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응시하는 세가지 방법

서동욱 <생활의 사상>

by young


문학과 삶의 진실, 문학과 정치, 문학과 구원.


이 세 가지의 주제는 예술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통찰하기에 아주 적절하게 느껴진다. 첫 번째로 문학과 삶의 진실에 대해 살펴보면,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문학은 표면의 사실을 보고하지 않고, 잘못 말하고 틀리게 말하고 비진리를 말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삶의 배후에 숨은 진실에 다가간다.” 이 문장을 처음 접한 순간 나는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평소에도 문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내가 당연히 문학에 대해 많은 것을 ‘잘’ 알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 속의 진리를 감히 꿰뚫어보지는 못해왔던 것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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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어느 정도 사실을 바탕으로 해야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작가의 진실을 이야기해야하는 것이다. 역사 서술은 이와는 반대로, 상상력을 기반으로 사실을 서술해야한다는 점에서 예술과 약간은 비슷하고, 또 약간은 다르다. Fact는 그저 Fact에 지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고 예술이 Fact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 역시 안된다. 사실을 한번 보고, 다시 보고, 다르게 봄으로써 예술은 그 정체성을 확고히 할 수 있다. 진리는 그것에 다가가려고 해서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소들을 다듬어가다 보면 그 나름의 의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바디우가 이야기한 “잘못 말하기”처럼, 우리는 예술이 가진 각각의 형식과 틀, 통제 속에서 우리의 진리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밝은 빛을 오래 보다가, 그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남는 잔상처럼 말이다.


문학과 정치는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예술을 바라본다. 예술에는 어떤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이 부여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술은 예술 그 자체라기보다는 어떠한 진리를 감추고 있다. 그리고 그 진리는 독특한 방식으로 사회와 상호작용하는데, 그렇기에 예술가와 예술은 절대로 온전히 구별될 수 없다. 예술은 예술가의 시선이 만든 피조물이자, 또 어떤 측면에서는 예술가의 그림자다. 그것은 예술가가 현실 세계에서는 드러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용기있게 말하게 해주며, 동시에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확고하게 만들기도 한다. 참여예술은 말 그대로 사회에 “참여”하는 예술인데, 이는 예술가가 이 세계에 대해 던지는 추파일 때도, 찬양일 때도, 야유일 때도 있다. 특히 위 책의 저자는 문학의 ‘정치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앙가주망”, 즉 참여란 세계에 대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관점을 전달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고히 한다. 무언가에 관여한다는 것은 결국 무언가에 대해 자신만의 생각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놓고 참여예술처럼 보이지 않는 작품에서도 우리는 정치성을 찾아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독일의 작가 괴테가 쓴 베르테르가 그 대표적인 예시로 등장한다.


나는 예술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늘 한 가지 의문에 시달린다. 과연 예술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혹은 이미 병리적으로 부패한 사회에 대한 비난의 눈초리를 쏘아댄다 한들 과연 실제 사람들 사이에서의 시민성이 향상될 수 있는 것인가? 또 사회에 관여하지 않은 순수예술과 과도하게 관여된 실용예술, 혹은 고급예술과 저급예술 등의 불필요한 위계를 만들어내지는 않을까?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힘들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든 것을 구분하고, 영역을 달리하여 머릿속에 집어 넣고싶어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위계가 생긴 것은 꼭 참여예술이 낳은 병폐인 것만은 아니다. 또, 문학이나 연극은 언어로 전달되기 때문에 꽤 직접적으로 사람들을 교화하고 계몽시킬 수 있다고 해도, 음악이나 미술, 무용처럼 그 자체로 추상적이고 전문적인 재료가 주된 예술 분야에서도 이와 같은 목적이 달성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어렵고, 어쩌면 고될지 몰라도 결국 예술을 향유하는 인간에게 예술작품의 주제와 방향성은 어느 정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그것이 많은 예술가에 의해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는다면, 이전보다는 더 큰 파급력으로 시대에 시대를 거쳐 우리 마음속에 큰 울림을 가져다줄 것이라 생각하고, 아니 그렇다고 믿고 싶다.



마지막으로 문학과 구원의 파트에서 저자는 예술의 본질에 대해 다루는데, 그 자체로 불멸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불멸, 즉 소멸하지 않는 것. 이 세상에서 소멸하지 않는 것은 참 몇 없다. 사람 사는 일에는 보통 유한한 것들이 끼어들지, 무한한 우주의 진리가 눈에 와닿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예술에서의 참됨과 좋음, 그리고 아름다움은 우리만의 방식으로 우리와 일치되어야한다. 나는 이전에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예술이란 자기 자신을 다르게 보는 방법”. 우리는 예술을 느끼고, 즐기고, 최대한으로 감각하면서 각자의 거울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내가 나의 쇠사슬을 풀고, 그 속에서 영원히 구원 받아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의 ‘구원’이란 우리가 흔히들 이야기하는 종교 속의 구원, 신화속의 구원이 아니다. 성질이 비슷할지는 몰라도, 성경에서 기대되는 영원의 언약이 아닌, 변화하는 영원성을 가진 예술 안에서, 우리는 모방되기 이전의 이데아가 품은 구원의 메시지를 발견하기도 한다.


인간은 스스로가 언젠가는 죽는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 그렇기에 한편으로 불멸성에 대한 염원과 갈증이 예술이라는 행위 안에서 찾아지는 것일지 모른다. 플라톤이 “시간을 불멸하는 것들의 운동하는 이미지”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현세의 시공간 속에서 예술로 탈바꿈되는 수많은 이데아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구원과 진리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예술을 이해했고, 구원을 이해했다.


물론, 문학을 중점으로 진리와 정치, 구원을 다루고 있는 책이었지만, 예술을 삶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예술작품을 남기고 간 그 모든 예술가의 침묵 속에서 우리의 다양한 생각이 꽃필 수 있음을 기억하며, 늘 비평적으로 세계와 세계 속의 ‘미’를 접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또, 미의 개념에 추를 포함한 칸트의 생각처럼, 단지 표면의 아름다움이 아닌, 세상을 구성하는 인간의 의도와 계획이 이룩한 그 모든 구조, 형태와 소리, 이야기들에 귀 기울여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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