금은 안 맞는 측면이 있다. 사람이 먼저 바뀌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작가 본인이 그것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사람은 바뀔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 왜 유명한 말 있지 않은가. “사람은 고쳐 쓰는 것 아니다”. 인간이 쉽게 변화하고 계몽될 수 있었다면 이런 말은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계급’을 혐오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위계’를 사랑한다. 모든 것에 위계 매기기를 즐기며 ‘정리’라는 행위는 마치 위계질서(hierarchy)에 따른 도표와 위치에 대상들을 설정하는 과정이 되어왔다.
인간이 계급을 싫어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남보다 못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면 그들이 사회 체제로 계급을 사용해온 이유는 참 모순적이게도 “남보다 나은 위치에 포진되고 싶어서”가 아닐까? 물론 지금에야 ‘비인간적’이라는 명목으로 많은 문화에서 소실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저자가 인간에 대한 이해 없이 사회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하려고 했던 것이 이 작품을 비판할 어떤 큰 ‘먹잇감’을 던져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인기가 있는 것들은 때로는 반향을 받기도 하는 법이니, 그의 작품은 비판점이 있기에 더욱 회자될 거리를 남겨준, 훌륭한 유토피아계 실험 정신의 결과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은 19세기 후반을 살아가던 인물이 20세기에서 눈을 뜨게 된다면.. 이라는 판타지적인 가정으로 시작하여, 이미 미국 사회가 유토피아를 이루었을 것임을 전제했다고는 하지만, 꼭 19세기 사회가 20세기 사회보다 ‘못하다’라는 법은 없지 않나 이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작품의 줄거리를 가능케 하는 ‘시간여행’은 그 자체로 비현실적 요소이지만, 시간여행을 해서 도착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작품의 작가인 벨라미 역시 자신의 <뒤를 돌아보면서>는 대놓고 “정치적인 선전물”이라고 언급했다고 전해질 만큼 직접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 메시지는 바로, 인간이라면 앞으로 일어날 사회의 변화에 대해 늘 경각심을 가지며 깨어있고 눈을 떠야 한다는 것, 그리고 혁신에 대한 의심과 반문은 그곳에 항상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확신은 금물이다. 만족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아무리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사회여도,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허다하다. 완벽한 신이 설계한 사회라고 해도, 인간은 언제나 아프고 언젠가는 죽는다. 신의 뜻을 온전하게 해석하여 구원을 성취하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자본주의에는 많은 불편함과 비판, 모순이 따른다. 이 사회는 그런 것들이 모두 해결되어있지만, 국유화는 그것 나름의 문제가 있다. 벨러미가 예측한 미래는 자본주의가 뒤엎어진 세상이 아닌, 너무 발전되어가다 보니 역으로 그 특징들이 ‘0’이라는 좌푯값으로 귀결된 상태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도 떠오르는 지점이다. 진정으로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사회 보장제도가 실천되며, 모두가 미래를 희망적으로 그릴 수 있는 사회가 도달한다. 충분한 통제와 공급은 개개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처럼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유토피아계 소설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일종의 “서술자의 한계”를 겪는다. 그것이 의도된 한계인지, 의도하지 않은 부족함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개개인에 대한 차별이, 공통되지 않은 규범과 규정이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이 아닌, 그저 인간 그 자체로 만들어준다는 것에 대해 그닥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 하다. 주체성과 능동성, 자립성은 인간의 정신적 생존에 필수적이다. 특히, 살아있다는 그 ‘느낌’에 더 필수적이다.
“느낌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니 국가의 구조에 잘 종속당하라”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정신보다 육체가 더 중요하니까 둘 중 하나는 포기해”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사실, 이 소설의 길이는 그리 긴 편이 아니다. 짧고 굵게 미래 사회를 예측했지만, 또 아주 날카로운 시선이 담겨 있기도 하다. 유토피아임에 동시에, 실현 불가능한(불가능해야만 하는) 디스토피아인 이곳은 철저한 계산 하에서 인간소외를 이룩한다. 자신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했다고 믿는 모든 일이 알고 보면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닌 곳. 그러고 보면, 요즘에도 어느 정도는 이 사회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소비자 추천 콘텐츠, 맞춤 서비스, 타겟을 겨냥한 광고, 유튜브 사용자 알고리즘 등등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소비하기보다 기업 양산의 형태로 원하기를 바라는 것들을 원하게 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렇게 믿는 것들을 위주로 소비하며 그 순환의 굴레는 반복된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비판의식을 가지고 사회적 ‘맹인’이 되지 않도록 발버둥쳐야 한다.
이미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회인이라면, 또 무언가를 소비해야하만 생존이 가능한 소비자라면 미디어와 산업구조에 지배를 받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순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같은 것을 반복해서 원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국가라는 공동체의 ‘부품’이 아닌, Practical한 프롤레타리아가 되어야 한다. 반면으로는, 융통성 있는 노예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벨러미가 20세기에 태어났다면 이러한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는데는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추구하는 사회, 더 나아가서 인간 존재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잠시라도 우리 현실을 벗어나 이 사회를 상상 속에서 살아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가” 하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