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 <콩쥐팥쥐>, <헨젤과 그레텔>, <미녀와 야수> 등
‘민담’의 사전적 정의는 “예로부터 민간에 전하여 오는 이야기”이다. 즉, 말 그대로 구전되어온 민속 전통으로, 민담을 통해 우리는 많은 당대의 사회상, 정치상, 그리고 실제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심지어는 역사책을 아무리 읽어도 알 수 없는 당시 인간들의 보편적 가치와 생존 방식, 지배적이었던 생각까지 알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민담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러한 민담에는 여러 가지 계열이 존재하는데, 흔히 고전, ‘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서사 구조 중 하나인 신데렐라 계열에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신데렐라’ 스토리들이 국가와 문화별로 어떻게 다른 양상을 취하고 있는지 비교해볼 수 있다.
신데렐라도 다 같은 신데렐라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콩쥐팥쥐’라는 옛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결국 착하고 순하기만 한 여주인공은 권력을 쥔 멋있는 왕자의 눈에 띄어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는 점이 이 이야기들의 공통적인 큰 틀이라면, 그 과정에서 조력자의 모습이라던가 결말 이후 악인들이 벌을 받는 행태는 모두 다르다. 그렇기에 이러한 양상을 비교해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소와 관습적 특징의 분포는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남성의 형태는 동화 신데렐라처럼 여성을 ‘구원’하는 것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어렸을 적 읽었던 ‘강도 신랑’ 같은 민담에서는 여성에게 일종의 공포적 대상이자, 부재된 소통의 근원지인 남성의 몰락을 그리는 과정으로 독자에게 새로운 차원의 위안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인간은 ‘스토리텔링’을 필요로 한다. 조작된 ‘이야기’는 우리의 본성과 욕망을 대변하며,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재탄생한다.
신데렐라가 과연 나약하기만 한 존재인가? 여주인공이라는 위치에 놓인 인물은 기본적으로 비범하다. 이 ‘비범성’은 당대 남성에 비하여 능력이나 권위의 차원이 아닌, 출중한 외모와 조력을 얻어내는 힘, “동물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던가 하는 판타지성, 그리고 위기를 모면하는 용기 등으로 표현된다. 이런 생각들이 한 관념으로 굳어져, 지금에 와 “여자의 능력은 남자를 ‘고르는’. ‘부추기는’ 일” 등의 편견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신데렐라 스토리에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만이 주된 극의 흐름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물론, 돈 없고 불쌍하지만, 예쁘고 어린 여성이 평소라면 마주칠 수조차 없는 왕자님과 로맨스를 벌인다는 것 자체가 당대 여성들의 대리만족과 헛된 꿈을 양산한다는 점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대 여성들이 자신의 불행을 벗어던지고,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던 방식, 집안을 일으켜 명예를 얻고 좋은 밥을 먹으며 살아갈 수 있던 방식은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 아닌, 결혼이라는 제도를 아주 잘 이용하는 수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의도된 또 다른 특징들은 없을까? 일단 ‘옷’의 문제가 눈에 띈다. 여성은 결국 자신의 원모습을 가리는 아름다운 옷을 입으면서 왕자와의 사랑을 쟁취한다. 또, 시간의 제한성이 있다. 특정 시점이 되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하는 여성은 현실과 환상이라는 두 갈래의 과제 사이에서 고민한다. 마음 같아서는 환상 속에 있고 싶지만, 사실 더 큰 바람은 왕자가 자신의 ‘현실’까지도 모두 포용해서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이니 말이다. 대모 요정, 새, 두꺼비, 물고기, 암소 등은 모두 그녀의 선함에 반하여 그가 자신의 뜻을 이루도록 도와주거나, 일종의 영물로 작용하여 긍정적인 미래로 가는 길을 간접적으로라도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헨젤과 그레텔은 맛있는 과자집 그림 덕에 몇 번씩 다시 읽던 동화책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러나 이 스토리가 가진 숨겨진 뜻과 함의에 대해 깊게 고민해본 적이 잘 없어서 그런지 이러한 과정이 꼭 필요한지에 대해 조금의 의문이 드는 순간도 있었다. 사실, 후대 사람들이 과거의 민담, 특히나 구전된 이야기를 분석하는 것에는 응당 왜곡과 과대해석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인간 심리의 발달 과정이나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성에서 파헤치는 것이 실제로 유용하거나 ‘바람직한’ 일인지는 심히 의심스러우나, 내 나름의 관점을 담아 읽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내가 느낀 한스와 그레텔은 부모와 자식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자,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켜낼 수 있는 천륜이 아닌, 사실 철저한 보호, 관찰, 투자, 이익 관계 하에 놓인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혈연이 아닌 양어머니 하에서 키워지고 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는 서술 배경이 되고는 있지만, 그들이 마치 아낌없이 음식을 퍼주는 마녀의 과자집에 쉽게 홀리게 된 것도 더 이상 불편한 눈칫밥을 먹을 필요 없이 맘놓고 “사육당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늘 배불러도 더 먹으라고, 많이 먹으라고 말씀해주시는 조모의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들은 그나마 다행히도, 결국은 환상적인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배고픈 현실로 돌아갈 마지막 방도인 ‘빵가루 길’을 만들어놓는데, 이조차 방해를 받지만, 다시 조력자인 새들로 인해 친아버지에게 돌아간다.
식솔이 한 명 느는 것은 단기적으로 보면 같은 양의 의식주를 나눠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부모에게 부담을 주지만, 장기적으로는 그들을 부양할 자식들을 양육하는 것은 신이 주신 섭리이자, 책임과 역할인 것이다. 모성애와 부성애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부모와 자식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이는 자급자족 시대였던 과거의 사회상에서 강조되는 가치였다.
무서운 남성과 아름다운 여성, 미숙한 남성과 성숙한 여성, 강력한 남성과 나약한 여성, 그리고 충동적인 남성과 침착한 여성 등등 우리는 남녀가 대비되는 성격과 특성을 가진 많은 옛날이야기를 봐왔다. 이것을 그저 옛날이야기의 한 부분으로만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왜 무섭고 야수적인 여성과 아름답고 침착한 남성의 사랑 이야기는 우리가 현대로 오기 이전, 심지어는 근대에서까지 거의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일까? 우리가 기대하는 남성상, 혹은 여성상이 확실히 과거의 가치관으로부터 꽤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에 따라 많은 애니메이션 영화사와 동화책, 예컨대 ‘디즈니’ 같은 곳에서 이러한 관점을 부각하고 끊임없이 재생산, 혹은 관점에 따라 조금씩 변형해온 것이다. 그 관점을 가장 잘 파악해낼 수 있게 하는 문화의 산물은 바로 민담이다.
이는 대표적으로 미녀와 야수 계열에서 드러나는데, 야수가 미녀에게 단단히 당부하는 규칙이 하나 있다. 성의 모든 방을 들어가도 좋지만, 서쪽 탑 맨 꼭대기 층의 방만은 금지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각 나라의 민담(3가지 미녀와 야수)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그럼에도 각각의 민담 계열들이 (푸른수염과 같이) 분명히 겹치는 데가 있다는 것도 연구해볼 만하다. 옛이야기들이 왜 다 거기서 거기인 듯한 느낌을 주는지는 역사의 뿌리와 시작에서, 혹은 인간이 범세계적으로 쫓는 이상과 본능의 추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민담을 통한 연구에는 정신분석학적인 연구도 존재하는데, 꽤 억지스러운 의미 부여나 유추, 과도한 해석을 찾아보기 쉽다. 더욱 ‘현실’적이고 실증적인 결괏값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사회문화학적, 더 나아가서는 인류사적 접근이 분명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들 속에서 드러나는 악의 모습에 집중해볼 수 있다. 보통 선과 악을 설정하는 과정은 나와 다른 이를 ‘타자화’하는 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느 한쪽을 좋은 가치로 그려내기 위해서는 이와 대비되는 안 좋은 가치를 가진 인물, 혹은 장치를 배치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이는 보통 전형적인 악인의 경우가 다반사인데, 계모나 강도, 괴물 등등으로 표상된다. 그러나 만약 악을 대변하는 이가 내 가족 중 한 명이라면? 그것도 나와 생을 함께하는 동반자, 남편이 된다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두렵다. 그 두려움을 극대화하고 있는 요소는 괴물, 짐승으로 대표되는 그의 외형이다. 악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가족의 ‘악함’은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새어머니의 악함, 아버지의 무능함, 마녀의 호의 섞인 계략은 모두 순전히 나쁘기만 한 악의 형태가 아니다. 심지어 마녀라는 상징을 친어머니의 ‘엄한 꾸짖음’으로 본다면, 더더욱 이 ‘악’은 때에 따라 필요한 존재로 다가온다. 마치 더 큰 대의를 위한 용인이 필요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와 같은 논리를 ‘마녀사냥’과 연결지어보자. 신의 무능함이나 악함이라는 결론을 회피하기 위해 현명한 용인은 종교적인 합리화에 수반된다. 꼭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어도, 일종의 위로와 대안책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를 본다면, 처음 결혼이라는 제도를 그 ‘당사자’로 맞닥뜨려 이전과는 다른 장소와 문화 속에서 그것도 잘 모르는 무서운 존재, 남편과 살아가야 하는 여성들의 공포 어린 걱정을 조금이라도 무마하기 위한 것일지 모른다. 처음으로 원가족과 떨어져 당시로서는 ‘시집’을 가야 하는 입장에 처한 여성들의 고충이 더해져 남편들이 마치 인간도 아닌, 덜 성숙한, 못생기고 험악한 야수처럼 느껴지는 것이 시사되고 있다. 같은 상황에서, 미녀와 야수 계열의 이야기들은 이미 똑똑하고 아름답지만 힘없는 여성이, 곧 인내하면 미숙하고 야수 같아 보이는 남편의 탈바꿈을 일으켜 이전과는 대비되는 ‘왕자님’과의 꿈같은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을 가져오며 당신의 남편을 너무 불신하지도, 또 너무 믿지도 말고 지혜를 발휘하여 인생을 살아가라는 교훈을 주기도 한다.
한편, 2차대전 중 민간의 아픔을 그린 베르코르의 <바다의 침묵>은 ‘저항’과 '신념'의 덕목을 보여준다. 침묵에는 큰 힘이 수반된다. 누군가와 “말도 섞지 않겠다”라는 다짐을 지키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정치 성향, 시대 상황과는 별개로 개인이 개인에게 느끼는 호감, 그리고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놓지 않는 고집은 이런 유형의 문학에서 중요한 가치의 지점으로 작용하고 있었고, 독자인 나 역시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기분이 드는 작품이었다. 어린 조카딸은 ‘안녕히’라는 말로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자신이 그동안 충성했던 나치의 실체를 알게 되는 과정은 전쟁 속에서 그 누구 편이 온전히 선하거나 악할 수 없다는 결론을 가져온다.
비인간적인 면모는 세대를 거쳐 양산되고, 겉과 속이 다른 윗사람들의 계략이 기만으로 드러나면서 팽팽했던 긴장의 끈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정작 나도 내 삶을 살면서, 가치관이 다른 이와 괜한 자존심을 부린 적이 많은데, 이런 전시상황에서 국민 각각의 일상이 얼마나 피폐해졌을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맥락은 어떻게 그것을 바라볼지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겹겹이 쌓인 껍질을 벗겨내면, 나와 똑같은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