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이 못된 자들

진즈부르그의 서민문학, <치즈와 구더기>

by young


숲을 먼저 보는 사람이 있다면, 나무를 먼저 보는 사람이 있다. 구술문화의 경우 어떤 사람이 더 그 특징을 잘 파악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면, 나는 후자의 경우라 대답하고 싶다. “과거 이탈리아의 작은 산골 마을, 방앗간 지기의 마음 속 세계”, 이 자체가 이 텍스트의 주요 소재라면 당연히 우리는 큰 역사의 흐름을 볼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삶의 풍경을 ‘개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응당 중요할 것이다.


오늘 살펴볼 텍스트, <치즈와 구더기>는 상층문화에 종속된 형태로서만 민중문화를 파악하는 것이 아닌, 16세기의 한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의 눈과 입을 빌려, 오랫동안 민중 계급에 의해 축적된 농민문화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방법론이 가지는 긍정적 의미는 꼭 배운 것이 많아야, 돈과 땅이 많아야 지성적일 것이라는 틀을 깨고, 글도 겨우 읽고 언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메노키오라는 평민이 체계적인 역사에 대한 통찰과 합리주의적인 사고를 발전시켜가는 과정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당시 인쇄문화의 발전과 종교개혁은 상층민뿐 아니라, 하층민들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혁신적인 시대 분위기의 변화와 옛 것과 새 것의 과도기는 이곳에서 철저히 옹호, 때로는 비판되고 있다.


미시사의 대표작으로서 <치즈와 구더기>에서 드러나는 메노키오의 우주관은 전반적으로 기독교의 권위를 부정적으로 성찰한다. 그들이 갖는 교리는 부정부패로 가득 차 있고, 농민의 삶을 혼돈으로 밀어 넣으며, 그들을 가혹하게 착취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메노키오는 살면서 얻은 지적 경험과 읽은 책이 많지 않지만, 기독교가 그의 환경을 온전히 팽배하고 둘러싸던 시기에, 이들의 억압성과 제도권의 문제를 날카롭게 짚어 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작은 혁명은 그의 머릿속 사건이다. 그는 이것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할 상황도, 여건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중의 한이 서린 불만은 당시로써 “뒤에서 호박씨 까는” 식으로 무시당하고, 쟁점화되지 못했다. 그는 먼저 나서서 이단이 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부정할 소위 ‘깡’이 없었다. 나서지 못하지만, 메노키오라는 인물은 그 자체로 민중이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라는 것을 상징해주기도 한다. 시대의 주인으로서, 자유의지를 갖고, 권력에 대해 조금이라도 다르게 인식, 접근하여 맹목적으로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일탈’,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는 ‘개척’의 차원으로 미화되기 때문이다. 한 권의 역사서이자, 문학 문화의 한 지평을 차지하는 이 텍스트는 기록된 언어, 역사, 신념의 도약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메노키오는 책을 대할 때, 그저 언어를 습득하는 방식으로 읽지 않는다. 그가 만약, 글을 편하게, 아주 수월하게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오히려 빨리 읽고 그다지 오래 생각하지 않고 책을 흘려보냈을지 모르지만, 그는 리터러시의 한계를 가지는 인물이었다. 그가 문자를 대하는 방식은 방대한 배경 지식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 책이 가지는 글자의 이면, 그 뒷면을 읽어내는 데 있다. 기존의 농민들이 익숙했던 구술문화처럼, 자신의 독자적인 의견과 문득 문득 드는 생각을 이미 적혀진 글에 대입하여 읽는 것은 그를 남들과 똑같은 수준의 독자로 남게 하지 않았다. 그의 독창성과 혁신성은 때로는 언어를 과대해석하고, 때로는 과소평가하면서 ‘왜곡’된 독서 방식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궁극적으로 그를 계몽된, ‘깨어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독서가 가진 핵심은 '초월'이다. 단지 어떤 단어와 어떤 단어를 연결하는 매개를 읽는 것이 아닌, 강조와 배제, 변형, 분석하는 모든 과정을 글을 대하는 태도로 가져와, 되려 구술문화의 방식으로, 문자문화로부터, 다시 구술문화를 이끌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삶을 경험하는 측면으로만 보면, 구술문화가 문자문화보다 못한 게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특히 그것을 주로 대하는 사람들의 교육 수준을 넘어서서, 정신의 개혁성을 가지고서만 비교한다면 말이다.




결국, 농민문화는 상층문화에 비해 유동적이다. 당연히, 모든 것을 정해진 텍스트로 접하는 문자문화에 비해 구술로 전해지는 구전문학은 그 ‘내레이터’에 의해 융화, 변주될 수밖에 없는 특징을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속에서 개별인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종교적인 신념과 시대사회적 맥락은 무의식적, 또 의식적으로 반영되고, 사료상에서 드러나는 것뿐 아닌, 적히지 않은 수많은 억압의 민중문화를 다시 보게 만든다. 절대로 민중 역사가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안된다. 하나의 어휘는 무궁무진하다. 단지 보이는 뜻이 그것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메노키오는 스스로 이러한 이야기를 남긴다. 흙, 공기, 물, 그리고 불, 이 모든 것은 혼돈 그 자체이며, 이것들이 함께 모여 하나의 큰 덩어리를 형성하는 것이 마치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보면 그렇다. 위에서 아래로만 어떤 신념이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우유가 치즈를 만들 듯이, 흘러가던 많은 사람의 염원과 가치들이 모여 특정 ‘주류’를 만들고, 그 주류가 나은 부차적인 효과, 부작용, 이 모든 찌꺼기들이 다시 모여 이를 자기들끼리 갉아먹는 ‘비주류’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역시 세계의 상대성, 그리고 구전 문화의 깊은 유래는 민중이 마음 펴고 자신의 진실된 생각을 말할 수 없던 시대의 절망, 그리고 미래를 향한 희망으로 남아 우리에게 전해진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간의 관계가 지니는 이러한 상태가 변화할 방식은 서로 화합, 대결, 또 보충, 연장하는 차원에서 역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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