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리어 왕>
‘리어’는 슬하에 세 명의 딸을 두고서 그들을 차례대로 시험에 들게 한다. 유산을 상속해주겠다는 명목으로 가족들 사이에 순위를 매기고 보상을 수여한다는 것은 마치 ‘조건부’적인 사랑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제시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리어’는 한 나라의 왕으로서 한때는 모든 이들의 경외심을 사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 힘조차 잃어버린 상태다. 그렇다면 왜 코델리아는 그 힘없는 아버지에게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었을까? 사실 아버지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그깟 ‘말’ 따위는 그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코델리아’는 진정한 사랑이라면 그 얕은 말속에는 담아낼 수 없으며 아버지를 도리로써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진실이자 가장 깊은 마음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 무정한 믿음이 사랑보다 강하게 작용했던 그녀에게는 아버지의 얕고 표면적인 사랑의 가치가 맞아떨어질 수 없었고, 이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갈등으로 불거진다. 특히 이 둘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라는 대사는 매우 인상적인데, 사랑으로 침묵하는 코델리아의 진심과 “아무 말도 안 하면 아무것도 주지 않을 테다”를 주장하는,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아버지와의 신념 차이를 잘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딜리아와 리어는 참 닮아있다. 둘다 ‘진실’에 목을 매며, 고지식하고, 자신의 신념만을 주장한다. 코딜리아를 ‘착한’ 딸로 정의하기 위해서는 ‘착함’의 의미를 먼저 따져봐야 하는데, 극의 마지막에 다다라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것으로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될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어리석은 왕에게는 무엇이 그리 중요했을까. 사실, “얼마만큼 사랑하냐”는 질문만큼 오만하고 바보 같은 질문도 없다. 자식들이 가진 사랑의 양을 측정하고자 하고 그 의미 없는 아첨을 받고자 하는 그의 ‘사랑’이야말로 속 좁고 낮은 차원의 사랑일 것이다. 혹은 권력과 복종의 맛에 눈멀어 사랑의 순수함을 잊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인간의 큰 문제는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게 가장 잘 속아 넘어간다는 점이다.
왜 인간은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어리석은 모습을 보일까?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왜 그 어리석은,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어할까?
한번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면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듯이 인간은 늘 무언가를 가지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리어’는 아마 자신이 늙고 힘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이전과 여전히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끌어모은 것은 아닐까? 그의 심리를 이해해보고자 하면, 이제 와 삶을 돌아봤을 때 “그래, 나 잘살았다”하는 것을 굳이 확인할 수 있던 수단이 곧 그에게 있어서는 딸에게 행한 그 우스운 요구로 표현된 것이다.
갈등도 있었다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작품은 시대 변화의 과도기에 놓인 인물들의 내외적 갈등, 가족이라 엮인 이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말세에서 진정한 ‘효’와 ‘사랑’의 가치에 대해 반성해볼 수 있게 한다. 저자는 그 속에서 크게 구시대적인 인물과 신시대적인 인물을 구분하고 있다. 대표적인 구시대적 인물로는 ‘리어’와 ‘글로스터’, ‘코델리아’, ‘켄트’가 있고, 신시대적인 인물로는 ‘에드거’와 ‘에드먼드’, ‘고너릴’, ‘리건’이 있겠다. 그중에서도 ‘에드거’는 구시대와 신시대의 중간지점에서 너무 앞서가지도 않으면서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구시대적 인물을 구원, 그리고 치유해내는 긍정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아주 지혜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아버지인 ‘글로스터’의 목숨을 구해내며 ‘곧이곧대로’의 삶을 살아온 ‘코델리아’와는 대비된다.
언제나 100퍼센트의 악인 혹은 100퍼센트의 선인은 존재할 수 없다. ‘코델리아’의 순수한 고집은 표현이 잘못되었을 뿐이지 진정했고, 하인인 ‘오스왈드’는 악인인 주인에게 맹목적으로 충성을 다했으며, 악랄한 악인으로 그려지는 ‘에드먼드’ 역시 그러한 신념을 갖게 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행한 악이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코델리아’의 언니들이었던 ‘고너릴’과 ‘리건’은 어땠을까? 그들 역시 신시대적 인물로 분류할 수는 있지만, 어느 시대에나 배신자와 반역자는 존재한다. 그들은 아버지의 수행원을 줄이는 데 일조하면서 마치 구식의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신시대적인 인물임을 표상하지만, 결국 각자의 남편이 아닌 한 남자, 에드먼드를 사랑하는 불륜을 저지르면서 파멸한다.
이렇게 보면 셰익스피어가 꼭 신시대적인 인물을 찬양하는 것은 아닌듯하다. ‘에드먼드’는 전통이나 관습, 도리, 신의 뜻과 같은 세계를 벗어나 ‘자연스러운 것’만이 자신의 삶에 있어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이 태어날 수 있던 이유 역시 그 자연스러운 욕망에서 온 것이며 온전히 구시대적인 아버지를 꾀어내기 위해 그의 눈높이에 맞는, ‘맞춤형 계략’을 선보인다. 그 미신과도 같은 계략으로 그의 아버지인 ‘글로스터’는 아들 ‘에드거’를 믿지 못하고, 끝내 눈을 잃게 된다.
이 작품에서 역시 ‘눈’이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1학기 수업 때 다루었던 셰익스피어의 또 다른 비극 작품인 ‘오이디푸스’에 등장했던 눈의 상징과 같은 맥락에서 ‘글로스터’는 신체의 눈을 잃고 나서 비로소 진리를 통찰할 줄 아는 능력을 얻는다. 멀쩡한 육체를 가질 때 분간하지 못하던 것들은 잃는 것이 있어야만 깨달아지는 법이다. 그는 아들 중 누가 자신의 편에 있는지, 자신이 모시는 자가 어리석은 이는 아닌지와 같은 물음에서 답을 찾지 못했다. 즉, ‘무분별’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무지’ 역시 ‘악’이라는 점에 대해 짚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혹은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다. 어쩌면 사람의 인생은 보이는 것이 전부다. 보지 못하면 살기 어려운데, 볼 수 있으면 속아 넘어간다. 걷지 못하면 삶이 고달픈데, 또 걸으면 잘못된 곳을 향한다. 마치 ‘딜레마’처럼 진리와 섭리는 닿기 어려운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 속아 넘어가지 않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제대로된 지혜를 갖춰야 한다. 어리석지 않아야 한다.
길도 없고 눈도 없는 세상에서는 오히려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순전한 결핍”, 즉 ‘무’의 상태는 어쩌면 쓸모가 있다. 이렇듯 셰익스피어는 인간이 너무나도 쉽게 어리석은 믿음과 그에 따른 선택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부정적으로만 여겨지는 상황에서 역으로 고통이 줄어드는 것을 통찰한다.
황야의 의미
기대했던 셋째딸에게 실망하고, 남은 딸들의 가식마저 배신으로 드러나면서 ‘리어’는 광분한다. 젊었을 적의 권위적 태도와 봉건주의적 사상에 아직도 지배당하고 있는 ‘리어’는 남들이 보기에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미쳐버리지만, 그와 동시에 이제야 왕이라는 무게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본능대로 행동하게 된다. 이는 ‘황야’라고 상징되는 공간에서 권력으로부터의 소실, 해방과 동시에 삶의 모든 것이었던 그 껍데기를 잃어버린 고통으로 그를 압도하는데, 인간이 벼랑 끝에서야만 느낄 수 있는 삶의 의미는 모든 기억이 뒤섞인 채 그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온다.
‘황야’는 물리적인 공간이기도, 비물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는 점이 흥미로운 지점이 될 수 있는데, 마치 그가 결국 ‘황야’로 떠나는 장면에서 보이는 소우주의 폭풍이 실질적인 날씨 상태이자 ‘리어’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혼란의 소용돌이라는 점과도 맞닿아있다. 물론 그가 이야기하는 방식과 과정은 매우 상식을 잃어버린 듯 표상된다. 그렇기에 더 그 어리석은 인물이 깨달은 진실은 독자에게 강력히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은 별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모순적인 그의 말들은 어쩌면 가장 뻔한 진리를 감추고 있는지 모른다.
에드거는 지혜와 재치를 발휘하여 아버지에게 ‘착한 거짓말’을 행사한다. 적절히 구시대적, 또 적절히 신시대적인 이 인물은 결국 끝까지 살아남아 아버지를 구하고, 효와 의리, 가족간의 사랑을 지켜낸다. 이 부분에서 드러나는 에드거의 연극은 그가 스스로 언급하듯, “아버님의 절망을 가지고 속임수를 쓰는 건 그 절망을 치료하기 위함”이라는 대사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선의의 목적을 띠고 있다. 어떤 순간에는 꼭 ‘사실’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진실된 마음으로 아버지를 보필한 에드거는 극 중 긍정적이고 융통성을 갖춘 인물상으로 그려지며 작품의 총체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로도 작용하는데, 겉으로는 속이는 것이 속으로는 가장 따뜻할 수도 있고, 달콤한 말의 유혹은 끝내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으니 무엇이 좋은지는 그 표면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궂은 처지인 줄도 모르고 아첨 속에 있느니 이렇게 거지가 되어서라도 자기 처지를 아는 편이 나아. 최악의 상황이 돼 운명의 수레바퀴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야 말로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어 오히려 희망을 가질 수 있을 때지. 제일 슬픈 추락은 오히려 가장 형편 좋은 사람한테 오는 법이야. 최악의 상황이라면 앞으로 좋아질 일만 남아있지”. 에드거의 이 대사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인 늘 좋은 것만은 없으며 늘 나쁜 것만은 없다는 점을 가장 잘 드러낸다. 셰익스피어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양에 속는 자신보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자신을 사랑하고, 밑바닥에 이르러서는 앞으로 웃을 일만이 다가온다는 사실에 기뻐할 줄 안다면 남은 삶에서 그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부담을 내려놓고 현명하게 대처할 줄 아는 지혜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선과 악
인간이 가장 추한 상태가 될 때는 언제인가?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인간은 크게 똑똑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혹은 하인인 자, 충직한 자와 무분별한 복종을 하는 자, 그리고 욕망에 굴복한 자와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줄 아는 자로 구획된다. 특히 겉으로만 고풍을 떠는 ‘고너릴’과 ‘리간’, ‘에드먼드’는 결국 욕정의 개가 되어 나락으로 떨어지고, 가장 멍청한 듯 보이는 ‘바보’는 그러한 인간의 ‘추태함’을 신랄하게 욕한다. 이렇듯 등장인물들을 대조, 비교해봄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사람의 선택과 인생, 혹은 선과 악은 참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정해진 것이 하나 없는 것이야말로 삶이라고는 하지만, 겉으로만 봐서는 인간의 본색을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이 언제나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렇기에 미래는, 그 앞으로의 나날은 늘 우리가 만들어가기 나름이라는 것만은 분명할 것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새 시대를 연다고 해서 이전 시대를 완전히 버려서도 아니 된다.
필자는 <리어왕>을 시대의 온고지신이라는 말로 정의하고 싶다. 온고지신,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안다”라는 뜻이다. 작중 ‘에드거’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끝까지 지켜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코델리아’ 역시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왔지만 결국 싸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왜 셰익스피어는 ‘코델리아’를 죽이고 ‘에드거’를 살렸을까? ‘코델리아’의 방법과 ‘에드거’의 방법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 ‘코델리아’의 사랑과 ‘에드거’의 사랑은 질이나 양의 차이가 아닌, 방식의 차이만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 모든 것은 그 방법론, 즉 방식이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What’보다는 ‘How’가 중요한 대상이 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시대의 전환기를 맞고 있던 작가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곧,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거나 이를 번복하기 위해 뒤늦은 사후 처치를 하는 어리석음이 아닌, 밝은 미래에 발맞춰 모더니즘적인 지혜를 갖추는 것임을 정치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에드거가 도리를 다한다는 점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What’이었으며 ‘How’에 해당하는 방식인 변장과 소위 ‘착한 거짓말’은 궁극적으로는 아버지를 살리도록 돕는다. 둘 다 아버지를 진정으로 사랑한 마음만은 같지만, 안타까운 ‘세드 엔딩’을 보여주는 ‘리어’와 ‘코델리아’의 죽음은 진실하지만 오만했던 이들이 맞는 결말로, ‘에드거’가 선택한 방법은 그 새 시대를 열고 개척해나갈 수 있는 꼭 맞는 열쇠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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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결국 상대적인 가치에 목을 매고, 사랑을 갈망한다. 모든 인간은 바보이면서 또 바보이기를 다시 선택하기도 한다. 남들이 자신 앞에 복종하는 상황에서 권위를 찾고, 국가와 시대 앞에 조종을 당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만의 목적과 가치를 찾기 위해 인생이라는 고통도 기꺼이 견딘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은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각 인물의 표면과 속내를 도구화하여 작중에서 독자들이 이들을 통해 무엇을 읽어내길 바라는지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고통이 주는 즐거움도 있을까? 이 작품에서 가장 융통성 있는 인물인 ‘에드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