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이 영화에서는 ‘핵전쟁’이라는 요소로 연결된 세 장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잘못된 순간 판단과 깊은 사고, 의식의 결여로 결국 세 장소의 인물들은 인류의 멸망을 불러일으키는데, 본인들은 이를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블랙-코미디적인 성격을 가진다. 단지 그들이 ‘무지’해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아니다.
전쟁 속에서 미쳐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불행함은 이곳에서 가감 없이 묘사되며, 스탠리 큐브릭의 반전주의를 아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핵전쟁의 주범이 되는 잭 리퍼는 공산주의에 대한 다층적 의심으로 가득한 인물인데, 일종의 음모론을 펼치며 시대가 낳은 비관적 인간 군상의 대표가 되어 자리 잡는다. 그가 얼마나 냉소적이면서도 극단적인가 하면, 핵무기를 발사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나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시도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한 사람의 행위로 극단을 경험하면, 우리는 당연히 자연스럽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만약 인류 전체로 확대해보면, 사실 이러한 일은 과거에나, 지금이나 늘 팽배해온 일이다. 자학, 자폭, 자살.. 결국 남을 해하려 하다 자신이 다치고, 자신이 다칠 것을 알면서도 그 잠깐의 명예와 이익 추구를 위해 스스로를 해하는 일들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인간 세계를 지배해왔다. 그렇기에 잭리퍼는 결국 ‘우리’의 모습을 아주 응집하여, 단적으로 드러내는 인간형으로 해석할 수 있고 이러한 모든 일들은 영화의 전쟁상황실이라는 공간에서 구체화 되어간다.
펜타곤, 그 속의 ‘전쟁상황실’에는 벅 터짓슨 장군, 소련 대사, 스트레인지러브 박사, 그리고 대통령 사이의 논쟁이 연출되는데, 다들 자기 분야에서는 높은 위치에 있고,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하는냥 굴지만 막상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코웃음을 치게 된다. 국민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시기에서 대통령은 무능하고, 장군은 ‘근자감’에 사로잡혀 공산주의를 과대평가하는 공상을 펼친다. 내가 느낀 감상은 이들 모두 ‘전쟁’, ‘전시상황’이라는 것에 대해 가장 경각심과 책임감이 요구되는 직종을 가지고, 그러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이에 무관심하고, 별다른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에서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 답답함은 큐브릭의 센스있는 작품성과 대사 처리, 배우들의 태연함에 부딪쳐 어이없게 웃게 되는 무한의 굴레에 갇히는 신기함으로 확대된다. 풍자, 해학, 조롱의 시선으로 이러한 인물형을 형상화한 큐브릭은 그 눈총의 화살을 세계가 처한 위험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현대의 우리에게로 ‘재겨냥’하고 있는 것이었다.
영화 속 드러나는 공간 중 ‘버펄슨 공군 기지’는 어떨까? 이곳은 핵발사 명령을 내리려는 잭 리퍼와 그의 수행원, 멘드레이크 대령의 대화가 오가는 장소로 표출된다. 다른 두 장소와 달리, 1:1로의 만남과 담소로 이루어진 공간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의미는 결국 핵을 발사하려는 리퍼의 시도와 상황의 출발점에 대한 개연성이 설명된다는 것인데, 과대망상에 침몰된 리퍼 장군과 멘드레이크 소령이 극적으로 대치하는 공간으로도 보인다. 비밀 암호라는 요소의 등장은 이 곳을 더욱 심각한 분위기로 바꾸려 하는데, 막상 이는 실현되지 못하고 세상과의 공유된 의식, 소통은 오히려 단절되어 간다. 그가 핵전쟁을 시작한 이유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를 비꼴 수 있는 명백한 근거로 제시되며, 그나마 이성적인 맨드레이크 소령은 하루빨리 리퍼 장군에게 호소하여 ‘R’작전을 중단하려 하지만 말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잭 리퍼의 공군기지와 펜타곤 사이에 놓인 세 번째 장소인 ‘폭격기의 내부’가 있다. 콩 소령과 승무원들은 핵심 통신 장치가 두절되어 상황 명령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실행한다. 와중에 폭탄장치마저 고장나고, 장치를 고치다가 도저히 성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린 소령은 폭탄을 타고 목표 지점으로 함께 추락을 감행한다.
이 장면은 영화의 그 어느 곳보다 황당한데, 영화 중 가장 행복하고 신나는 표정을 지으면서 죽음을 향해 가속을 밟는다. 그의 최후는 폭격의 부산물과 연기 속에서 흔적도 없이 섬뜩하게 증발하며, 유머러스하고 슬픈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영화 내에서 이곳은 광기 그 자체를 형상화한 클라이맥스로 작용한다.
아무래도 이 영화의 표방된 장르는 ‘유머’, 희극,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이를 대놓고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오프닝 음악 역시 로맨틱한 재즈와 같이 상황과 모순되고 어색하게 병치되는 것이 차용되었다.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다. 희망의 반대말은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희망을 바라고 있는 것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전투기 내부의 음악 역시 정신없이 신나게 진행되며, 관객을 혼란에 빠트릴 만큼 어지럽다. 이처럼 듣기 불편한 음악은 영화에 온전히 몰입하게 하기보다는 한 발 멀리 떨어져 영화를 바라보게 한다. 인물들에 대해 우리가 비판할 수 있는 지점, 그리고 누가 봐도 상황과 맞지 않는 인물의 성격과 말투, 대화 내용에 대해 더욱 제대로 자각할 수 있도록 이러한 음악은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의미의 설득력을 가진다.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영화의 마지막 지점이었다. 핵폭탄이 터지는 그 장면에서의 큐브릭은. Vera Lynn, “We’ll meet again”이라는 음악을 선택했다. 죽음 이후의 삶, 사후세계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는 것일까. 왜 큐브릭은 모두 핵폭발로 인해 순식간에 타버리는 와중에 이러한 노래를 통해 어떤 희망적인 모순을 보여주길 선택했을까. 장군과 관료들은 이러한 핵전쟁 와중에도 지나친 낙관주의와 기술에 대한 지나친 신뢰에 빠져 자신들이 어떤 절벽을 향해 직진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머나먼 미래인 100년 뒤를 예측하는데, 이 음악 역시 이와 유사하게 역설적인 코미디 그 자체로써 상징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인물들이 전하는 메시지
‘스트레인지러브’ 박사는 누가 봐도 특이한 신체적 특징을 소유하고 있는데, 한쪽 팔이 기계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왜 큐브릭은 이러한 인물형을 영화에 삽입했으며, 심지어는 영화의 제목에까지 그의 이름을 차용했을까? 스트레인지러브의 기계-팔은 단지 죽어있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기술과 기계가 가진 폭파력에 경외하며 감탄할 때마다 그의 기계-팔은 그를 해치려 하거나, 마음대로 작동하면서 스트레인지러브의 ‘의지’를 벗어난다.
이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되어 영화에 존재하는데, 이 영화의 주제의식으로까지 확장 해석이 가능하다. 그는 기계의 힘을 빌려 신비로운 모습과 빼어난 지성, 강한 에너지를 지닌 것처럼 보이만 사실 이것은 표면적인 모습에 불과하고, 정작 자신도 온전히 컨트롤할 수 없는 것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이의 최후로 전락하여 우리 앞에 놓인다.
기술을 적당히 이용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지만, 우리는 이처럼 근거 없는 찬양과 존경을 바탕으로 그것에 오히려 압도당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가를 느낄 수 있다. 테크놀로지와 인류의 미래는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하고, 어느 정도로 기술을 허용하느냐에 따라 이처럼 어두운 길을 걸을 것이라는 영화적 암시로 변용된다.
그렇다면 잭 리퍼는 어떨까? 리퍼라는 인물은 우리에게 어떻게 영화 내에서 설득력을 쟁취하는 것이 ‘아닌’, 되려 이러한 보통의 목적을 내려놓고 서술자의 한계를 통해 전쟁을 다시 보게끔 만들고 있을까? 그는 많은 단점을 가진 인물이다. 그의 그 단점들은 그의 군사 내 위치, 사회적 단계에서 더욱 위험하게 강화-발현되어 심각한 우월주의와 민족주의를 야기한다.
리퍼가 하는 말 하나하나는 극명한 이데올로기에 지배하에 있다. 이렇게 뻔한 인물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을 반성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장점 아닌 장점이 있다면, 스스로를 고양시킴으로써 내부의 결속력을 높일 수 있고, 그렇기에 이러한 전쟁이 팽배한 냉전시대 속에서도 국가가 유지, 생존할 수 있게끔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사실 본인이 우월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안에 보이지 않는 열등감과 부족한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덩어리가 있다. 이는 겉으로는 자신이 남들보다 더 나으니 그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더 나은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이끌어줘야지 하며 선민적인 모습을 갖추는 것으로 보이나 결국 상대가 바라지 않는 베품과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줄 뿐이다. 부탁받지 않은 호의는 독이 된다. (마치 오헨리의 단편, <마녀들의 빵>처럼..) 그리고 그 호의가 순수한 호의조차 아니면서 우월감과 열등감이 뒤섞인 행위로써 방문한다면 더더욱 악하다. 식민지화를 겪은 많은 국가, 강대국에 의해 제멋대로 나눠진 영토 분리선으로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된 가족들은 이러한 그들의 만행을 몸소 겪어왔다.
‘네이셔널리즘’의 밑바닥에는 외부의 세력에 대항할 힘이 숨어있어 그렇게라도 극단적으로 자신들의 우월함을 찾고, 남을 근본 없이 까내리는 행위로부터 가장 효과적으로 성취되었고, 그러한 세계 속에 사는 인간은 타인의 안위는커녕, 자신의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점점 더 심적, 신체적 여유가 고갈되어갔을 것이다. 리퍼는 스스로가 정의로운 행동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더 큰 대의를 위해 우리는 전쟁을 지속해야한다고 주장하며 반공주의를 바탕으로 그것의 이면을 꿰뚫어 본다는 자신감에 사로잡혀있다. 본인의 군사적, 관료적, 또 위계적 논리에 따르면 자신의 이러한 주장은 아주 타당하다. 면도날로 살해를 당한 척하는 재치를 선보여 자신의 군대를 지켜내는 것을 보면 그렇게 자기 사람들에 대한 안전, 보호 의식과 애정이 투철하면서도 더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부족함은 그를 입체적인 캐릭터로 부각한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의 무덤을 파며 파멸에 이르고, 본인뿐 아니라 주변의 잘못된 신념을 부추기다가 모두의 ‘희화화’된 몰살은 점차 다가온다.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을 누구보다도 우스꽝스럽게 연출한 큐브릭의 의도는 아마 리퍼의 굳은 신념을 잘 나타내는 용도로 배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은 어떠한가. 약간의 민간인 희생을 아무렇지 않게 제안하고, 소수는 당연히 다수를 위해 죽어도 마땅한 존재이며, 정작 직접적으로 자신이 책임지고 싶은 것은 없어서 명예를 추구하면서도 한발 늦게 행동하는 그는 전형적인 꼭두각시 정치인으로 보인다. 자신의 역량보다는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본인이 얻을 수 있는 정치적인 이득을 찾아내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무비판적인 인간형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클레몽소의 저 대사는 전쟁은 군인들에게만 예속될 사안도, 정치인들에게만 결정이 내려져야 할 사안도 아니라는 사실을 전달한다. 실전과 이론은 늘 병행되어야 하며, 한쪽이 어느 한쪽을 집어삼키는 방식으로 군대가 운영되는 것은 파멸을 낳을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정치인이든, 장군이든 모두 바람직하지 않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 정치인은 딱히 사람이 죽고 사는 일에조차 관심이 없고, 그저 표면적으로 보이는 감투에 만족하며 그것에 지배당하여 느린 상황 판단으로 보는 이를 허탈하게 만든다. 장군 역시 마찬가지이다. 의지는 불타오르지만, 결국 자기 파멸로 이르는 잘못된 선택들로 핵폭발을 야기하고, 스트레인지러브 박사는 기술의 능력에 매료되어 자신이 죽어가는 줄도 모르는 채 미래가 가져올 양날의 검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냉전시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소련과 미국이라는 국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은 당시 많은 군사적 소모와 외교적 낭비를 발산시켰다. 반공주의의 잭 리퍼는 멘드레이크 대령과의 대치로부터 실제로 핵전쟁을 추진하게 되고, 그렇게 지구상의 생명체에게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안기게 된다. 결국 ‘전쟁’이라는 목적 없는 싸움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아, 당장 얻을 수 있는 것은 ‘승리’이겠지만 곧 그 누구도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어린 아이도 쉽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폭력은 피해자나, 가해자에게 모두 안 좋은 것이다.
우리가 지금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독일이나 일본의 전범 국가들에게는 그들이 행한 것 만큼이나마 큰 상처가 여전히 잔존하여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특히 원자무기, 핵무기와 같은 화학 살상 장치들은 그냥 총으로 사람을 쏴 죽이는 것보다도 장기적, 때로는 영구적이며 그만큼 비인간적일 수가 없다. 싸움이라는 것에도 나름의 상도덕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왜 그렇게 서로에게 도를 넘는 짓을 행하고, 아프게 해야만 속이 시원했을까.
누가 먼저 시작했나, 윗사람이 시켜서, 일단 이겨야 하니까, 본인이 속한 국가의 표면적 명예와 안전이 달려있으니까, 평화는 이미 지나간 이야기니까 하는 핑계들은 그저 악의 평범성을 정당화하는 악의 도구가 되어 돌아올 뿐이다. 한 이념과 정치 성향에 사로잡히는 것 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 늘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나는 안 그렇다고 믿다가 어느 순간 그들의 명령에 종용되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허다하다. 특히 그런 시대와 장소에서 태어나지 않은 나는 늘 감사하다.
지난번에 보았던 큐브릭의 또 다른 대표작, <영광의 길>에 비해서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를 감상해보니, 그가 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더 확연히 와닿았다. 결국, 기술이 진보할수록 그것을 적절히 다룰 능력과 방법의 인식이 요구되는데 그렇지 않은 인간들은 윤리의식이 결여된 채로 끊임없이 과학을 발전시키며 언제 그치는 것이 적당한 때인가를 알지 못한다. 이는 여전히 지속되어오고 있는 문제이며, 우리가 벌써 자기 파멸에 이르지 않은 거에 어쩌면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그릇보다 음식이 더 큰 모양새이다.
그렇게 포장된 문화 체계와 높은 지식수준을 갖춘 문명사회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사실을 모르는 것이 인간의 ‘둔감’성이자 시대를 뛰어넘은 최대의 약점이 아닐까 싶다. 인간 본성에는 깊게 뿌리박힌 의식이 존재한다. 바로 비교와 차별이다. 나와 다른 이에 대해 문화 상대주의적 관점이 아닌, 일단 물고 뜯으려는 공격적 태도로 대하는 것은 실제로 교양있다는 많은 이들한테도 발견되는 속성이다. 그렇기에 이를 인간 ‘본성’이라고 말하지 않기 어려운 것이 아니겠나.
현재는 큐브릭이 살던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전쟁에 전쟁을 거듭하며 함께 살아가는 이 지구에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없이 다치고,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하고 있다. 대개는 쉽게‘전쟁’, ‘반전주의’라는 주제 의식를 통해 뻔한 비판과 담론을 선보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제대로 와닿지 못하고, 이는 결국 변화를 일으킬만한 강력한 힘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지만, 실질적으로 우리는 말만 ‘다름’이라고 하지, 내적으로는 ‘틀림’의 의미를 더 많이 찾으려는 성향이 짙다. 심지어는 아주 사소한 것, 예를 들어, 먹던 음식의 맛이 조금만 다른 식당에 가도 여기는 이상한 곳이라며 판단하기 일쑤다. 물론 실제로 맛이 있고 없고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사람이 소중하고 안 소중하고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그것은 굉장히 문제점이 많은 현상일 것이다.
잘 알아도 실천되지 않은 많은 것들이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어떤 이의 능력은 어떤 이의 약점일 수 있고, 그렇다고 전자가 후자를 괴롭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미숙한 일이다. 전쟁을 지금까지처럼 꼭 그렇게 무겁게 바라보기보다, 큐브릭의 시도처럼 과격한 힘을 조금은 빼고, 관객이 영화 속 인물을 소위 “어이없어” 하면서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과정, 즉, 고차원적인 반성을 일으키게 만드는 것은 훌륭한 기법이자 방법론이 되어 다가온다.
스탠리 큐브릭은 ‘컬러’ 영화를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시기에서도 ‘흑백’ 영화를 고집하는 성향이 있었는데, 사실 흑백이라는 속성을 유지하면서 코미디 장르를 개척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찰리 채플린과 같이 시대적인 문화적 함의가 담겨, 말없이 행동으로만 웃긴 감정을 유발하는 등의 영상예술은 존재하지만, 왜인지 ‘흑백’과 ‘전쟁’이라는 두 요소가 만났을 때 유머러스할 수 있다? 라는 것은 매우 독창적인 큐브릭의 특징으로 자리매김한다고 생각한다.
되려 부족한 개개인의 판단력, 심각한 상황에서 그렇지 못한 대사 처리는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더욱 강화, 더 나아가서는 수용되기 어려운 차원까지 승화해내는 특징을 보여준다. (우리가 엔딩 장면을 보고 쉽게 “아 그렇구나”를 중얼거릴 수 없는 것처럼) 큐브릭은 그 특유의 장면 전환, 카메라 무빙 기법과 “1인 다역”이라는 영화적 특징은 이곳 닥터스트레인지 러브에서도 유독 잘 드러난다.
보통 위계상으로 높은 인물의 연설이나 군대 지휘 장면이 등장할 때는 그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처럼 보이는가를 강조하기 위해 화면을 넓게 쓰고, 핵전쟁을 명령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는 과하게 클로즈업된 인물의 표정이 드러나기도 한다. 앵글과 줌인아웃을 다양하게 변환해가면서 그의 영화는 독특한 소재에 힘없어 그 의도의 전달력까지도 두루 갖추고 있다. 또한, 한 명의 배우로 연기된 멘드레이크 소령, 대통령, 스트레인지러브가 서로 상이한 생각과 신념을 가진 이들로 표현된 것 역시 인상적이다.
왜 큐브릭은 1인 다역이라는 장치를 이곳에 사용한 것일까? 당시의 시대상에 따르면, 아마 많은 이가 큰 두 개의 축 중 어느 쪽 말이 더 맞지? 에 관해 양가적인 감정과, (내적으로는) 다면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임이 예상된다. 그렇기에 꼭 “이랬다저랬다” 하는 줏대없는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혼란스러운 시기 속에서 인간이 고통받는 모습을 한 명의 배우로 처리함으로써 잘못된 가치관이 각각의 길로 발전되었을 때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 명의 위태로운 이가 있을 때보다, 두 명의 위태로운 이가 있을 때 결과는 더 크게 수면 위로 펼쳐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관객은 한 명보다 두 명이 나은게 아니라, 때로는 그 어떤 것도 낫지 않을 수 있다는 '인간 말세' 속 ‘자포자기’적 심정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조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