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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사랑담론 따라잡기

<이혼기>, <이와전>, <진주적삼>, <기름장수>

by young

유럽의 사랑 담론은 전반적으로 귀족 계층의 이야기를 다루거나, 사회중심적으로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 사회중심적이라는 것, 즉, 운명과 우연이 정치적 맥락 안에서 해석되는 성향이 짙다는 것은 이야기를 매우 명확하게 이끌어가게 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순식간에 극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야기를 다 읽은 독자에게 더 여운을 남기는 쪽은 동양의 문학이다. 필자는 그 이유를 동양 사랑 담론의 관계중심적 특징에서 찾을 수 있었다.


물론 동양도 시대, 정치의 맥락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들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인연의 맺음과 순환, 윤회, 운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혼기>와 <이와전> 이러한 동양의 사랑 담론이 가지는 특성을 아주 잘 담아내고 있다. 바로 서양의 사랑담론을 대표하는 문학, <베니스의 사랑>과의 차이점에서 그 특성을 찾을 수 있다.


<베니스의 사랑>에서는 근대주의적 법과 중세적 사랑, 기독교적 가치과 충돌하는 시대에서 짝지어진 연인들의 위기 극복기를 희곡형식으로 다루고 있다. 반면, <이혼기>와 <이와전>은 사랑으로 인해 이전과 달라지는 개인의 가치관, 행위를 보여주며, 완전한 개인의 힘으로 완성하기 어려운 사랑을 돕는 중간 단계의 중매쟁이 등 자신을 속이고 재치를 부리는 서양의 것과는 달리, 제 3의 인물이, 그것도 ‘상인’이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 돈을 벌기 위해 주인공을 이어주는 스토리가 진행된다.

이것 역시 관계 중심적으로 해석 가능한데, 중매쟁이와 여성의 관계, 중매쟁이와 남성의 관계가 여성과 남성을 잇게 되며, 꼭 이성 간의 인연이 아니더라도 질긴 연이 과거와 연결되어 미래를 그려가는 과정을 밟는다.


서구의 문학과는 달리, 장파의 해설에 따르면, 중국의 문학은 보존형 문화라고 한다. 이곳에서의 ‘인연’은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되어있고, 헤어진 가족과 연인 역시 자석처럼 되돌아 붙게 되는 법이다. 서양에서 역시 초월적인, 신적인 운명이 개개인의 삶에 힘을 가하기는 하나, 이 정도로 당사자를 벗어나 주변 인물의 인연까지 강조하지는 않고 있기에 더욱 그 운회론적 사상에 독자가 다가가게끔 만드는 것 같다.

되려 사랑을 명예를 지키는 수단이자, 복수의 시초,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유럽의 문학들과 달리, 중국에서는 사랑의 타당성이 자연스럽게 극에 녹아 들어가 독자의 시선과 사고의 흐름을 자동적으로 ‘리드’하는 특성이 드러난다.



중국 문학에서 사랑의 승인을 가져오는 기본적인 동력은 단지 에로스적 사랑, 열정적인 사랑이 아니다. 결혼은 당사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집안과 한 집안이 만나 새로운, 큰 집단의 연을 맺는 일이다. 그렇기에 어른들의 사정, 사돈 간의 우호적 관계는 결혼에 있어서 중요한 전제조건이 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서양의 비극이지만, 그렇다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육체를 이탈한 영혼으로 만나 사랑을 이루거나, 환생하여 결국 만남을 완성시키는 결말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이를 암시하는 대사가 드러나지조차 않기에 독자는 작품의 끝자락에서 “아, 끝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극에서부터 철저히 분리된다.


그러나 중국의 문학은 그만큼의 분리됨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극이든 희극이든지 간에 성급한 끝맺음보다는 길게 이어지는 감상의 지점을 제공한다. 이것은 엄청난 반전이나, 독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극의 장치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의 전달 방식에서 오는데, 인물들의 ‘대화’보다는 상황 서술에 초점을 둔 진행은 이들의 관계가 단지 이들의 능동적인 행동과 선택으로 이루어지기보다 초연적인 전지적 힘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기에 <이혼기>와 <이와전> 모두에서는 육체에만 국한된 사랑을 넘어서서 영혼의 마주함을 중시했던 동양의 가치관이 드러나면서 주변인들의 바람과 가족관계에서 역시 사랑의 승인을 유인하는 동기적인 특징들이 잠재되어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복합적인 요인들은 결국 인간 개개인에 내재하고 있던 ‘욕망’을 자극시켜 사랑의 형태로 분출하게 만들며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언제 어떻게 만나느냐는 개인의 삶 전체를 뒤흔들만큼 강력하게 작용하여 현세를 결정한다.


<이혼기>에서는 일종의 딜레마가 드러난다. 둘이 사랑을 이루려면, 결국 본인이 속해있던 현실을 벗어던져야만 했기 때문이다. 연인 간의 애정을 선택할지, 가족에 대한 의리를 지킬지에 대한 각각의 요구에 대응하는 사랑은 그 역할 갈등에 부딪쳐 처음에는 불전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부분적인 사랑이 두 목적을 모두 이룰 수 있게 되었을 때 진가를 발휘하며 완전성을 띠게 되는 것을 통해 독자는 결국 효(孝)역시 사랑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식의 도리를 지키면서, 어떻게 해서든 장애물을 이겨내 해피엔딩을 이끄는 주인공의 모습은 언뜻 서양과도 유사한 측면을 보이지만, 그 결과가 가져오는 의미가 해석되어야 마땅한 방향은 동양에서 더욱 확고한 것 같다.



서양에서는 현재에 초점을 맞춘 연인의 사랑을 이야기한다면, 동양은 그들 이전과 이후의 또 다른 그들, 그리고 그들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가 연결되는 경향이 자주 드러나는 것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서로의 욕구 충족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간 인간적인 관계의 소중함을 잘 실현하는 동양 문학에서는 드라마틱하고 쾌락적인 이야기를 창작해야 문학의 상업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양과 유사하면서도, 독자의 입장에서 재해석할 거리를 던져주는 성숙함까지 쟁취하고야 만다.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제기되어온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것의 답을 찾는 것에서 심한 어려움과 상당한 고민에 처해있다. 어차피 이 질문에는 정답이란 없다. 사랑의 개념은 늘 변화무쌍한 모습을 취해왔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육체적 쾌락이 특히나 억압되어있던 과거의 문화에서는 “불륜”이라는 것은 지금보다도 더욱 크게 몰매를 맞을 죄로 여겨졌다. 애초에 “잘못된” “연”이라는 뜻의 불륜은 아무리 그 사랑이 싹튼 조건으로 이해받으려 몸부림친다 해도, 미화된 방식으로 전달된다 해도 마땅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정은 매우 비슷하지만, 핵심적인 차이를 갖는다. 바로 그것의 목적과 출발점, 지속 기간이다. 정은 한번 시작되면 없어지기가 어렵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다. 더 강력한 쪽도 사랑이지만, 더 쉽게 꺼지는 쪽도 사랑이다. “부부는 정으로 산다”는 슬픈 문장도 이를 잘 드러내는 것 같다.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랑은 부부의 연을 시작하게 한다면, 그 정은 결국에 계속 남아 그 인연의 지속을 책임지고 이끈다는 점에서 다르다. 천륜과 불륜은 둘다 사랑과 정을 공유하지만, 불륜의 정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가치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고, 얕다.

불륜은 진정한 정으로 지속될 수 없는 이유가 명확한데, 바로 주체의 성적인 욕구가 서로 일시적 합치를 이룬 것의 결과가 곧 불륜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예’를 중시하던 동양에서 표면적인 행태를 떠나서도 여색을 멀리하고 양반의 도덕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가치였다. 그런 와중에 허락되는 불륜은 직업 기생들과의 간간한 노름이었으며, 이는 당대의 남성들 문화에서는 거슬리지 않는 당연한 것으로 허락되었다.


문학에서 논해져야 하는 불륜은 부부의 연을 이미 맺은 남성 또는 여성이 바깥에서 연애 관계를 이루는 것에서 출발한다. 여성에게는 문학적으로 허용된 남성의 미숙함을 보듬고, 포용하며, 후덕하게 살아가는 것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여성에게만 이런 모습을 원한 서양보다 동양에서의 이상적 남성상은 훨씬 열려있는데, 희생적인 봉사정신과 연민과 공감을 느끼는 능력이 남성에게 강조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책임감 강한 남성상의 원초를 가져온다.


<진주적삼>에서는 상인의 신분을 가진 인물이 사랑에 대해 손익을 따지는 모습이 드러나며 매파 할멈의 트리거로 인해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곳 역시 제3의 인물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동양의 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특이한 인물상인 ‘중매쟁이’는 <진주적삼>에서 매파 할멈과 장씨 아주머니, <기름장수>에서 유씨 아주머니의 존재로 수행된다. 사실 어떤 선택을 해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남는 법이다.

<이혼기>와 <이와전>이 당나라 시대의 작품이었다면, <진주적삼>과 <기름장수>는 명나라 이후의 작품이다. 당나라 시대에 관료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치 하에 존재하던 사랑이 명나라 이후로 오면서 낭만에 힘업어 해방되고, 이것으로부터 여러 불륜 서사나 틀을 벗어나서 논의되는 사랑의 담론을 추구하려는 여러 문학적 운동들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쉽게 변질되고, 이는 추후 20세기의 다층적인 사랑의 의미와 형태를 발아하게 하는 씨앗이 되어 간다. 사랑하는 연인이 만나, 연애 결혼을 이루는 것은 아름답지만, 그 과정에서 더 큰 희생이 종용되거나 결혼 이후 기대한 것과는 다른 삶에 대한 책임이 스스로에게 가해진다는 점에서 어쩌면 보장된 자유가 그들을 더 억압하고, “쇼윈도우” 부부, 완벽한 남편과 완벽한 부인의 명예를 강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족관계는 시대를 뛰어넘어 강력한 체계로 작용하며 그밖에 논의되는 사랑을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시킨다. 그렇기에 문학으로써 이를 해소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고자하는 대중의 욕구는 극대화될 수밖에 없었다. <기름장수>에서는 결혼 전후로 당사자 개개인의 삶이 변화를 맞는다는 점에서 현대의 결혼과 유사한 맥락을 입체적으로 공유해낸다. 악을 처단하는 서양의 사랑이 맺는 결말과 달리, 결혼으로 부가적인 가치를 창출하려 했던 시민 계급의 열띤 분투는 사랑이라는 명목하에서 여러 겹의 모습으로 변주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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