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죽이기 위한 명목

근대적 '마녀사냥'을 돌아보며

by young


선악은 규정되기 마련이다. ‘입장’ 차이에 더 가깝다.


내 논리와 반대되는 논리가 나에게는 터무니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는 천사인 이도 누군가에게는 악마가 되고 수용 받지 못하는 자들이 마녀라고 불리며 죽임을 당할지라도 아무도 그것에 의문이나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수 있다. 심지어는 말레우스 말레피카룸과 같이 마녀를 더 효율적으로 잡아들이기 위한 지침서까지 만들어질 정도이니, 얼마나 굳은 신념과 그릇된 마음이 이 시대 속에 만연하게 퍼져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한 명목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마치 그것이 대의인 것처럼 끼워 맞추면 그만이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악마와 결탁했다”라는 이유로 처형당해야만 했을까? 사실 내가 ‘마녀사냥’에 대해 가장 놀란 부분은 이 역사적, 실제적 사건이 설화가 아닌 현실이라는 점, 그리고 어느 중세 시절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근대로 규정되는 시기에 발생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흔히 히틀러의 유대인 대량 학살 사건을 의미하는 “홀로코스트”를 잘 알고 있다. 역사 속에는 우리가 현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집단 살인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당시 그들은 그 사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계획적이고 냉철한 악행이 더 큰 두려움을 몰고 오는 법에며, 마녀사냥이라 불리우는 이 공식 재판의 근거는 마치 암흑의 시대를 연상케 한다. 만약 악마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악마가 정말로 그 '마녀들'을 홀린 것이라면 그들의 살인 논리가 정당화될까? 마녀로 기소된 유명한 사례의 인물인 요한네스 유니우스의 경우, 그가 딸에게 비밀리에 남긴 편지에서 잘못된 종교적 행위가 불러올 수 있는 최대의 악랄함이 자세히 폭로되고 있다. 그 편지에는 이곳에 오면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고, 무고한 상태로 끌려온 많은 이들이 무고한 상태로 자백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럽의 역사 속에 자리 잡은 어두운 단면이 된 마녀사냥은 우리에게 많은 의문을 남겨두었는데, 사실 악마와 결탁했다는 것을 도대체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었냐는 점이 이 마녀재판에 대한 물음의 근본적인 출발점이 될 것 같다. 당시 매뉴얼이었던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에 따르면 마치 광기를 연상시키게 할 만큼 객관적으로 이들을 잡아들이고 처형할 수 있는 판별 기준과 악마 표식, 고문 요령, 보조 방법, 재판에 관한 수칙 등이 나열되어 있다.

이런 책이 널리 퍼지고 많은 이들에게 이와 같은 정보를 습득하게끔 부추긴 데는 인쇄술의 발달이 미친 영향도 없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피부색, 흉터, 말투, 특이한 모양의 점이나 흔적, 고문을 참아내는 힘, 눈물을 머금는 힘, 때로는 운. 이 모든 요인을 떠올려보면 지금의 우리 역시 ‘마녀’에 속하지 않을 증거가 없을 것이다.


최고의 선을 규정한다는 것은, 그에 반하는 악을 규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하느님을 믿고 그가 이루신 뜻을 (과대 해석하여, 혹은 왜곡되게) 따르는 것이 하나의 목적 아래 똘똘 뭉쳐 “우리”와 조금 달라 보이는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죽이는 행위로 드러났다. 파고드는 외부의 악에 대항하고자 했던 것은 집단 내의 협업력과 편협함을 최고조에 이르게 하였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주장했던 “악의 평범성”도, 결국 무지 또한 악이라고 말해준다. 다시 말해, 정치적으로 이용을 당하든, 살기 위해 시대에 굴복하든, 억울하게 희생을 당하든 간에 당대를 살아간 사람들 모두 그들이 직접 규정한 마녀로부터 두려워하고 회피하려고 한 그 ‘악’을 결국 자신들이 행하고 있었다는 모순을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마녀사냥은 마치 논리적인 척, 정의로운 척 가면을 쓰고, 정치-종교적으로 시대와 민중이 어디까지 이용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단순 테러의 의미를 넘어서 이웃 간의 갈등, 공동체에 내재된 악의 전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로부터 우리는 집단의 엇나간 믿음과 비이성이 우리를 언제든 악의 근원지로 밀어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프레임 씌우기”의 그럴싸한 결론에 휘둘려서는 안된다.


종교와 마술은 그 자체로 닮아있다.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악마는 모두 영적인 대상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영적인 것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과 악마에 대한 경계는 두껍기도 하지만, 쉽게 무너질 여지가 있다. 악마는 신에게 대항하지만, 결국은 신을 이길 수 없는 작은 '악'으로서 존재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다 인간은 큰 불행이라는 시험에 들게 되면서 신앙심이 흔들리며, 악의 세력이 더 무시무시한 개념으로 와닿는 시대가 온다.

지금의 매직쇼로서의 마술이 아닌, 악마의 술수로써의 '마술'은 우리에게 신기함을 주는 것임에 동시에 이유모를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신의 존재가 의심받고, 이를 다시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마치 왕권강화를 위해 조선의 왕들이 '엄격'을 표방하면서 반대 세력을 잔인하게 살인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실천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악을 만들기보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악의 세력에 무너져 타락했다"라는 명분은 얼마나 편안한가. 그때나 지금이나 "나만 아니면 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권력에 동해 의식없는 복종을 저지르기 쉽다.


마녀의 용의자는 남녀를 불문하고 선택되어왔지만, 왜 유독 '여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일까? 보통 증인을 서줄 사람이 없는 미망인과 약초학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 부두교를 믿는 자들, 그리고 돈이 많은 자들 역시 죄다 마녀재판에 서게 되었다. “도대체 어떤 혐의로?”라고 묻는다면 아무 말이나 지껄여도 현시대의 영장같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잔 다르크 역시 마녀라는 죄목으로 화형당한다. 악마는 “더 홀리기 쉽고 감정적인” ‘여성’의 몸을 빌려 집회를 열고 인간 사회를 음해하며 조금씩 신에게 함께 반항할 동반자를 찾아 나간다.


그 당시 믿음으로는 여성이 매우 성적으로 취약한 존재이고, 심신이 미약하여 극단적이며 충동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믿는 ‘반여성성’이 자리 잡았다. 생명의 문제를 더럽히는 산파 마녀는 그중에서도 가장 사악하다. 물론, 이러한 마녀로 기소된 이들 중에는 남자도 많다. 14세기 이전, 중세까지만 해도 어려운 학문을 수행해낼 수 있는 ‘남자’ 마법사들이 훨씬 많았다. 그러나 그 상태가 변화한 것은 여성이 ‘본질적’으로 더 사악하다는 믿음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근대에 와서 더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질서가 굳혀진 이유도 이에 근간을 두고 있다. 비상식적인 일들도 몇 년을 겪으며 마치 그것이 진리인 것 같다.




과연 하느님이 악마와 결탁한 이들을 끔찍한 고문으로 살해하게끔 하길 원하셨을까? 그것이 진정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느님이 행하신 큰 뜻이었나? 악마는 사실 천사 출신이다. 그중에서도 타락한 천사를 의미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신이 창조해냈다면, 악마 역시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된다. 그렇다면 왜 악마는 굳이 존재하여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인으로 믿어져 왔을까? 이 시점에서 악마의 존재가 신의 무능함이나 악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롭게 할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한 신의 용인에서 온 것이라는 논리가 발생한다. 그저 사사로운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신은 악마라는 부정적인, 그러나 필연적인 장치가 탄생하는 것을 허락하시는 매우 이성적인 면모를 가진다.


마녀사냥의 종말은 지식인들의 목소리보다는 사법제도의 개혁으로부터 왔다. 법의 운용이 잘못되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낳는지를 잘 알게 된 사람들은 법의 계몽을 통해 그제서야 마녀사냥의 악습을 끝낼 수 있었다. 텍스트에서는 주술신앙이 마을 생활의 규범들을 지탱해준 보수적인 사회력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같은 맥락에서 한 공동체는 서로 같은 ‘적’을 공유하고, 같은 ‘적’을 가진 이들끼리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인간의 역사는 신앙과 공동체의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우리는 상대의 가치관에 쉽게 동요되고, 민간의 힘은 이성 체제를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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