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르소 데 몰리나 <돈 후안>
돈후안의 삶의 목적은 여성을 정복하는 것이다. 그녀들이 자신에게 넘어온 것을 확신했을 때 가장 처참하게 그들을 내던지고 쾌감을 느끼는 것이 그가 생존하는 방식이다. 그처럼 육체를 가지고 이런 행위를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에는 분명 문제 삼을 부분이 존재한다. 저자 역시 그의 행위가 부조리한 것을 넘어서서 병적인 환자라 비판한다. 모든 것은 과유불급이다. 어떤 이는 사람에 더 많은 가치를 두고 살아가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부여하는 가치는, 가치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파렴치한 악취를 풍긴다. 그렇기에 그는 최후를 맞으면서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자신의 유혹을 알면서도 넘어온 여성을 탓한다.
이 이야기는 마치 하느님의 천국 혹은 지옥이 삶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유일한 각각의 갈래라고 상정하면서 시작되는데, 이러한 중세적인 가치관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사실 돈 후안 같은 남자들이 현대를 살아가면서 그만큼의 처분이나 비판을 받지 못하는 경우는 허다할지 모른다. 인간이 본래 가져야 할 성스러움은 이렇듯 때묻고, 짓밟히지만 또 언제나 살아남아서 이어지고, 그런 이를 처단하는 유령(신적 요소)은 결국 우리가 믿는 그 신념, 도덕적인 사랑이 도덕적인 사람을 만든다는 신념이 맞다고 다시금 확인해주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이, 심지어는 주변에 폐해를 입히고,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질을 하는 이는 최후의 나락을 향해 간다는 것으로 문학적 상징은 구체화된다.
돈 후안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표면적으로는 도덕이 세상을 팽배하지만, 사실 그 안에서 썩어가고 있는 많은 아픔과 불행이 숨어있다. 서구 문명과 육체적 관계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데, 사실 사랑이라는 것 자체는 많은 희생과 자기파괴를 불러오는 것이다. 꼭 정신적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는 물리적인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을 창조하고, 후대를 이어가게 하는 사랑의 행위는 결국 몇몇 이로 하여금 그것에 죽고 못 살게 매달리게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카사노바나 돈후안은 기저본능을 이용하여 사랑에 빠진 이들을 골라내고, 그렇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어쩌면 일시적인 정신분열과도 같아 보이게 만든다. 사랑이 때로는 이렇듯 죽음과 지옥을 두렵지 않게 하는 것이기에, 결국은 신, 즉 하나님을 두렵게 하지 않게 하지는 않을까? 사랑은 자유를 가져다주지만, 꼭 사랑이 자유를 무조건적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사랑을 하는 것은 일정량의 편안함을 내려놓는 것과도 같다.
이 작품 속에서 여인들은 가정 속에서 존재하고 그것의 유지, 보수, 개폐를 담당한다. 덜 순종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사벨라 역시 울타리를 깨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남자들은 일이든, 여자든 무언가를 정복하는 역할에 매여 스스로에게 고취된다. 이렇듯 저자가 그려낸 세계에서의 인물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사랑은 한편으로는 꽉 막힌 데가 없지 않다.
사랑은 파괴적이지만 법, 제도, 사회적 시선을 넘어설 만큼의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시대의 틀 안에서 정립되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돈후안은 분명 지켜야 할 선을 넘어버린다.
일종의 ‘광기’같기도 한 그의 몸짓은 보기에 불편함을 유발한다. 누구에게나 욕구, 그리고 이성이 존재한다. 사랑은 기존의 종교적 가치, 그리고 인문학적 담론이 포용하지 못했던 범위까지 우리로 하여금 재고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 있어서 사랑은 많은 선을 뛰어넘게 만들며, 사고 영역의 확장을 가져오면서도 아름다운 쾌락을 좇게 하는 슈퍼 파워를 가지는 것이다. 신을 비꼬는 듯한 돈후안의 사랑은 여성들이 자신의 모든 것, 목숨까지 걸고 함께 도피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으며, 더 나아가서 체제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저자의 시선을 따라 이는 적절하게 그려져야 하는 것이지, 돈후안이 비판의 대상으로부터 상관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 지금까지 세계 속에서 돈후안은 변태적인 욕망의 명대사, 카사노바는 여성을 맘껏 사랑한 자유인 남성의 대명사가 되어온 것일까? 카사노바와 돈후안은 모두 매력적인 언행으로 여자를 유혹하고 나서 버린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카사노바는 동시에 많은 여인을 가볍게 사랑하는 문제를 가질 뿐이지, 순간에는 진심을 다하며 탐구와 존중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돈후안은 여자를 그저 일시적인 쾌락의 수단으로 본다. 그렇기에 그의 결말은 아름다울 수 없고, 권선징악의 형태로 천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돈후안 이야기는 서구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아 이후 모차르트의 대표 오페라 작품인 돈 조반니의 영감이 된다.
역사학적 관점에서 보면, 카사노바와 돈후안 두 인물 모두 18세기의 유럽 사회에 살고 있는데, 당시는 계몽주의와 혁명이 솟아오르면서도 아직까지는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순수한 본능을 좇고, 이성적인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한다. 카사노바는 조금 더 저차원적인 인물로 쾌락이라는 감정에서 설명이 가능하지만, 돈후안에게는 추측컨대, 여성(어렸을 적의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과 혐오, 어쩌면 역으로 두려움이 무의식중에 자리 잡아 이런 일을 벌여왔을지 모른다.
기독교적 사회 분위기를 거스르는 이 두 인물은 신적 세계와 법률을 두려워하지 않고 본질적 자유를 원해온 것이다. 이렇듯 두 인물은 타고난 외로움의 성정을, 삶 속에서 여자와의 시간을 계속 보내는 것으로 이겨내기로 한다. 이런 그들이 우리에게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자유보다는 질서가 있는 삶이 때로는 우리를 덜 외롭게 하고, 덜 속박하기 때문은 아닐까.
오늘날 여성 편력가의 대명사가 된 돈후안은 모차르트의 <돈조반니>의 출발점이자, 추후 슈트라우스의 교향시에서도 재탄생하게 된다. 돈후안의 결말은 대놓고 비참하다. 그가 걸어온 행보는 그를 결국 회개할 틈조차 주지 않고 죽음으로 갚아 준다.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역시 그가 지옥에 떨어지는 모습을 묘사했지만, 나는 이곳에서 조금은 더 희망적인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잘못을 하면 벌을 받는거야”라는 단적인 교훈이 아닌, 현재에 조금 더 충실히 집중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초월적인 작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모차르트 본인은 젊은 나이에 친모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늘 고민해왔다고 전해진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부’와 ‘명예’는 사실 한낱 일시적인 눈속임일 뿐이지, 그는 하고 싶은 음악에 매진하며 그런 헛된 영광에 목매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계몽주의의 소산인 이 작품은 여성이 남성 쾌락의 대상임에 동시에, 남성도 여성의 계략과 진취성의 수단으로 역이용되는 상황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수동적인 여성상을 가진 인물(체를리나)을 통해 일탈적인 쾌락을 추구하고 싶었던 당대의 억압된 남녀들의 모순된 몸부림을 표현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