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의 <영광의 길>
왜 “영광의 길”일까? 보통 “영광”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순간은 빛나고 대단한, 영웅스러운 인물의 ‘성공’과 직결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단 한 번의 ‘성공’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영광의 그림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전쟁은 그 자체로 참혹하다. 어떤 방식으로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듯이, 그 폭력의 집약적 형태인 전쟁 역시 당연히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분리해서 바라볼 수 없는데, 그것이 완벽하게 인간 내적 이유에 기인하는지, 사회적 이유에 기인하는지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즉, 인간이 태초에 악함을 가지고 태어나서인지, 혹은 살다 보니 사회적 요인에 의해 악함을 얻은 것인지)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점은 전쟁을 이용해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려는, 남을 밟아가면서 위로 올라가려는 태도는 멀리 봤을 때 절대로 자신을 위한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보통의 전쟁 영화는 주인공이 자신에게 닥친 고난과 시련을 결국 이겨내어 승리를 거둔다.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주변 인물, 몇 번의 작은 실패들이 수반되지만, 영화 전반에 걸쳐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과정 + 완전한 결말이 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일지 모르지만, 영화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플롯을 구성한다. 주변 인물이 영화 중간, 더욱이는 이후에 겪는 일들에는 감독과 관객 모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광의 길>에 등장하는 군인들에게는 각자의 자아와 용감함이 있다. 삶과 고통, 희망이 있다.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오히려 다수의 군인은 마치 전쟁이라는 대의에 희생되어도 그닥 상관없는 대상으로 여긴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어떻게 저럴 수 있지?”하는 의문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특히 ‘당시(제 1차 세계대전)의 군인’에게 긍정적으로 여겨지는 가치는 오직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 자신의 한 몸을 바쳐 더 많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감독이 사단장 ‘미로’를 통해 관객이 느꼈으면 했던 감정은 분노이다. 미로는 납득할 만한 이유로(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거나 가족의 목숨이 달려있는 등) 자신의 부하들을 유사 ‘자살행위’를 하도록 밀어 넣은 것이 아니었다. ‘승진’하는 것. 총사령관에게 잘 보여 더 큰 명예를 얻는 것. 높은 직급의 사람임을 보여주는 배지를 옷에 거는 것. 이것들이 그에게는 부하가 죽을 것을 알고도 방관한, 아니 그들의 죽음을 부추기는 마땅한 이유로 작용한 것이다.
이 영화와 다른 전쟁 영화가 가진 성격과 철학은 서로 다른 면은 물론, 비슷한 면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제복을 입은 장교들과 현장에서 뛰는 군사들, 그들의 참혹한 부상과 희생, 국가 간의 외교적 관계가 낳는 인민의 불행 등 표면적으로는 전쟁 그 자체가 소재가 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필자는 <영광의 길>의 스탠리 큐브릭이 비판하고자 했던 군대식 사고방식은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논의한 ‘악의 평범성’과 아주 밀접한 관계성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악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 일상 속에서도 악은 여러 가지 형태로 숨어들어 조금씩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나약한 인간일수록 더 쉽게 ‘악’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들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 누가 100퍼센트의 악인, 100퍼센트의 선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단장 미로 역시 사령관의 명령을 듣고, 그것을 성실히 따랐을 뿐이다. 그러나 이 ‘성실함’은 누군가의 삶을 빼앗는다. 비판적 사고는 중요하다. 특히 투철한 시대정신과 굳건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 밑에서 일해야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상사의 명령에 대해 “옳은가, 옳지 않은가” 곱씹어보지 않고, “모두가 다 그렇게 하니까”, “그런다고 내가 죽는 것은 아니니까”라고 생각하며 그냥 넘어가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 맹인이 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이 편협, 이 맹목은 결국 나에게 돌아와 남은 삶을 고통스럽고 죄악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쓸데없이 악한 ‘미로’보다는 군사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고, 자신의 몸을 던져 리스크를 무릅쓰며, 자신의 사람으로 아꼈던 '의리파' 닥스 대령도 자신 나름의 악을 행하고, 명령계통을 끝내 벗어나지 못하여 무모한 전략으로 부하들을 위험에 처하게 했다는 점에서 ‘악의 평범성’의 중심에 서게 된다. 브롤라드는 닥스에게 “당신은 고집 센 이상주의자야”라고 이야기하며 언제나 결과가 좋을 수는 없다, 우리의 탓은 없다는 점을 강조하려 한다. 그 역시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느꼈기에 역으로 이런 이야기를 반복했을 것이며, 프랑스군이 독일군보다 못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 그 하나에 목매어 이런 일의 시초를 만든 것이다. ‘브롤라드’의 사고방식은 그대로 ‘미로’에게 전해지고, 결국 ‘닥스’ 대령도 그닥 혁명적인 생각을 시행하지 못하게 되며 계승되는 전쟁주의를 양산한다.
<영광의 길>은 흑백필름으로 제작된 반전영화이다. 전쟁을 주제로 하여, 반-전쟁주의를 드러내는 영화가 지금에야 많지만, 당시로는 나름의 큰 의의를 지니고 출발한 작품이었다. 카메라는 군인들이 발맞춰 행진하는 장면이나 계급에 맞는 자리와 의자의 위치를 자주 비추는데, 그 ‘전체주의’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취급되는 ‘용기’ 역시 아주 신랄하게 전쟁을 비판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보통 용기는 체제 순응적일 수 없다. 체제 안에서만 존재하는 용기는 높게 평가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존재하는 용기는 ‘철저할’만큼 위계 하에 놓여있다. ‘불길한 예감’의 형태로, 앞으로 일어날 끔찍한 결과를 알고 있었음에도 막지 못한 참사는 ‘닥스’ 대령에게는 일종의 죄책감으로, ‘미로’ 장군에게는 비겁한 남의 탓으로 돌아왔다. 전쟁 중의 용기는 무모한 것이다. 내 목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국가의 권력과 명예에 조종당하는 것, “그 끝이 죽음임을 알면서도 따르는 것”이 바로 비판되어야 마땅한 그 시대의 용기였다.
정부는 민간인들로 하여금 참전을 독려한다. 그 “위장된 기만”은 우리에게 전해져 많은 이들이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포기하고,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용기 있게 행하게 만든다. 그렇게 용기 있게 출범한 인간들이 막상 전쟁이 시작되면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숨어버린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버린다. 같은 참호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분열은 일어난다. 같은 편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내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기에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생사를 함께하며 동고동락하는 이들에게 있어 이 정도의 불행이 어디 있겠는가.
‘영광의 길’은 없다. 목적 없는 하루하루만 있을 뿐이다. 무기력함은 무능함을 부르고, 무능함은 존재의 한계를 보여준다. 좋은 방향으로 변할 수 있는 전쟁이라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용기가 부족하다"라는 죄목 하에 죽음을 당해야했던 군인들에게 전쟁은 무엇이었나? 아마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지키는 것이라는 의의에는 한발치도 다가가지 못하고,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다가 죽으라는 명령에 그것 마저 잘 따라야했던 것, 즉 자신과 타인, 그 누구를 위한 일로도 남지 못한 것이지 않았을까.
한편, 전쟁과 가장 관련있는 키워드는 '죽음'이기도 하다. 인간은 선험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은 현세의 끝이며, 암흑이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죽음은 당연하게도 정해진 미래이자 ‘전지적’인 절벽이고, 인간이 가장 피하고 싶은 순간이지만, <영광의 길>에서 나타나는 처형 장면은 ‘신’이 아닌, ‘인간’이 인간에게 행할 수 있는 최대의 형벌이자 심판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부정적 인물의 포지션을 맡은 ‘미로’는 작전이 실패한 것이 절대 자신의 부족함이 아닌, 그에게 있어 승진의 ‘수단’에 불과한 부하들의 멍청함과 소심함 때문이라 믿는다. 합리화도 이런 합리화가 없을 것이다. 그는 그토록 원하던 승진이라는 결과에 실패하였고, 그에 대한 분노를 풀 대상이 필요했다.
보통의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병사들 가운데 유력한 특정한 인물을 색출하여 작전 실패의 원인을 추궁하고, 그에 ‘적절’한 처치를 내릴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 그대로 ‘랜덤’하게, 군사 중 아무 인물을 데려와 군법 재판에 호송하여 많은 이들 앞에서 처형하게 한다. 명확한 이유는 없다. 재판도 흐지부지다. 처형을 진행하는 그들은 어차피 죽어야 하는, ‘정해진’ 명령의 희생양들을 일일이 신경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일정하게 들려오는 북소리는 관객의 긴장감을 높이면서도, 이상하게 차분한 감정이 들게 한다. 본인이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는 군인 한 명은 소리높여 울지만, 신부는 주님의 뜻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며 아무렇지 않게 이 상황을 지켜본다.
이것이 인간이 신앙을 도구화하는 방식이다. 또 다른 말로 하면, 각자의 역할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도구주의로 변질되는 것이다. 사형당하는 이는 잘 사형당할 의무가 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신부는 기도만 잘하면 된다. 사형대에 오르는 군인들의 모습을 비추는 카메라는 생각보다 뒤에 배치되어있는데, 이것이 마치 별일이 아닌 듯한 시선으로 그들을 관조한다. “발사”하는 명령 소리와 함께 군인들은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카메라는 죽는 이들의 곁이 아닌, 총성을 울리는 이들 옆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해학적이고, '블랙유머'스러운 이 장면은 영화의 본질적인 메시지를 역전시켜 제시한다.
‘미로’는 왜 그랬을까? 나는 이 관점에 집중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그라는 사람은 어쩌다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 공감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일까?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것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다. 군인들뿐 아니라 ‘미로’라는 악인 역시 시대의 희생양이다. 그 역시 결과적으로 임무의 쓰디쓴 실패를 겪었고, 많은 전투 경험으로 쌓아온 자아와 믿음이 무너졌을 것이다. 내가 본 ‘미로’는 ‘악’하다기보다, ‘무지’하다. 뭐, ‘무지’ 역시 ‘악’이긴 하다만, 미시적으로 봤을 때 의도적으로 보이는 악행도 거시적으로는 무지에서 오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이다. 군대에서 여겨지는 1번 규칙이 “상관의 지시를 잘 이행하는 것”이라면, ‘미로’만큼 군인이 천직인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하들의 그 착실함을 계산했다. 그들이 기꺼이 자신의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따르기로 했음을 알고 (어떤 측면으로는) 이용한 것이다.
‘미로’에게 있어서는 인간이 모두 동등하지 않다. 사람이 국가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종속된 것이 사람이다. 전쟁 중의 인민은 당연히 국가를 위한 충성을 자신과 주변인의 생명보다도 큰 것으로 알아야 한다. 그의 이런 그릇된 신념은 관객으로 하여금 서술자의 한계와 비슷한 ‘답답함’을 자아내는 것이다. 제도와 권력에 순응하는 것이 애국이고, 완벽한 시스템의 유지를 위한 기저가 된다는 '미로'의 믿음은 큐브릭의 시선 하에서 철저히, 비타협적으로 비판되고 있다. 잘못된 체제는 폭력이다. 마치 엄청난 질서를 가진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질서인 것이다. 체제화된 폭력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속에서 수많은 '탈인간화'의 결과를 양산한다.
결국, 전쟁이라는 비극 안에서 죽게 된 군인들은 인간으로서 받아야 할 최소한의 대우도 받을 수 없던 공동체의 시공간을 버텨야 했던 것이며, 더 안타까운 점은 자신들은 그것이 당연한 삶의 수순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야 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큐브릭의 영화들은 늘 강력한 주제의식과 어두운 분위기를 띄는 것이 특징인데, <영광의 길> 역시 “전쟁은 언제나 불행을 낳는다”, “악습의 대물림과 계급의 악순환은 결국 치욕스러운 역사만을 만들 뿐이다”라고 외치는 듯하다. 더이상 영광이나 명예라는 명목하에서 전쟁을 미화할 생각을 해서는 아니 된다. 그렇게 아름답게 포장해서 얻는 것은 일시적인 성취감이며, 장기적인 패배감이다. 전쟁은 사실 남의 일이 아니다. 현시대에도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크고 작은 내전들, 아프가니스탄 사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등 아직도 인간은 인간을 위협하고, 서로가 살아갈 삶의 터전을 빼앗으려 하며 당장 눈앞의 이익밖에는 보지 못한다. 전범국가들은 자신이 구조적인 계획하에 행한 일이 진정으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그 참패에서 얻은 것이 과연 자신들만의 아픔인지를 늘 반성하며 저지른 것에 대한 죗값을 치르며 살아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카바레에서 여인의 노래를 듣는 군인들의 모습을 비춘다. 처음에는 무대 위에 선, 전쟁 중인 국가 ‘독일’의 여인을 희롱하고 무시하며, 놀림의 대상으로 여기는 군인들이지만, 그녀가 울면서 노래를 시작하자 다들 알 수 없는 의미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 영화의 감독인 큐브릭이 군인들은 단지 전쟁의 도구가 아닌, 개개인의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장면을 넣지는 않았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볼 수 있다. ‘군인’의 직급의 이름이지,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각자 자신만의 개성과 취향, 목적과 구별성을 지닌 개인들이 모여 시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군상을 이루게 된 것이지, 군상의 일부로 사람을 보는 것은 잘못된 접근법이다. 당시는 슬픔의 시대이자, 고통의 시대이다. 범세계적으로 공유된 아픔은 잘못된 가치관을 양산했고, 그 가치관은 다시 아픔을 낳았기 때문이다. 현실은 냉혹하다. 한낱 장난질이 아니다. 끔찍하게도 세계의 균형을 맞춰가는 과정은 발전이 아닌 퇴행이 되어왔고, 그 속에서 많은 이들의 무고한 희생이 수반되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예술의 힘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술은 단지 기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화려한 기교보다도 중요한 것은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렇기에 예술에는 윤리적, 사회적, 문화적 책임과 권리라는 것이 부여되고 예술가는 시대적 감수성을 가지고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 아무리 예술가와 예술을 분리해서 평가하자는 목소리가 높아도, 절대로 작품과 창작자가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카바레 씬에서 군인들이 흘린 눈물은 여인의 목소리가 구사해낸 완벽한 음정이나 이보다 더 정확할 수 없는 리듬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전해준 그녀의 아픔, 국가의 아픔, 또 시대의 아픔은 고스란히 군인들의 마음속에 흘러들어와 눈물로 배출되고 있었다.
예술은 신념, 종교, 국가, 갈등, 전쟁을 뛰어넘어 형용할 수 없는 형태로 이어지고, 사실 다 같은 과정을 겪고 있다는 비언어적인 소통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고귀하다. 닥스 대령은 이제 군사들을 이끌고 이동해야 한다는 명령에도, “그들에게 몇 분만 더 시간을 주지”라 하며 융통성 있게 처신한다. 예술은 딱딱하기만 한 환경에서도 잠시의 여유를 주고, 잘못된 생각을 지닌 사람에게도 따뜻한 마음이 우러나오게 만든다. 나에게 있어 이 영화의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카바레 씬인 점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한다. 전쟁은 서로의 차이를 강화하는 데서 그치지만, 예술은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동등한 인식 선에서 경계를 허무는 것까지 나아간다. 그렇기에 힘든 시기일수록 예술의 역할은 빛을 발하고, 예술은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필수적으로 추구되며, 필연적으로 향유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