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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학살과 인종 차별, 원리는 똑같다?

아트 슈피겔만의 <마우스>로부터의 발견

by young


여기, 인간 본성으로부터 국가와 정치 관계가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날카롭게 짚어낸 작품이 또 하나 있다. <마우스>는 <이것이 인간인가>와 홀로코스트를 회상해내는 방식에서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이 책에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이 담겨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과 뭐가 다르냐”는 비유적인 지적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나치’적이고, 한편으로는 ‘희생양’적이다. 같은 인간임에도 태어난 환경, 선택한 길로 인해 인간이 같은 인간을 죽이고, 지배하고, 탄압해온 일은 역사 속에서 비일비재하다. 또, 인간은 정치-사회에 의해 원하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되기도 하지만, 타인의 삶은 단 1초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를 (이상한 방식으로) 추구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나치’적인 인간은 어떨까? 그들이 되려면 어떤 최소조건이 성립해야 하나. 꼭 대량 ‘학살’을 일으켜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독단적인 결정으로 나와 상대를 구분하는 것은 나치즘의 출발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죄책감이라는 화두는 이 책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데, 생존자들에게 주어지는 가혹한 벌은 단지 끔찍한 트라우마가 아닌, 두고 온 이들에 대한 연민과 회피한 책임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써 죽는 날까지 그들을 괴롭히게 된 것이다.



<마우스>의 장르는 그저 “Cartoon”, 즉 만화가 아니다. “Graphic Novel”, 만화 형태를 갖춘 소설, 결국 ‘소설’이다. 깊이 있는 내용과 무거운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법에 무엇이 있을까? 가독성 있는 문체가 될 수도 있고, 여러 시각자료와 함께 잘 구분된 문단, 내용의 이해를 돕는 각종 주석이 될 수 있겠다. 이 모든 것을 합친 것, 그것에 접근하기 좋은 친숙성까지 갖춘 것의 결과가 바로 ‘그래픽노블’이었다. 감히 예상컨대, <마우스>는 그래픽노블의 형태로 출판되었기에 더욱 명작 중에 명작으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책의 1부는 “아버지에게 맺혀 있는 피의 역사”라는 부제와 함께 시작된다. 저자 슈피겔만의 아버지는 <이것이 인간인가>의 주인공 레비와 마찬가지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로 살아남았다. 슈피겔만은 자신이 유대인인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안네의 일기> 속 안네와는 다른 성향을 띠고 있는 듯 하다.) 그 정체성에 대한 거부는 해결되지 못한 채 그를 성장의 길목으로 밀어 넣었고, 어떻게 보면 삐뚤어진 신념을 가진 채 (보편적인 기준에 따른) 어른이 되도록 만든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각 국가가 가진 특징을 풍자, 은유한 형태로 드러난다. 독일인은 고양이, 유태인은 쥐, 미국인은 개, 폴란드인은 돼지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 그러하다. 또 유쾌한 지점은, 유대인이 폴란드인을 표방할 때 쓰는 가면은 ‘돼지’ 모양이라는 점이다. 고양이와 쥐, 이 둘의 관계는 어쩌면 유치할 정도로 코믹한 앙숙으로 보이는데, (톰과 제리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것의 영향일지도 모르지만,) 또 고양이와 공생해야만 하는 ‘억압’ 속 쥐들의 입장을 가장 명확하게 대변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는다. 때때로 우화적인 표현은 가장 치밀하게 독자에게 와닿는 날검이 되어와 꽂힌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마음은 전염되기 마련이다. 모든 인간 악의 근원은 어쩌면 증오와 이기심에서 출발하는 것일지 모른다. 왜 종족을 구분해야만 하는가?


청동기 시대 이후, 우리는 ‘국가’라는 집단에서 늘 벗어날 수 없었다. 국가는 있어야만 하는 시스템이자, 없어서는 안 될 구조이기 때문이다. 울타리 안에 있어야만 안정된 느낌을 받는 현대인들은 사회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조금은 더 세련된 가축으로서 스스로를 가둬왔다. 쥐 안에서도 서열은 존재한다. 집쥐와 들쥐. 이들은 같은 뿌리를 가지면서도 절대로 서로를 같은 족속이라 여기지 않는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이나믹하고, 극적인 흐름 속에서 어투는 항상 격앙되어있다. 왜 블랙코미디로서 <마우스>가 가진 아픔에 대한 철학, 윤리에 대한 고뇌, 그리고 세계대전에 맺힌 한의 공명이 큰 울림을 갖는지 알 것 같은 대목이다. 또한, 책의 삽화는 극의 진행을 비꼬면서도 도와주는데, 나치 표식을 상징하는 사거리의 갈림길, 볼드체로 적힌 몇몇 감정 묘사, 동물들의 옷차림, 소금 하나를 통해 어머니를 무시하던 아버지상의 구현 등 많은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들은 책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간다.




도대체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 <이것이 인간인가>가 레비 한명의 시선에 따라 나름은 편협하고 주관적이었다면, <마우스>의 슈피겔만은 냉철한 객관성을 가져왔다. 단순히 잘잘못을 따져 홀로코스트를 바라본다면, 누구에게나 가해자는 나치, 피해자는 유태인일 것이다. 그러나 슈피겔만에게 있어서만큼은 이렇게 딱 잘라 떨어지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다.

누구나 선인이 될 수도, 악인이 될 수도 있다. 어떤 환경에서 자라 어떤 시대를 마주했냐에 따라 다른 선택을 만들고, 달라진 선택은 우리를 다른 삶을 살아가도록 이끈다. 그의 개인사만 보면, 그 내적 구조에 초점을 두면, 그는 온전히 불행하다. 그러나 불행은 되물림되기 마련이다. 그의 아버지의 불행은 그에게 돌아오고, 그의 불행은 자기 자신, 더 나아가서는 다른 이들에 대한 미움으로 발산되었다. 막상,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이길 표방하면서 성별, 문화, 인종에 있어서 상당히 차별적인, 권위적인 태도를 취하는 그는 흑인은 대놓고 자기들보다 못한 존재라 믿는 것이다.


그 생각은 오롯이 자신의 것 만이 아니며, 또 시대의 좁은 ‘틈’을 탄 결과이지만, 어찌되었든 독자는 슈피겔만을 통해 누군가를 향한 비판을, 그리고 사실 더 가까이에 있는 비판의 대상인 저자를 담담히 마주하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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