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과 <피로 물든 방>
<푸른 수염> 이야기는 ‘푸른 수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된 한 여성이 그의 잔인한 비밀을 파헤치게 되면서 겪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남편이 이전에 결혼해 온 자신의 부인들을 모두 죽여서 방 속에 그 시체들을 숨기고 있던 것을 알게 된 현부인은 그에게 자신도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가족, 그중에서도 친오빠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는 설정을 보여준다.
<강도 신랑>과 <하얀 새>는 이러한 푸른 수염 계열의 대표적인 이야기들이다. 역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남편과의 결혼을 앞둔 여성은 어딘가 께름칙함을 느끼고, 알고 보니 남편은 식인종, 혹은 살인자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이후, 조력자인 동물이나 노파를 통해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구하고, 지혜를 발휘하여 그들을 형벌에 처하게 하는 양상은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여기서 특징적으로 짚어볼 수 있는 부분은 ‘조력자’이다. 남을 도와주는 위치에 있는 조력자는 자신이 충분히, 넘치게 강력하거나 힘이 있어서 주인공을 돕는 것이 아니다. 노파, 동물 등은 누가 봐도 나약한 ‘약자’로 대변된다. 그들에 주인공까지 가세하여 “약자들이 힘을 합쳐 나쁜 이를 물리치는” 구조가 완성될 수 있게 된다. 앞서 언급한 ‘콩쥐팥쥐’에서 역시 두꺼비, ‘백설공주’에게는 난쟁이, ‘신데렐라’에게는 쥐와 새 등등, 동물이 아니라면 사회적으로 빈약한 존재들이 그녀의 ‘행복한’ 결말을 이룰 수 있게 돕는다. 그리고 이들은 항상 결정적인 조력보다는 그에 수반되는 조력을 행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의 결정적이고 적극적인 개입과 조력은 역시 그녀와 가까운 위치의 ‘남성’, 가족 중의 ‘오라버니’ 등이 보여준다.
많은 옛이야기나 소설,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를 분석해보면 이러한 조력자의 도움은 영웅 서사에 필수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영웅은 결국 그들의 도움을 딛고 서서 큰 뜻을 이루고 고향으로 귀환할 방도를 찾는다. 누구나 스스로 완전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는 교훈을 주고자 한 것일까. 혹은, 권위나 표면의 모습에 속지 말고, 도움을 받을 때는 받을 줄도 아는 겸손한 모습이 목숨을 구한다는 교훈일지도 모른다. 특히 개인주의가 만연한 요즈음의 현시대와는 달리, 예전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돕고 사는 것만이 생존 방식일 수 있었던 시기였기에 더욱 이러한 가치관이 묻어났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
복종을 받는 자가 무식하고, 복종을 하는 자가 현명해 보이는 행태 역시 우리가 많은 옛이야기 속에서 봐왔는데, 늘 권력을 쥔 자들은 생각보다 한 치 앞을 보지 못하고 멍청한 듯 순진하며, 유혹에 쉽게 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또 그 귄위주의와 ‘이기적임’은 하늘같이 높다. <대나무와 임금님의 귀>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꼭 조력자의 위치에 서는 무고한 동물들은 배경의 개연성과는 분리된 무작위적인 등장을 보여주며 사람처럼 말을 하거나 자의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도 허구의 동화만이 줄 수 있는 환상이면서 동시에 여성 주인공들의 놀라운 능력과 짐승도 반한 아름다움을 체험케 하는 요소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푸른 수염 계열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재생산 및 배포되며, 남성과 여성의 위계나 특징들에 대한 해석은 물론, 악한 행위는 숨길 수 없이 ‘악취’가 나는 법임이 더욱 강조되어왔다.
그렇게 행복한 러브스토리 역시 완전히 허구의 것만은 아니며 실제로도 존재하고, 사랑이 충만한 결혼을 한 이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보통은 반강제로 ‘결혼’이라는 명목하에 여성이 남성에게 몸 바쳐진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아내는 남편에게, 딸은 아버지에게 희생해야 했고, 가문을 일으킬 도구였으며 손색없는 신랑감을 마주하면 군말 없이 따라나서도 좋다는 생각을 그들에게 세뇌했다. 마치 무슨 ‘제의식’처럼 말이다. 그렇게 가장 참하고 순종적이며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그려지는 인물들은 더 이상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관한 분별이 서지 않으며 불만도 불만이라 느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항상 첫째도 둘째도 아닌 막내딸은 재치를 발휘하고, 악으로 그려진 남성의 단순한 면모를 역이용할 줄 아는 맞춤형 인재로 태어난다.
이 이야기는 또한 결혼에 대해 남성과 여성 모두가 환상에서 벗어나 신중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보편적이고 교훈적인 메시지도 엿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문화사적 의의가 크다. 이러한 짧고 단순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민담을 재구성하는 방식에는 비슷한 요소가 조금씩 대체된다는 사실뿐 아니라, 구전의 과정에서 과연 이것의 내용과 결말, 구성이 왜곡 없이 전달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도 가져볼 수 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미의 기준이 변화해오는 것처럼, 사회가 바라보는, 지향하는 가치는 끊임없이 문화적 변동을 겪는다. 그 이유가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이 모든 요소는 우리가 옛이야기, 혹은 전래동화라 부르는 그 ‘스토리’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피로 물든 방>은 이러한 민담들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다시 파악하고자 ‘엔젤라 카터’가 저술한 책으로, 재편집된 민담들을 새 시각에서 바라보는 과정은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이곳에서의 여성들은 적극적이며 과감하다. 개성이 충만하고 휘둘리지 않으며,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늘 주체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조금 더 자극적인 요소들 역시 가감 없이 등장한다. 어린이들을 위해 변용, 어쩌면 ‘훼손된’ 버전 이전에, 우리 조상들의 은밀한 놀잇감이기도 했던 민담의 특징이 가장 잘 살아나는 순간인 것 같다. 이러한 진짜 민담의 모습을 마주하며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던 감정은 이상하면서도 당연하게도 “속이 시원하다”였던 것 같다. 민담을 분석하는 것은 단지 과거의 것을 파헤치는 작업에서 더 나아가, 현시대에 남아있는 여러 역사의 잔재, 아픔, 그리고 사고방식들을 재탐구하는 시간을 제공한다. 때로 동화에는 현실의 잔혹함이 요구된다. 허황된 이야기만 할 시간이 없다. “Write”을 할지, “Rewrite”을 할지, 혹은 “Think”를 할지 “Rethink”를 할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끊임없이 배우고, 다시 쓰고, 시각을 갖고, 분별과 비판 하에서 새로이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이데올로기의 찌끄러기만 먹고 살게 될지 모른다.
모두 여성의 책임에 많은 것이 달려있다고 보는데, 이것이 여러 영화사나 집필가의 손을 거치면서는 조금씩 남성중심적인 시각이 담겨 남성의 주어진 ‘미션’과 모습을 바꾸려는 행동에서 비롯되는 결과들을 중요하게 설정하는 경우들이 늘어났다는 것 역시 유추해볼 수 있다. 이전 시대로부터 전해져 오던 이야기에서는 생각보다 여성의 능동성을 강조하는데, 물론 여기에서의 능동성은 스스로가 비범하거나 강력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현명한 판단과 일종의 “소프트파워”, 그리고 다양한 “착한”, 그리고 “약한” 조력자들의 힘을 모으는 ‘B급 권위’에서 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본다면 남성만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닌, 여성은 이와는 또 다른 종류의 권위를 잘 굴릴 줄 아는 면모를 가진 존재로 표상된다. 소위 “무식하고 힘만 쎈” 남편의 곁을 지키든, 벗어나든 그것은 아내인 여성의 선택이다. 여성에게 금기를 논하고, 자신의 세상에서 살기 위해 지켜야 할 규율들에 대해 강요하며 과거의 잘못을 덮으려는 남성의 ‘무모함’이라는 장치는 푸른수염 계열의 이야기뿐 아니라 많은 구술 문화 속에서 드러나는 가부장제라는 악습에 대한 반란의 외침으로도, 현시대에 어울리는 말로는 ‘페미니즘’적인 시대의 한 걸음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의 생물학적 나약함을 인정하고 있는 어쩌면 실용적인, 어쩌면 조금은 모자란 페미니즘일 것이다. 과거의 여성은 남성이 여성을 필요로 한 것보다 훨씬 더 남성을 필요로 했고, 생존을 위한 결혼을 했으며, 원하지 않는, 심지어는 모르는 남자와 첫날밤을 가지기도 했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대부분 당연했고, 여성이 갖춰야 할 예의와 남성이 갖춰야 할 예의는 천지 차이였다.
남성에게 복종해야 하는 여성들은 알게 모르게 속으로 남성의 잘못이나 악함, 더러움, 귄위에 가려진 무식함 등을 낱낱이 밝히고 싶어 하는 혐오와 애증이 섞인 마음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와중에도 남성 내면에 숨겨진 덕복한 인성과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줄 아는, ‘현안’을 지닌 여성만이 완벽한 남성을 쟁취할 것이라는, 마치 ‘신데렐라’적인 결말과 함께하는 누가 봐도 인기 많을 스토리로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