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캠피온 감독의 영화, <피아노>
<피아노>의 여성 주인공인 에이다는 벙어리다. 즉,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장애가 선천적이지 않고 후천적이라는 것이 작품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섯 살 때 이후로 말을 하지 않기로 한 그녀는 설명할 수 없는 억압과 심리적 불안감으로 인해 목소리를 잃어버린다. 분명 귀는 잘 들리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미혼으로 낳은 사생아인 딸이 한 명 있는데, 이 역시 그녀가 과거의 남자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을 상징하며 그녀를 더욱 약자의 계층으로 몰아넣는다. 결혼할 여자가 벙어리어도 상관없다는 말에 그녀는 저 멀리 바다를 건너 시집을 가게 된다. 역시 ‘아버지’의 선택으로 말이다.
남편은 피아노에 집착하는 에이다를 베인스의 집으로 보내 그를 ‘레슨’해주라 요구했으며, 그녀는 피아노를 연주하기 위해 그를 찾아가고 그렇게 둘만의 은밀한 거래가 시작된다. 나는 왜 이 영화가 수업 시간에 다룬 민담 토픽과 연관이 있는 것일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 장면에서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여성의 금기된 호기심. 어긋난 규칙을 문제시하는 민담처럼, 에이다는 예술적 호기심, 그에 더해서 성적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베인스와 불륜을 저지르게 된다. 그녀는 이제 피아노를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와의 키스를 위해 먼 산을 오르게 된다. 심지어 이 영화 중 한 장면에서는 노골적으로 ‘푸른 수염’ 이야기를 연극으로 공연하는 사람들도 비추는데, 아주 직접적으로 그와의 연관성을 확고히 하고자 한 감독의 의도로 보인다.
에이다는 불완전한 사람이다. 이는 그녀가 벙어리어서가 아니다. 그녀가 미혼모였기 때문도 아니다. 그녀는 도덕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고, 딸에게 있어서 좋은 엄마라든지, 남편에게 좋은 아내도 될 수 없었다. 그녀는 조용했지만, 조용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늘 그녀의 과격한 몸짓이나 글, 수화, 딸 플로라, 그리고 피아노라는 수단을 통해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는 즉각적으로 원하는 피아노 연주와 베인스의 사랑이 필요했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베인스를 사랑하게 된 계기도 피아노에 있다. 베인스는 남편과 달리 자신의 음악적 능력과 연주를 아름답게 생각해주고, 관객이 되어 늘 옆에 앉아 들어주었다.
물론, 베인스도 “남의 여자를 탐하면 아니 된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십계명도 지키지 못하는 이였으며, 여자를 사고파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그녀의 남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에이다는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받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생각해보면 여성이 기존에 지녀야 했던 덕목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는 말이 없어지니 가만히, 수동적으로, 토 달지 않고, 하라는 대로, 아름답게만 존재할 것 같은 착각을 주기도 한다. 남편은 그녀가 말을 못해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그가 그녀를 위해 희생해나갈 부분을 더 내주지는 않은 반면, 베인스는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그녀의 예술성을 알아봐 주었기에 그와 대조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에이다를 능동적으로 사랑에 임하게 해준 것은, 그 변태적인 사랑의 반란을 시작하게 해준 것은 바로 베인스였다.
이곳에서 에이다의 선택은 자신의 일부인 목소리를 버림으로써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고자 노력한 흔적, 그리고 들을 가치가 없는 외부의 소리들을 묻고 얼마 남지 않은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지켜내기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물론 직접,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장애라는 것이 과연 진짜인지 그 상징적 모순에 부딪히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성 감독의 선택이 에이다의 선택에도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말 대신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대 시기에서 여성의 주체가 태동하기 시작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드러내게 만든다. 또한, 왜 이 영화의 제목이 피아노일까? 피아노 역시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실내에서 여성이나 아이들이 간단히 연주하기 위해 만들어진 마치 가구 반, 악기 반의 물품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악기들과는 다르게 잘 옮길 일이 없으니 무겁고, 표면에 화려한 장식이나 각인을 새긴다.
피아노는 그 자체로 여성과 닮아있다. 바이올린이 남성이라면, 피아노는 여성이다. 현시대에 활동 중인 현역 피아니스트들은 압도적으로 남성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태생적으로 피아노는 여성의 젠더적인 특징과 유래를 가진다는 것이다. 피아노는 사람들이 구경오면 보여주기 좋고, 간단한 작품을 연주할 정도로는 배우기 딱히 어렵지도 않다. 현악기만큼 악기의 온, 습도가 예민하지 않아서 조율만 종종 해주면 다루기도 쉽다. 역사적인 관점과 이유, 그로부터 오는 분노의 시선을 가장 우아하고 기품있게 담아내기 위해서 ‘피아노’만큼 적절한 대상과 요소, 제목이 또 있었을까?
작품 외적, 내적, 그리고 표제 모두에서 여성의 시선이 담겨져 있다는 점은 영화 <피아노>라는 작품을 특별하게 만든다. 영화는 성공적인 마무리를 가졌고, 많은 이들은 이를 통해 어떤 해방감을 느끼기도 하고 역겨움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아름다운 것만이 존재할 수는 없다. 사실 같은 여성이라고 해서 에이다가 이해되는 것이 아니듯, 감독이 오롯이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옛이야기’적 특성의 모순을 밝혀내려 영화라는 매체를 재구현하면서도, 백인우월주의 마저는 벗어나지 못했다. 이 작품에서는 백인 여성과 남성, 서양의 악기, 피아노를 중점으로 스토리가 흘러가다 보니, 타자화할 대상이 다른 인종이면서 다른 문화에 속한 원주민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마치 옷은 다 벗은 채 짐을 옮겨주고 돈을 받는 일을 하면서 음란한 농담을 아무렇지 않은 하등의 인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본다면 이 작품도 온전히 그 자체로 완벽하지는 않지만, 영화라는 것이 감독이 가진 시선의 ‘재현’이다보니 몇몇 오류들이 담기는 것 같다. 이 영화는 내게 기존에 배운 여성의 금기된 호기심을 훨씬 적나라하고 비도덕적이며 추하게 표현하면서도 마치 그녀를 응원하게 만드는 착각을 일으켰고, 그녀가 피아노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녀의 소리는, 그 시끄러운 침묵은 언제고 일어서서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포효의 화음을 외칠 수 있게 될 것이라 믿게 해주었다.
극이 결말로 치닫게 되면서, 결국 에이다의 불륜은 발각되고, 남편은 그녀의 몸을 가질 수 없었을 때보다 마음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더욱 분개하여, 그의 모든 자존심과 소유 욕구에는 금이 가게 된다. 그렇게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이었던 피아노를 부수고, 그녀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버린다. 이 장면은 매우 잔인한데, 보는 관객도 무서울 만큼 금기된 행동을 저지른 나약한 여성과 그런 여성을 제압하는 폭력적인 남성을 표현해낸다. 심지어는 딸에게 그 손가락을 쥐어주며 베인스씨에게 가서 보여주라고 하니 그 딸이 도대체 엄마 아빠로부터 뭘 보고 배우고 클지 심히 걱정되기까지 한다. 사실 에이다의 딸 플로라는 에이다와는 또 다른 생존 전략을 취하고 있다는 점도 독특한데, 엄마인 에이다는 본능에 충실한 사랑을 저질렀지만, 딸은 안정적인 가정 속 자신의 아버지를 택했다.
아마 그녀의 마음속 어딘가의 무의식에서는 “저러다가는 엄마가 새로운 아빠와 새로운 가정에서 다시 버림을 받을 것이니 나는 아빠의 편에 서야겠어. 그렇게 살아남아야겠어.”라고 다짐한 것 마냥 굴기도 한다. 이 작품을 에이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사실 불륜을 들키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도 늘 딸에게 있다. 딸이 유난히 도덕적인 아이여서였을까?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않고는 살 수 없어서? 분명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다. 딸도 엄마만큼이나 성숙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상황을 두고 보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속절없이 엄마를 다치게 만들 줄을 예상이나 했겠는가. 사랑하는 엄마의 외도가 그녀에게 실제로 얼마나 큰 상처이며, 충격이었을지 감히 상상되지도 않는다. 어머니에 대한 미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사랑이 뒤엉킨 행위의 결과는 말할 필요도 없이 처참했다. 그렇게 손가락을 잘린 에이다는 사실상 그날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배를 타고 베인스와 영국을 향해 가는 길에 그녀가 피아노를 버려달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 역시 그것과 함께 물에 빠져 죽으면 오히려 조금 살 것 같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에이다는 베인스가 선물해준 쇠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연주한다. 그녀는 저지른 잘못과 남편의 잔인함을 그녀 스스로의 지혜나 주변의 조력자를 이용해 벗어나고 해결하였다기보다는, 딸로 인해 들킨 불륜과 이로 인한 남편의 화를 새로운 사랑으로 이겨낸다. 그러나 이것이 훨씬 덜 판타지스럽고, 환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극 현실주의에 가까울 것이다. 꼭 죽음이 나쁜 것이라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피아노와 함께 영원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픈 그녀의 오래된 희망을 그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행복한 여성을 긍정적으로만 그리지도 않지만. 에이다가 작중 다른 여성들과는 차별화된 모습이 그려지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녀의 주체성은 결혼이 아닌 다른 부분에서만큼은 확고했기에, 그렇게 죽임을 당하더라도 베인스의 곁에 남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